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몸이 어딘가로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 것도 잠시, 이윽고 허공에 부양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외로워, 외로워…. 왜 난 부모님이 없을까? 왜 난…, 왜 난 이렇게 태어난 거지? 도대체 왜…. 내가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아…? 엄마랑 아빠는 왜 날 버린 거야….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징징 울렸다. 아주 앳되고 어린, 설움이 북받친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사방이 새까맸다. 온통 새까매서 불안이 덜컥 올라오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살려줘,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부모에게 복수하고 싶어. 날 버리고… 나만 버리고… 대체 왜!
귓가를 찌르는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웅웅 울려 퍼졌지만, 집중적으로 들려오는 곳은 분명히 있었다.
‘녹의 눈물….’
기억하기로 그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인 셰키나가 아빠, 그러니까 샤콜 오브리의 앞에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전체 연령가였기 때문인지 작중에서 셰키나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작은 의문이 든다.
셰키나 오브리는 대체 왜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 것일까?
‘그때 기록서는 셰키나 오브리를 가짜 딸이라고 했는데, 그건 대체 왜 그런 거지?’
아니지, 따지자면 이 세계에서 셰키나 오브리는 가짜가 맞기는 했다.
여기는 아니샤가 주인공인 세계니까.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기록서가 그런 의미로 말을 했을까?
‘아니면 그 셰키나 오브리의 몸속에 있던 게 진짜 아네트가 아니었다던가.’
이상한 일은 분명히 있었다.
원작 속 ‘아네트’는 자신을 ‘셰키나’라고 말하며 등장했다.
그러나 이번에 성녀로 나타난 공허의 악마는 자신을 ‘아네트’라고 칭했다.
사실 진짜 아네트는 지금처럼 공허의 악마로 존재하고 셰키나는 다른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문을 그렇게 멸문시킬 수 있었던 거다.
그렇게 추측하자면, 기록서가 ‘가짜’라고 했던 의미도 알 수 있다.
‘신 차장님은 대체 무슨 소설을 쓴 거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설정이 있는지, 아니면 멋대로 생겨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지….”
신 차장님의 방에서 봤던 리메이크 소설엔 ‘아네트’나 ‘셰키나’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여기가 리메이크된 세계관이라면 이 세계에 셰키나가 존재할 이유는 없다.
‘신 차장님이 몰랐던 건지, 일부러 말해 주지 않은 건진 모르겠지만….’
여기는 사실 원작과 리메이크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진 또 다른 세계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모든 의아한 사태가 이해가 됐다.
원작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던 이야기들, 올람이나 셀렘처럼 원작에서 본 적 없는 인물의 등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대체 여긴 어딘데.”
사방이 새까만 어둠이니 어디로 발걸음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 소원, 소원을 말해….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앳되지 않은 목소리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목소리가 진짜 셰키나의 것임을 깨달았다.
- 내게 소원을 말해… 뭐든 이뤄줄 테니까….
“내가 소원을 말하면 내 몸을 가져가려고?”
- 그건 내 몸이야! 나는 내 걸 가지러 가는 것뿐이야….
그건 내 몸이라고, 내 몸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이미 셰키나가 꽤 무너져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눌 거면 모습을 좀 보여주지 않을래? 그렇지 않아도 할 말도 있었어.”
- 싫어….
그 대답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젖힌 채 기다렸다.
소원을 말할 생각은 없다. 당연하지만 이 자리를 돌려줄 생각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럼 남은 것은 내가 그녀를 죽이든가 그녀가 나를 죽이든가 원만한 합의를 보는 것뿐이다.
“나타나지 않으면 대화는 없어. 소원도 빌지 않을 거야.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다면 나는 상관없고.”
어차피 힘이 먼저 빠지는 쪽이 질 거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급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 비겁자! 도둑놈!
나는 대꾸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꽤 오랜 시간 침묵에 휩싸였던 어둠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엉망진창의 셰키나였다.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조금씩 빼앗은 것이 분명한 듯 양쪽 눈 색과 두 팔의 색이 달랐으며, 머리카락도 이 색, 저 색이 뒤섞여 혼탁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날 비웃으러 오기라도 했어? 전부 내 거였는데….”
셰키나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탱탱 부어 있었고 꼴도 말이 아니었다.
‘이게 공허의 악마라니….’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고약한 이름이다 싶었다.
“악마와 무슨 계약을 한 거야?”
“나는 그냥…, 기회를 달라고 한 것뿐이야! 난 아팠으니까! 매일매일이 끔찍했다고!”
그녀가 끔찍한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 몸서리를 쳤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팠어…! 아팠다고! 실험이 끝나질 않으니까!”
셰키나가 풀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난 그저 가족이 누군지 알고 싶었어! 누가 날 이렇게 버렸는지! 그래서 모든 걸 알게 해달라고 했을 뿐이야! 행복해지고 싶어서!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그 거대한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분노를 담고 읊조려지던 목소리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응.”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셰키나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내가… 모든 걸 알게 되고 시간이 되돌려진 순간, 나는 내 몸에 없었어….”
“네 몸에 없었다고?”
“내 소원을 이뤄준 악마 대신, 내가 공허의 악마가 됐어. 공허의 악마는….”
아, 대충 짐작이 됐다.
“공허의 악마는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야.”
성녀라곤 볼 수 없는 모습의 소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원을 이뤄줘서 그 영혼을 빼앗으면 그 몸과 영혼을 뒤바꿔 나 대신 상대가 공허의 악마가 되는 거야.”
“…….”
“소원을 이룬 자가 공허의 악마가 되어 살아가고, 공허의 악마는 소원을 이뤄준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그 말은….”
“그래, 원래 그 몸엔 나 바로 전의 공허의 악마가 들어갈 예정이었어.”
“근데 그걸 내가 갑자기 차지했다는 거야?”
셰키나 오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공허의 악마는?”
“몰라.”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엉켜 있을 줄은 몰랐다.
결국 나를 대신할 누군가를 잡지 않으면 계속해서 공허의 악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를 버린 사람이 잘못했잖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는데…!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셰키나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새까만 눈물이었다.
눈물조차도 색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그저 새까만 어둠을 눈에서 뚝뚝 흘리며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사방을 뒤덮은 이 어둠은, 그녀의 눈물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기묘한 생각마저 들었다.
“왜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 거긴 원래 내 자리란 말이야! 왜 내가 그런, 그런 무서운 시선을 받아야 하냐고!”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이는 셰키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빠가 무섭긴 하지.”
그래도 역시 뼛속까지 매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본래 내 것이 되었어야 하는 내 자리를 네가 차지했어. 그런 이야기였잖아, 이건!”
“야, 세상에 정해진 이야기가 어딨겠어.”
나는 셰키나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나는 나대로 노력한 거야. 나도 살고 싶어서. 너만 노력한 게 아니라.”
이 애를 동정하기엔 나도 긴 시간 마음 편히 살지를 못했다.
나도 살고자 노력했고 나도 편해지고자 노력했다.
“아, 좋겠네! 다 가져서! 남의 걸 다 뺏어서 가진 너 같은 도둑 때문에 내가…!”
“어차피 나 아니면 공허의 악마에게 빼앗길 몸이었다며.”
“……!”
내 지적에 그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딱히 싸우자고 그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네 마음은 이해해.”
당연히 내가 다 가진 것 같으니 배가 아프겠지.
“근데 미안하지만 나도 성인군자는 아니라서 양보는 못 해. 난 아빠 딸이자 공녀로서 이 자리에 있을 거야.”
이 몸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든, 결국 내가 이 자리에 있으니까 말이다.
“…하,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그거였어? 네 자리니까 양보 못 한다고?”
한숨을 허탈하게 내쉰 셰키나가 이를 악물었다.
“맞아.”
“…….”
셰키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움켜쥔 손이 부들거리며 잘게 떨렸다.
“그래서 하는 제안인데.”
“꺼져.”
“너 우리 집 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