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30)

<106화>

“…….”

“…….”

“…….”

“…….”

정말 세상에 이렇게까지 불편한 자리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적막했다.

아빠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그대로 집무실에 들어가 버리려는 걸 내가 간신히 끌고 온 참이었다.

선대 공작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정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찻잔만 기울이고 있다.

무겁고 차가운 적막 사이에 낀 나와 이노스만 서로 눈치를 슬쩍 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 드시고 돌아가십시오. 뵙고 싶지 않았으니.”

“네놈 보러 들어온 거 아니다. 요 조막만 한 손녀딸이 간절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

조막만 하긴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위로 보나 옆으로 보나 어디로 봐도 쑥 자라서 큼직한데요, 할아버지.

“그렇게 싫으면 네놈이 가라.”

“잊으신 모양인데, 여긴 제집입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딸이 저를 붙잡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갑니까?”

똘망, 똘망…?

흘긋 시선을 내려 찻잔에 비치는 얼굴을 봤지만, 거무죽죽하게 죽은 얼굴빛으로 간신히 입꼬리만 올리고 있는 내가 보였다.

똘망똘망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날 더 간절하게 붙잡았다.”

“무슨 소리십니까? 당연히 절 먼저 간절하게 붙잡았습니다. 아까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울먹거리는 표정 못 봤습니까?”

아빠가 자랑이라도 하듯 당당하게 말했다.

“…….”

아니, 그렇게까지 생생하게 아까를 떠올려야 하는 거야? 듣는 사람 부끄러워져요.

“어찌 이런 못난 놈 밑에서 이런 똘똘한 게 나왔을꼬.”

이 할아버지 보소.

다 큰 자식과 손녀를 앞에 두고 못 하는 말이 없다.

“못난 아버지 밑에서도 저 같은 천재가 나왔는데 제 밑에서 제 딸 같은 아이가 나오지 못할 것은 또 뭐가 있습니까?”

“…….”

뼈가 있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가 조용해졌다.

그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남은 손으로 애꿎은 빈 찻잔의 끄트머리를 느리게 매만지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비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손주들 좀 볼 수도 있는 노릇이지.”

“아버지께서 그럴 자격이나 있으십니까?”

아니, 여기서 이렇게 싸운다고?

아이고, 이런 걸 바랐던 게 아니란 말이야. 으앙, 진짜 울고 싶어졌다.

그래도 같이 앉혀두면 조금이나마 서로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누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두 사람의 골이 너무 깊었다.

“그리도 애정하는 아버지의 두 아들이나 잘 돌보시지 여기까진 뭐 하러 오셨습니까. 아…!”

“그만, 거기까지만 해라.”

할아버지가 경고했지만, 아빠가 그런 경고에 굴할 사람이던가.

아빠는 어딘가 심기가 제대로 상한 듯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사납게 입을 열었다.

“그쪽 첫째 아들이 아버지 돈 다 긁어가서 사업했다가 말아먹고 둘째 아들은 그거 만회해 보겠다고 투자 잘못해서 남은 돈까지 쫄딱 말아먹었단 소리는 들었는데….”

아빠는 평소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의가 가득 들어찬 얼굴로 보란 듯이 비죽 웃었다.

“그만하라고 했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나와 이노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돈 좀 드리면 돌아가 주시렵니까?”

“이놈의 새끼가…!”

그 순간, 기어코 사달이 났다.

할아버지가 주먹을 쥐곤 손을 높이 치켜든 것이다. 아빠는 그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괜한 오지랖이었다. 이런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세상 모든 가족이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할아버지!”

“아버지!”

나는 급히 할아버지의 허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이노스는 아빠의 손을 붙잡았다.

“내게 평생 신경 한 번 쓴 적 없다가 이제 와 나타나선 내 자식들 휘두르지 마십시오.”

“아버지, 일단 밖으로 나가요.”

이노스가 이쪽 눈치를 보더니 아빠의 허리를 붙잡곤 뒤로 잡아당겼다.

아빠는 이노스의 이끌림에 천천히 발을 옮기면서도 나와 할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는 제 자식들 당신처럼 그렇게 안 키웠습니다. 애초에 이깟 가문이 망하든 말든 내 알 바도 아니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빠는 이노스에게 밖으로 끌려 나갔고, 이내 문이 굳게 닫혔다.

내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할아버지는 다행히 나를 밀치고 뛰쳐나가거나 하진 않았다.

사실 밀치려고 하면 얼마든지 밀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툭-

굳은살 가득한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에 놓였다.

“됐으니 이만 놓거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어쩐지 힘이 쫙 빠져 있었다.

“망나니 같은 두 놈들 성화에 오기는 왔는데, 괜히 온 모양이야. 늙어서 주책이군.”

할아버지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서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쿨럭, 쿨럭-!”

뒤이어 몸을 웅크리며 입을 가리고 연신 기침을 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거친 기침 소리였다. 단순히 사레가 걸린 느낌이 아닌, 예사롭지 않은 기침이었다.

“헉, 할아버지.”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자 손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아니, 이 정도면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입을 떡하니 벌리며 근처에 있던 벨을 울리려고 하자 할아버지가 반대쪽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나쁜 피가 나오는 것뿐이야. 신경 쓸 것 없다.”

제가 그런 말에 속을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거든요….

‘아빠가 스트레스를 받으시니까 내 멋대로 데려온 할아버지껜 사과드리고 할아버지를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그냥 보냈다간 속이 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런 얘긴 없었는데.’

나는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사실 소설 속에서는 아빠와 이노스, 셰키나를 제외하면 오브리 공작가의 다른 일원은 나온 적이 없긴 했다.

형제가 있었단 것도 지문으로 짧게 지나갔을 뿐이고.

‘…이게 설마 아빠의 후회심을 자극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래서 폭주한다거나?!

아빠는 아닌 듯 보여도 의외로 멘탈이 개복치인 점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만 가봐야겠다. 네 애비한테 앞으로 볼 일 없을 거라고 전해라.”

아니, 지금 피 토하는 걸 눈앞에서 본 사람한테 뭘 전하게 시키는 거야.

“내가 낳은 놈 중에 유독 막내 녀석만 특출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위에 있는 놈들이 글러먹은 건 아니다.”

부모 돈 끌어다 사업 말아먹고 도박했다면서요. 그 이상 글러먹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차마 그렇게 내뱉지 못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큭, 하곤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너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구나. 그놈도 그랬지.”

지쳤음에도 다정함이 섞인 목소리가 순간 내려앉았다.

“…….”

“뭘 좋아한다고 말하면 질투한 윗놈들이 괴롭혀대니 나중에는 좋아하는 것조차 숨기고 속이더구나.”

아빠 성격이 그래서 저렇게 된 걸까?

하긴, 좋아하는 건 끝까지 숨기는 사람이었지.

‘그래도 나랑 이노스를 아끼는 건 분명했고.’

숨기는 와중에도 그는 부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아마도 같은 상처를 우리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놈이 솔직하지 못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아, 아뇨.

그건 유전인 것 같은데요. 할아버지에 아빠, 이노스까지 똑같은 걸 봐선.

차마 그렇게 대놓고 대꾸할 수가 없어서 애꿎은 입술만 우물거렸다.

“윗놈들이 그렇다고 천성까지 나쁜 건 아니다. 돈을 가져다 쓴 것도 돈을 좀 더 늘려서 풍족하게 살아보고자 했던 거지.”

음, 할아버지.

세상은 그걸 답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어요.

“안다, 방법은 분명히 잘못됐지. 예전부터 요령도 없고 나쁜 쪽으로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들이었다.”

아니, 할아버지가 갑자기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하시네….

들어드려야겠지?

나는 눈동자를 한 차례 데구루루 굴리곤 할아버지가 앉은 소파 맞은편에 다시 느릿하게 앉았다.

“그래, 알고는 있었다. 막내 놈이 태어나기 전에는 딱히 후계자랄 놈도 없었다는 거.”

“아, 그러셨군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공감, 공감. 공감해 드려야지.’

아네트, 화이팅!

사실 역시 할아버지의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조금 엄하게 키운 것도 있지.”

“아….”

“공작이 될 놈이 겨우 제 형제들의 괴롭힘에 우는소리를 내선 안 됐으니까.”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두어 차례 눈을 깜빡였다.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지 않나?

뛰어난 자식이 자질이 없는 형님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잖아.

“윗놈들 다 제치고 그놈이 작위를 차지할 테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하….”

이걸 공감해도 될까?

솔직히 나로선 조금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조금 잘나게 태어났다고 해서 타인의 괴롭힘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니.

“근데요, 할아버지. 아빠가 그걸 원했어요?”

내 물음에 할아버지의 어깨가 움칫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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