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니, 그보다….
“신 차장님, 왜 그런 선택을 하셨어요!”
아니, 그 대참사에서 간신히 뛰어서 멀쩡히 살아남아 놓고 왜 죽으려 한 거야.
“밤마다 꿈을 꿨어요.”
“…….”
“차신아씨 손을 놓친 일도 그렇고, 그날 비명 속에 죽어간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와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다고 말하는 신 차장님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 그 수많은 손은 죄책감이 분명했다.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던 망할 상사들은 평생 느끼지 않았을 죄책감.
“사실 그 실내 테마파크 건물 부실 공사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
“건축 비용 줄인다고 건설 책임자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기둥을 부실한 자재로 채웠거든.”
사실 그런 일은 흔히 있었다.
뉴스에도 종종 부실 공사니, 돈을 뒤로 빼돌렸느니 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으니까.
“근데 건설사 대표나 테마파크 세우는 대표나 괜찮다고 진행하라고 하더라고.”
“…….”
“덕분에 옳은 말을 한 건설 책임자가 잘리고 다른 소장으로 교체됐어요. 사실 나도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한마디 거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거든.”
그녀는 그것이 무척이나 후회된다는 듯 흐려진 시선으로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아마 오랜 시간 그녀의 한으로 남아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신 차장님이 여기에 있다는 건 설마 돌아가신 건가?’
아냐, 설마 아니겠지.
나는 애써 불안한 감각을 흘려보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승진을 앞두고 있었어. 우리 집은 편모 가정이라 엄마가 혼자 날 힘들게 키웠지. 그래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거든.”
아마 그녀에게는 흔치 않은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외면이었을 것이다.
“알잖아, 우리 회사 여자가 승진하기 어려운 거.”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자조와 회의감이 가득했다.
하긴, 내가 한창 회사를 다닐 때도 신 차장님이 유일한 여자 차장님이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를 악물고 노력했는지는 알 법도 했다.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순응하며 살아온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아빠는… 도박해서 이혼했어.”
그 말에 어깨가 절로 움찔거렸다.
나와 똑같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시간 듣지 못했던 단어가 그사이 꽤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래서 사실 차신아 씨 본 지 얼마 안 돼서 집에 문제 많다는 걸 알았어요. 딱 예전의 나 같았거든.”
“…아, 티가 났나요?”
“말했잖아요, 예전의 나 같아서 금방 눈치챘다고.”
그녀가 설핏 웃으며 덧붙였다.
‘웃었다.’
왜 이렇게 웃는 얼굴이 낯선가 했더니 강아지로 지내는 3개월 동안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위축되어 있고 눈치 많이 보고 전전긍긍하고…. 그래서 더 매섭게 굴었는지도 몰라.”
“전, 좋았어요. 솔직히 무섭긴 하셨지만, 이유 없는 트집을 잡는 분은 아니셨잖아요.”
작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는 다른 차장 과장들처럼 괜한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그래도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었다면….”
신 차장님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아 여전히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그녀가 짧게 숨을 뱉으며 한숨을 흩뜨리듯이 말했다.
“처음엔 그냥 생각만이었어요. 근데 생각을 계속하니까 어쩐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져서.”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곳에 있더라고.”
그래서 결국 여기가 어디인지는 듣지 못했다.
“정신체가 연결된 가상 세계인 것 같아요.나, 사실 여기 앉아서 차신아 씨를 계속 지켜봤어요.”
“저를요…?”
“아니, 정확히는 아니샤를 본 거지.”
그녀가 유려하게 그 판타지스러운 이름을 내뱉자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떠올랐다.
나는 죽고 난 뒤 영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았던 것도 같다.
그렇게 몇 달쯤 지났을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사이 부모님이 어떻게 됐는지도.
[아이야,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네게 두 번째 삶을 선사했구나. 살고 싶으냐?]
나는 살고 싶다고 했다.
당연하지, 기절도 못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얼마나 끔찍하게 아팠는데!
나는 알음알음 떠오르는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내 아이가 밤마다 뉘우치고 간절히 기도한 염원이 너를 되살리는구나.]
아, 그리고 하나 더 떠올랐다.
이 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가 나에게 빅 엿을 크게 먹였다는 사실도.
[아, 그 몸은 이미 악마와 계약이 되었고 그 몸의 주인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상태이니라.]
[뭐요?]
[큰 고난과 시련이 앞으로 계속되겠지만,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응당 치러야 하는 시험. 그대의 앞길에 풍요가 가득하기를.]
[아, 안 해요. 안 해! 안 할래요! 환생시켜 주세요! 환생! 신님, 나 그냥 환생…!]
[허허허. 시공을 넘나드는 충격에 의해 기억이 지워질 수 있음을 유념하게.]
거기서 시야가 암전되고 기억이 뚝 끊겼다.
“…….”
나 뒤통수 맞은 걸까?
기억이 다 날아갔다가 이제 와서 전부 돌아오자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보다 신의 저 가볍고 짜증 나는 태도는 뭐야? 한 대 때리고 싶은 지경이다.
“저 <녹의 눈물> 팬이었어요.”
그게 나 죽은 뒤에 리메이크가 되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었을 줄은 더 몰랐고.
“알고 있었어.”
신 차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네, 회사 메일 주소 앞부분이랑 차신아 씨가 매번 댓글을 남겨주는 아이디가 같은 걸 봤거든요.”
“아….”
수치스러워.
별의별 댓글을 다 남겼던 것 같은데 말이다.
가끔은 회사 푸념도 했었다.
“내가 답글도 몇 개 남겨줬었는데. 봤어요?”
<녹의 눈물> 작가는 종종 코멘트란에 독자들 댓글 몇 개를 선정해 답글을 남겨주곤 했었다.
내 댓글이 자주 뽑히자 신나서 더 푸념이나 개인 사정을 줄줄이 늘어놨던 것도 같다.
“…와, 이미 죽은 것 같지만 한 번 더 죽고 싶다.”
새하얀 공간에는 쥐구멍도 가구도 없어서 내 과거의 흑역사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게 슬펐지만.
“그래도 네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었어.”
“행복….”
…하기는 했지.
별의별 고난이 많아서 문제였지만.
“…근데 신 차장님, 정말 돌아가신 거예요? 여기가 사후 세계인가요?”
정말 사후 세계라면 꽤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에요, 그냥 여기는 내가 차신아 씨 만나고 싶어서 부른 거예요.”
“…그, 차장님도 죽은 거예요?”
“죽다니?”
신 차장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설핏 웃었다.
“아니에요, 우리 둘 다 죽진 않았어요. 죽었으면 사후 세계에 가야지.”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신 차장님은 훨씬 홀가분하게 보였다.
“가사 상태라고 봐야지.”
“가사, 상태요?”
“식물인간이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그렇게 말하니 단번에 이해가 됐다.
“우리 둘 다 영혼이 여기에 빠져나와 있는 상태예요. 각자의 세계에 육체만 남아 있는 거고요.”
“그럼, 신 차장님도 돌아갈 곳이 있는 거죠?”
내 물음에 그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설핏 웃었다.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보고 있으니 나도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돌아가야죠. 엄마에게 걱정을 너무 많이 끼쳤어. 그래도 엄마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
“…좋은 사람이요?”
“네, 도박 이혼남 말고 엄마에게도 제대로 된 사람이 확실히 필요했는데 다행이지.”
그녀가 홀가분하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가면, 작가나 해볼까 봐요. 내 글을 보고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면서.”
신 차장님이 말했다.
“읽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어.”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라면 무슨 꿈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까요?”
“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저 주인공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녹.눈>을 재밌게 읽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고 있을 때면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는 그 상상 속에서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힘든 고난이나 역경이 있어도 결국 다 잘될 거라고,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고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어졌어요. 내가 쓴 세계에서 차신아 씨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러고 싶더라고.”
“이미 그런 글을 쓰고 있었어요. 독자였던 제가 자부할게요. 전 이미 수십 번도 더 위로받았는걸요.”
내 말에 그녀의 눈이 설핏 커졌다. 그녀는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다행이야. 이제 그만 가봐. 나도 슬슬 돌아가야지.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돼.”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나무로 된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
“네, 가볼게요.”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차신아 씨.”
“네?”
“미안했어요.”
문 앞에 서서 다시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나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에게 몇 마디 대답을 해주곤 냉큼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시에 새하얀 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