<116화>
“밖에 와 있다고?”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셀렘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를 느리게 굴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좀 천재여야지. 그런 건 금방 알아.”
“아, 네.”
그러곤 거기까지만 말하고 또 모습을 감췄다.
셀렘이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닐 테니 나가 보긴 해야겠다.
저택의 현관은 꽤 조용했기에 정원을 따라 긴 길을 걸어 대문에 도착하자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아네트 오브리를 만나러 왔다고 하잖아.”
“아가씨께선 너 같은 하찮은 이민족 따위가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베겠다.”
“아, 이 답답하고 멍청한 뇌에 근육만 찬 놈들이 진짜. 약속했다고 하잖아! 네 주인한테 확인하고 와!”
얘 진짜 성격 안 죽었네.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다고 했을 텐데.”
그리고 저쪽은 또 한 고지식한 사람이고.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자 나를 먼저 눈치챈 셰키나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너! 내가 찾아온다고 했잖아, 왜 처리를 안 해둬?!”
“아니, 온다고 확실히 말 안 했잖아.”
물론, 아빠한테 말하는 걸 뭉그적거리다가 깜빡한 것도 있지만.
“아가씨…! 여기 이 야만인과 아는 사이십니까?”
“응, 내 친구야.”
“…이런 자가 말입니까?”
병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셰키나가 슬쩍 로브로 제 머리를 꾹 눌러 미묘하게 특이한 색의 피부를 가진 제 얼굴을 감췄다.
“여기 있기 불쾌하니까 당장 내가 지낼 곳으로 안내해.”
“…그 전에 삼촌들은?”
“도움도 안 되는 그런 놈들 버린 지 오래야.”
퉁명스럽게 말하며 셰키나가 병사를 스쳐 지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알겠어, 그 전에….”
나는 병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경은 내 친구한테 사과해 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정문을 지키던 병사와 셰키나가 동시에 움직임을 뚝 멈췄다.
“예? 아가씨, 저는 단지 임무를 집행하고 있던 것뿐입니다. 공작저에 아무나 통과시킬 수 없기 때문에….”
“알지. 나도 바보가 아니니까 문지기가 뭘 하는지는 알아.”
내가 방긋 웃자 병사가 잠시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근데 내 친구는 하찮은 이민족도 야만인도 아니고, 하물며 경에게 ‘이런 자’ 소리를 들을 사람은 더욱 아니지.”
“그건 단지 피부색이….”
“음, 내가 이민족과 야만인이 경에게 하찮다는 등의 혐오적인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도 지금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제국민 중엔 그런 피부색이….”
“이봐.”
나를 마주한 병사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반대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다른 병사가 그를 만류했다.
중얼중얼 변명을 내뱉던 병사가 결국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대처가 과했습니다.”
“응, 근데 사과는 나한테가 아니라 여기에 해줘야지.”
나는 뒤에 우뚝 서 있는 셰키나의 어깨를 붙잡고 내 앞에 세웠다.
“야, 지금 뭐 하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 그래.”
셰키나가 떨떠름하게 대답하곤 내 손을 붙잡더니 나를 질질 끌고 저택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 나 아직 말 다 못 했는데.”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아닌 걸 아니라고 지적해 준 것뿐인데.”
“그럴 만도 했지. 말했잖아, 내 꼴은 괴물 같다고.”
아니, 괴물 같든 아니든 문지기가 저렇게 사람을 무시하면서 대응하는 게 말이 되냐고.
“어쨌든 잘 왔어.”
“대체 여기서 뭘 하라고 부른 건지….”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나랑 놀아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고….”
“아ㅃ…, 그 사람은 허락했어?”
“뭐, 일단은….”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중간한 어설픔을 금세 눈치챈 듯 셰키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된대?”
“된다고는 했어. 근데 네가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했지.”
적당히 순화해서 말하자 셰키나가 입을 다물었다. 순화해서 말했다곤 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겠지….”
“그러게 내가 솔직하게 말을 하면….”
“말해서 뭐 하라고. 당신 진짜 딸이 영혼 팔고 몸도 뺏기다 못해 남들 몸 빼앗으며 그들을 죽이다 왔다고?”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는데.
“그래도 평생 숨길 건 아니잖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한 거 아냐?”
“뭐래? 여기는 네가 오라고 했잖아?”
그래, 다 내 탓으로 돌려라. 돌려.
내가 손을 휘휘 내젓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네트!”
맞은편에서 이노스 오브리가 활짝 웃으며 나를 불렀다.
손을 흔드는 그 모습에 마주 손을 흔들어주자 셰키나가 슬쩍 내 뒤로 와 몸을 숨겼다.
‘그런다고 숨겨지겠냐고….’
나보다 키도 크면서 말이다.
이내 긴 다리로 훌쩍 다가온 이노스가 내 앞에 섰다.
“어디 가는 길이야?”
“방에 가는 길. 오라버니는?”
“난 아버지께서 이번에 시키신 일 보고하려고 가는 길. 시간 되면 조금 이따 같이 다과라도….”
말을 잇던 이노스가 셰키나를 뒤늦게 발견한 듯 말을 느리게 멈췄다.
“누구야?”
이노스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셰키나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엄청 세게 나가더니….’
제 가족 앞에선 입도 벙긋 못 하다니.
그만큼 미움받기 싫거나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싫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내 친구.”
“친구? …너한테 이런 친구가 있었나?”
“응.”
내 대답에 이노스가 눈을 한 차례 가늘게 뜨더니 빙긋 웃었다.
아, 아빠랑 똑같은 가짜웃음이다.
“안녕하세요, 아네트에게 제가 모르는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는 아네트의 오라비인 이노스 오브리라고 합니다.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지요.”
어른이 된 이노스가 제법 정중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뻔히 보였다.
셰키나의 행색이 추레한데도 함부로 말을 낮추지 않는 점이 문지기 병사와는 다른 이노스의 대단한 점이다.
“…셰키나, 입니다.”
셰키나가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아하, 셰키나…. 어쩌다 아네트를 만났는지 물어봐도….”
“이노스.”
내가 한 차례 만류하자 이노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알겠어. 어딘가 목소리가 낯익어서….”
그가 의아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이후 뒷덜미를 긁적거리면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의아한 시선은 떠나질 않았다.
“아빠한테 간다며, 얼른 가 봐.”
“음, 알겠어.”
이노스는 찝찝한 표정을 하면서도 내가 등을 떠미니 결국 물러났다.
“좋겠네, 너는.”
그가 사라지자 셰키나가 슬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을 본 나는 냉큼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평생 숨길 거 아니잖아, 용기 생기면 말해. 도와줄 테니까.”
“됐고, 내 방은?”
그녀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 옆방?”
내 대답에 셰키나가 얼굴을 대번에 구겼다.
“최악이야.”
“좋으면서.”
“뭐?”
“아냐, 여기야, 들어가.”
솔직하지 못한 성격은 똑같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근데….”
셰키나가 제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 여기서 진짜 뭐 하면 되는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딱히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출근해도 되고.”
“출근?”
셰키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응.”
“그럼, 그러든가. 네 시종 같은 걸로 소개하면 되겠네.”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뺨을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위험 요소가 하나 제거된 건 다행인 일이었다.
‘위험한 짓을 하진 않겠지.’
같이 자매처럼 살게 되면 좋겠지만, 어렵다면 다른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할 듯했다.
그래도 이제 남은 문제는 셰키나뿐이니까.
“피곤하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무너져 내렸다.
수마는 금세 몰아닥쳤다.
***
달그락-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가지는 식사 분위기는 고요하고 살벌했다.
차가운 냉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느낌마저 들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옆에는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고개도 들지 않고 포크질을 하는 셰키나가 있었다.
맞은편에는 굳은 표정의 이노스가 있었고, 오른쪽의 식탁 상석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아빠가 있다.
그래, 사건의 시작은 오늘 아침… 내가 셰키나와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왔을 때 벌어졌다.
‘평소엔 다들 일찍 식사하면서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내려온 건데….’
셰키나를 생각해서 일부러 다른 가족들의 식사 타이밍을 피해 내려왔는데, 하필이면 딱 겹쳐버렸다.
그렇다고 거기서 돌아갈 수도 없었던 터라 꾸역꾸역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됐다.
“셰, 셰키나, 우유는 안 마셔?”
“안 마셔.”
“그래? 왜? 맛있는데.”
“…그냥.”
간신히 입을 열어 시작한 대화도 셰키나의 쌀쌀맞은 반응에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아빠가 힐긋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