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0)

<99화>

내가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고 있자 아빠가 한숨을 내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단순한 사고였다. 잘 해결됐고.”

“정말요?”

“그래, 폭주한 순간 네가 준 목걸이가 반응해서 내 마력을 꽤 빨아들였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고.”

아빠가 반쯤 깨진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내 폭주를 미리 안배해 둔 네 덕분이지.”

아빠의 말에 나는 민망해져 뺨을 긁적였다.

“어쨌든 아빠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빠가 죽지 않았고 가문도 멸망하지 않았다. 어쨌든 최소한 지키고자 한 건 지킨 모양이었다.

“엄마는요?”

“잠시 요양하러 내려가 있다.”

“…어, 왜요? 치료가 잘 안 됐어요?”

설마 다르아가 도망갔거나 그런 건 아니었겠지?

“아니, 그 병은 나았어. 치료법도 공표되었지.”

“아, 다행이네요.”

“하지만, 네 부재가 일 년쯤 넘어가니 나도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충격을 받은 걸까?

그런 것 때문에 다시 몸이 약해졌다면 정말 미안한 일이다.

사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예측이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이미 읽은 내용이 있다고 해도 이제 그런 건 거의 단편적인 일뿐이다.

생각보다 내용도 많이 달랐고 이 세계는 또 리메이크 버전이라고 했으니 기록서의 기록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는데, 결국 기록서는 신 차장님이었던 건가?’

나는 생각하며 아빠를 흘긋 보았다.

“제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셨군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아빠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이미 우리들의 딸이다. 딸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멀쩡할 부모는 없어.”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마주한 채 내게 새겨주듯 천천히 덧붙이는 목소리엔 애정이 가득했다.

“…응.”

이젠 이런 소리 안 해야지.

“죄송해요.”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침대에만 머물러서 바깥 공기를 쐴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잠시 지방으로 간 거다.”

“네.”

“지금도 매일같이 편지를 나눈다. 로사나는 네가 깨어날 걸 누구보다 굳게 믿고 있었어.”

자신보다도 더 굳게 믿었다고 아빠가 덧붙인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아빠.”

“그래.”

“다녀왔습니다!”

역시 돌아왔을 땐 이 말을 해야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말에 아빠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이더니 이윽고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잘 돌아왔다.”

아빠가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이렇게까지 격한 애정 표현을 보여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 조금 놀랍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고생을 했다는 거겠지.

나는 팔을 뻗어 아빠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려 주었다.

“저택이 우중충하더라고요.”

“…그런가?”

“네, 아빠가 관리한 건 아니겠죠? 아빠는 늘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아빠의 대답이 아주 느리게 돌아왔다.

“저 없다고 막 술 마시고 일만 하진 않았죠? 에이, 설마 건강에도 신경 쓰는 멋진 아빠가 그랬을 리가 없지.”

“…….”

이번엔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 혹시 아빠 힘들다고 주변 사람한테 퉁명스럽게 굴거나 차갑게 굴거나 막 아예 신경도 안 쓰거나 하지도 않았죠?”

“…….”

“에이, 설마! 아빠는 누구보다 공과 사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제가 존경하는 아빠잖아요!”

“…그랬지.”

아빠의 대답이 이번에는 아주아주 늦게 돌아왔다.

“역시 믿었어요. 그럼 메리랑 골드에게 저택 분위기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턱.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빠가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아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되물었다.

“역시 의원에게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잤다.”

“음, 그래도….”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네게 묻고 싶은 것도 많구나.”

아빠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네.

하지만, 나도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기는 했다.

“으음.”

밥도 안 먹은 지 꽤 된 것 같으니, 일단 밥을 먹이고 같이 잠도 한숨 자고 난 그 이후에 대화를 시작해 볼까.

나도 무려 열여덟이나 되었으니까 이제 합법적으로 술도 마실 수 있으니 술 한잔하자고 하면서 대화해도 좋을 듯했다.

‘크, 드디어 술을 마실 수 있네.’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할 때 편의점 앞에서 맥주 한 캔 홀짝거리며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일단 밥 먹고 어때요?”

“그래, 금방 준비하라고 하마.”

아빠가 가볍게 핸드벨처럼 보이는 것을 흔들자 밖에서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었을 페드로가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의 품에 여전히 안겨 있는 나를 본 페드로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부드럽게 풀렸다.

“식사를 준비해라, 페드로.”

“네, 주인님!”

페드로가 감격한 얼굴로 냉큼 허리를 굽혔다.

여태까지 얼마나 제대로 식사를 안 했으면 겨우 밥 차려달라는 얘기에 저렇게 반응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아, 맞다. 그리고 이제 저도 성인이 되었으니까 주스 대신 와인으로….”

“부담 가지 않는 음식 종류로, 음료는 따뜻한 물로 하도록.”

아빠가 전면 차단했다.

“술은 백해무익하다.”

방 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무슨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아빠가 내뱉은 말에 페드로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하지만, 아빠. 이제 저도 성인….”

“정신연령은 2년 전에 머물러 있는데 성인은 무슨. 앞으로 2년간 술은 금지다.”

아니, 내 정신연령은 그럼 열 살 때부터 성인이었다고요.

“아, 진짜 이러기예요?”

“이러기다.”

“힝, 아빠아…!”

“안 돼, 방금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술은 무슨….”

생각보다 아빠가 녹록하지 않았다.

“페드로.”

“네! 주인님!”

오랜만의 활기가 기쁜 듯 페드로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 정도면 페드로가 그만두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맘고생이 심했을 텐데도 관두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충성도가 높다는 말이 아닐까?

“가서 옷이나 제대로 입고 오렴.”

“쳇, 알겠어요.”

입술을 툭 내밀곤 이불을 주섬주섬 챙겨 다시 몸에 둘둘 말고 페드로를 따라 막 나가려는 때였다.

탁-!

손목이 거칠게 잡혀 돌려세워졌다.

“…아네트.”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아빠가 놀란 얼굴로 내 손을 붙잡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아빠, 아파요.”

내가 덧붙인 말에 아빠가 천천히 손을 뗐다.

“…그래, 미안하구나. 순간 이상한 장면이 보여서.”

아빠가 손바닥으로 제 눈두덩을 꾹 눌렀다.

“다녀오렴.”

그는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말했다.

“아빠.”

“그래.”

“아빠, 나 봐요.”

하지만 언제까지 직시하지 않을 순 없다. 천천히 해도 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아빠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저 아빠를 선택했어요.”

그 세계에 있는 진짜 부모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면서도, 그럼에도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쪽 세계의 아빠를 선택했다.

“…….”

아빠가 설핏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보았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제 아빠가 제 유일한 아빠예요. 이제 여기 아니면 갈 곳도 없다고요.”

“…….”

“보고 싶었어요, 아빠.”

그래, 이 말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곳에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여길 제집으로 삼아도 될까요? 어딜 가서 길을 잃든, 멀리 떠나든….”

지금껏 내겐 집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다.

밤하늘이 천장이고 신문지가 이불이었던 적이 차신아 인생의 반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

늘 빚쟁이에게 쫓기고 집주인에게 내쫓기는 신세였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여기로 돌아와도 될까요?”

내 말에 아빠의 동공이 확장되더니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아니면 어디로 가려고 했느냐.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든, 돌아와라.”

아빠가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말했다.

“응, 언제든 어떻게든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아빠도 무서워 마세요.”

나는 한참이나 아빠를 끌어안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빠가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큼 포근했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흐릿하게 덧붙여지는 진심에 나는 심장 가득 차오르는 포근함을 듬뿍 만끽하며 가만히 안겨 있었다.

‘진짜 돌아왔네.’

다정함을 가득 담은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오래도록 그리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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