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30)

<111화>

닉스 이그나는 정말 몇 년 만에 다시 봐도 변하지 않아서 신기한 사람이다.

어쩌면 저런 면이 사람을 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갑자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인이 되어서 다시 받는 저 고백이 내킨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당황스러움에 반문하자 사브나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닉스 이그나를 보았다.

“…….”

등줄기가 서늘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자 카펠이 어쩐지 충격받은 낯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 건 아니지,. 사실 우리 나이면 이미 예전에 혼처는 잡혔어야 했으니까.”

닉스 이그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까망이는 이미 얘기 오가는 상대도 있어.”

그러더니 사브나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솔직히 의외인 얘기라서 눈을 끔뻑이자 사브나크가 민망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닉스 이그나가 내게 한 걸음 불쑥 다가왔다.

“나도 그렇지만, 아마 너한테도 슬슬 결혼 압박 들어갈 거야. 서로 적당한 혼처가 필요할 때지.”

“그러려나…?”

“예전에도 네 앞으로 혼인 제안서 꽤 쌓였었을 텐데, 몰랐어?”

“그래…?”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하긴 아픈 애한테 혼인 제안서가 들어왔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아빠라면 지금도 말하지 않을 것도 같고.’

음,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랑 정략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다시 사교계에 데뷔해 상대를 찾으려고 해도, 마음 가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너는 근데 왜 여태 구하지 않은 거야?”

“이그나 가문 인간의 마음은 쉽게 꺾이지 않거든. 네가 좋아. 그래서 널 기다렸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응.”

닉스 이그나와 내가 만난 세월이 뭐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까지 기다려준 걸까?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호쾌하게 웃고 있는 얼굴 아래로, 살짝 떨리는 입꼬리가 보였다.

가벼운 말이 아닌 건 알겠다.

그렇다고 해도 갑작스러워서, 사실 지금 당장 어떻다고 말하기는 좀 당황스러운 점이 있었다.

“아, 물론 네가 싫다고 하면 언제까지고 손대지 않을 거야. 뭣하면 시작은 정략결혼이라도 좋아.”

“…….”

닉스 이그나의 말에 나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단숨에 거절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진지하고, 그렇다고 고민하기에는 그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바로 거절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실례인 일이다.

“나는….”

“…응.”

“사실 널 잘 몰라. 우린 만난 횟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한 줄도 몰라서….”

지금까지 한 청혼은 반쯤은 가벼운 권유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는 말은 아마 닉스 이그나도 꽤 오랜 시간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치곤 왜 이렇게 넷이 모인 응접실이 고백 장소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랑 조금 더 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때?”

내 말에 닉스 이그나의 눈이 한껏 커졌다. 바로 거절이라도 당할 줄 알았던 낯이다.

그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닉스 이그나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결국 이 세계에 묻혀 살게 될 거라면 로마법을 따르듯 필연적으로 여기 법칙을 따르며 생활해야 할 것이다.

그게 눈에 익고 나를 존중해 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이면 나쁘진 않겠지.

‘운명의 상대 같은 게 세상에 존재할 리도 없고.’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설렐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닉스 이그나의 제안은 분명히 꽤 합리적인 것이었다.

“…네가 바로 거절할 줄 알았어.”

“네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넌 나름 진심으로 고백했는데 바로 거절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응, 고마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웅얼거리는 닉스 이그나의 가무잡잡한 뺨이 확 달아올라 있었다.

‘…얜 또 왜 귀엽고 난리냐.’

하긴, 자유분방해 보여서 그렇지, 닉스 이그나도 여자들 많이 울릴 얼굴이다.

‘여기 있는 셋 중 누가 안 그러겠느냐마는.’

음, 멋진 사람들 사이에 낀 오징어가 된 기분이군.

“고마워, 내가 잘할게.”

“답은 그때로 미룰게.”

“좋아, 최선을 다….”

“안, 나도!”

뒤에 서 있던 카펠이 달려와 나와 닉스 이그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도…, 나도, 결혼….”

카펠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카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카펠이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난….”

“어?”

“난 안의 동생이 아니야!”

잠시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그렇게 목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창문 너머로 뛰어내렸다.

“어? 잠깐, 카펠!”

식겁해서 후다닥 달려갔지만, 아래에는 카펠이 없었다.

꽤 솜씨가 좋은 실력자이니 능력을 써서 사라졌겠지….

“아오, 진짜 심장 떨어지게.”

창문에서 사람이 벌컥벌컥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면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쿵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친다.

“아니, 왜 저래? 사춘기가 온 건가….”

아니면 내가 더 어린데 동생이라고 한 게 기분이 안 좋았으려나.

“…사춘… 큽…, 너도 진짜….”

사브나크 아데우스가 입을 가린 채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누가 흑의 가문 사람 아니랄까 봐 웃는 것도 저렇게 음침하냐. 차라리 대놓고 웃든가.

“발육이 늦으니까 사춘기가 지금 올 수도 있는 거지.”

“누가 봐도 다 컸거든?”

사브나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네.”

얘는 대체 왜 온 거야?

맘에 안 들게.

“아, 진짜 저놈이 저런 흉내나 내고 있으니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뭐… 몰라도 어쩔 수 없지.”

“혹시 나한테 시비 걸려고 온 거면 너 좀 돌아가라.”

“무슨 소리야? 친구 얼굴 좀 보러 온 건데. 그래도….”

사브나크 아데우스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저 재수 없는 놈도 갔으니 오랜만에 회포나 풀자고.”

그가 소파에 앉아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 보니 여태 엉거주춤 서 있었다는 사실이 괜히 실감됐다.

닉스 이그나가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은근슬쩍 내 옆에 앉았다.

“…와, 벌써 이러기야? 내 앞에서?”

“뭐가?”

살짝 달아오른 뺨으로 닉스 이그나가 사브나크에게 괜히 성질을 부렸다.

사브나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보았다.

“그래도 뭐, 진짜 건강해져서 다행이네. 해주가 성공한 모양이야.”

“솔직히 나도 믿기진 않았는데….”

사브나크의 말에 나도 괜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개 사료를 먹던 시절엔 생각지도 못했지.

“뭐, 돌아왔으니 됐잖아.”

닉스 이그나가 호쾌하게 말했다.

“음, 그렇지. 그간 별일 없었어?”

“우리야 뭐 늘 똑같지. 후계자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는 것 정도야. 일도 조금씩 나눠 받고 있고.”

“대단하네. 나는 이제야 제대로 살아가는 느낌인데.”

내가 시간을 휙휙 날려먹는 동안 이들은 충실하게 살아왔을 테니까 말이다.

“아, 그 얘기 들었어?”

“얘기?”

“귀신 얘기.”

“…뭐래.”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에 내가 코웃음을 치자 사브나크가 눈을 진지하게 내리깔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진짜 나타난대.”

그가 음산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뭐가?”

“귀신이! 수도의 분수 광장에 있는 분수대 위 천사 석상에서 말이야. 자정이 훨씬 넘어간 새벽 2시쯤이 되면.”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더라. 그냥 집이나 갈걸.

아, 재미도 감동도 없다.

“…어이가 없어서.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살아 있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법이다.

“안 그래? 닉스.”

사브나크에게 한마디를 해주라는 듯, 동의를 구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닉스가 바짝 얼어붙은 채 뻣뻣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지!”

목소리가 굳었다.

표정도 굳었고.

누가 봐도 이건….

“…너 귀신 무서워?”

내 질문에 사브나크의 눈이 확 커졌다. 그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를 붕붕 젓는다.

“아, 아니! 귀신 따위 무섭지 않다! 그, 그런 게 세상에 있을 리가 없지 않… 끄아아악!!”

닉스 이그나가 날아올랐다.

그야말로 소파에서 쏘아 올라가더니 벽 끝까지 물러났다.

“…….”

“큽… 크흡….”

앞을 보니 사브나크가 능력을 써서 허공에 아공간을 만들어 그 아공간을 닉스 이그나의 뒤로 통하게 해서 제 손을 툭 얹고 있었다.

“진짜 넌 성격하고는….”

내 말에 사브나크가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왜? 무섭지 않다고 한 건 내가 아닌데?”

얄밉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사브나크, 아데우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닉스 이그나의 주변으로 화르륵 새빨간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다 싸우면 니들 집에 가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닉스 이그나가 후다닥 내 옆으로 달려왔다.

“안 싸울게.”

닉스 이그나의 말에 나는 사브나크를 보았다.

그는 퉁명스러운 낯을 하고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래서 그 얘기는 왜 꺼냈는데?”

“그거랑 같이 기묘한 소문이 돌아서.”

“기묘한 소문?”

“응, 그 분수대 앞에서 빈 소원은 대부분 이뤄진다는 소문.”

뭐야, 그게.

그럼 좋은 거 아닌가?

귀신이든 뭐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분수대 위 천사 석상이라니.

“착한 귀신이네.”

내 심드렁한 말에 사브나크 아데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무슨 여자애가 겁이 없냐?”

“성차별적인 말 사양이야. 그리고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산 사람을 말 한마디로 사지로 몰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암튼 그 얘긴 왜? 너도 소원 빌려고?”

“아니,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뭘 하나씩 뺏긴 모양이라서.”

사브나크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