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0)

<95화>

‘아네트’도 ‘셰키나’도 아니라 ‘아니샤’가 적혀 있었다. 리메이크를 했다더니 주인공을 바꾼 건가?

근데 주인공이 아니샤야?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책상에 앞발을 걸쳤다.

“뽀삐, 좀 방해하지 마.”

신 차장님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붙잡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왈왈!”

이러지 마, 제발!

아악!

내가 어떻게 침대 위에 기어올랐는데!

없는 발톱 세워서 버둥거리며 시트 붙잡고 올라간 거였다고!

흑, 이건 강아지 학대야! 불공평하다고! 애초에 왜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야!

고양이였으면 이미 머리 위에 올라가서 보고 있을 수 있었는데.

온갖 불평불만을 토하며 낑낑, 왈왈 울어대자 신 차장님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냄새나니까 씻어!

강아지의 후각은 인간보다 최소 천 배가 더 좋다고 하더니 진짜 괴로워 죽을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나는 일단 그녀를 욕실에 들여보내고 느긋하게 글을 보기로 했다.

먼저 커튼에 매달린 채 대충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커튼을 좌우로 걷었다. 그리고 신 차장님의 바짓자락을 한 번 물어 당겼다.

“아까부터 왜 그래, 뽀삐. 평소랑 다르네.”

그녀가 피곤하다는 듯 시선을 내려 나를 보았다.

나는 후다닥 달려 방에 딸린 욕실 문을 앞발로 연신 긁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달려가서 바짓자락을 당기고 또 욕실 문을 앞발로 긁길 반복했다.

“화장실이 왜?”

뭐가 있느냐고 다가온 그녀가 문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는 머리로 신 차장님의 다리를 밀었다.

들어가라는 듯이.

그리고 안에 들어가 샤워부스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사실 난 보디랭귀지에 자신이 있었다.

테마파크엔 외국인도 많이 오는데 나는 외국어를 전혀 할 줄 몰라 대충 눈치껏 때려 맞춰 설명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나 다를까, 신 차장님도 어렵지 않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듯했다.

“…씻으라고?”

“왈!”

바로 그거야!

내 용맹한 울음소리에 신 차장님이 당황한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나 그렇게 냄새나?”

그녀는 다소 충격받은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내게 물어봤다.

“왈!”

내가 개라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나!

엄청나게!

솔직히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나는 개니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

그녀는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 안은 개판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사태가 조금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듯 내가 조금 걷은 커튼을 활짝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새로운 공기가 유입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씻고 올게.”

그녀는 정말로 강아지에게 지적당한 게 무척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신 차장님은 비척비척 움직여 속옷과 잠옷을 챙겨 욕실로 쏙 들어갔다.

‘좋아.’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의자를 기어올라 책상까지 올라갔다.

그제야 시야가 탁 트여서 보기가 좋았다.

‘정말로 리메이크를 했네.’

나는 아래 화살표 버튼을 꾹꾹 눌러가며 대충 내용을 훑었다.

원래는 셰키나 오브리가 세계를 구하고 가문을 구하며 사랑을 하던 내용이, 지금은 아니샤가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아니샤가 주인공인 내용은 그녀를 오로지 둥개둥개하는 물이었다.

애정을 모르던 아니샤가 진짜 가족을 만나 사랑받는 이야기.

이미 리메이크도 완결까지 쓴 모양이었다.

맨 마지막에 작가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을 보는 걸 알면서도 용기가 없어 말도 걸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한 동료가 다른 세상에선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며.]

[미안해.]

그 코멘트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표정이 굳었다.

이 소설이 누구에게 바치는 것인지 알 것 같았으니까.

‘…아.’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그렇구나.

이 소설은….

날 위한 것이었어.

본래 원작과는 다르게 리메이크를 해서 진행된 소설이었다.

씻고 나온 신 차장님은 생각도 정리했는지 한결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휙휙 흘러갔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던 개로 지내는 시간이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 어언 석 달이 되어갈 때쯤이었다.

‘난 대체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이러다 정말 개가 되어버릴 것 같다.

요즘은 사료만 주면 절로 몸이 움직이고 꼬리가 파닥거린다고.

근데 현실 세계와 이 세계의 시간의 흐름은 다르겠지? 같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 지금 아데우스 공작이 날 포기했거나 아니면 넉 달째 진에 마력을 불어넣는 상태라는 건데, 솔직히 후자는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포기했다는 쪽이 조금 더 이치에 맞겠지.

‘와, 나 그럼 평생 이 세계를 떠도는 건 아니겠지…?’

아빠가 어떻게든 도와주려나.

‘아빠 하니까 이쪽 부모님은 뭘 하고 살려나.’

여전히 도박이랑 주식에 빠져 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죽었다고 바뀌었을 것 같진 않고.’

애초에 날 가족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욕실로 들어간 신 차장님이 영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욕조에 앉아서 잠이라도 들었나?

깨워줘야겠다 싶어서 화장실 문 앞에서 목청껏 왈왈 짖었다. 그러나 안에선 반응이 없다.

예민한 청각에 물소리는 들리는데 말이다.

킁킁-

문득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그래, 아주 비릿한 냄새였다.

마치 피처럼.

‘아, 설마.’

나는 다시 왈왈 울부짖었다. 그러나 안에선 여전히 반응이 없다.

‘아줌마.’

아줌마라도 불러와야겠다.

급히 달려 나가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아줌마의 다리를 깨물었다.

“아야! 뽀삐, 뭐 하는 거야!”

“왈왈왈! 왈왈!”

옷자락을 꽉 깨물고 내 쪽으로 있는 힘껏 당기다가 신 차장님 방 앞을 빙빙 돌았다.

“왈왈왈왈!”

“가, 갑자기 왜 그러니? 뽀삐….”

내가 너무 맹렬하게 짖어대니 아주머니도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인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급히 달려가 다시 신 차장님의 방 안에 있는 욕실 문을 앞발로 긁어댔다.

“대체 왜….”

그녀는 욕실 문을 한번 두드려보더니 대답이 없자 슬쩍 문고리를 돌렸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 꺄아아아악!”

비명 같은 우짖음이 들리고, 시뻘건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채야!!”

아주머니가 비명을 지르듯 울부짖었다.

넋을 놓고 달려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제 딸을 끌어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급히 핸드폰을 물어 왔다.

‘신고부터 하세요, 신고!’

왈왈!

내가 짖어대자 그녀가 나를 보더니 내가 물고 온 핸드폰을 보곤 아차 싶은 얼굴로 급히 신고를 했다.

나는 천 같은 걸 가져와 다시 한번 그녀의 앞에 놓았다.

멍하니 나를 보고 있던 그녀가 피가 흐르는 부위를 천으로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러곤 신 차장님을 한쪽에 눕혀두더니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119가 도착했다.

‘대체 왜… 저런 선택을 한 거지?’

의아함에 빠진 사이 두 사람이 구급대원과 함께 집을 나갔다.

그러자 눈앞이 또다시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작달막한 몸이 멋대로 휘청거렸다.

‘드디어….’

훅, 기울어지는 몸을 나는 굳이 가로막지 않았다.

이게 돌아가기 위한 신호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새하얀 공간에 있었다.

“…진짜 화나네.”

그야말로 열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말을 할 수 있는 생물이라는 점일까?

물론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이라서 인간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도 될지는 의아했지만 말이다.

“여긴 어딘데….”

그래서 난 대체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안녕.”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거기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지난 3개월간 질리도록 봤던 사람이었다.

“아니면, 이 목소리가 편한가?”

들려온 목소리가 또다시 훅 뒤바뀌었다.

이번에 들려온 것 역시 내게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게 지난 수년간 같이 있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늘 내 머릿속에서 떠들었던 기록서의 목소리다.

“…신 차장님?”

근데 왜 신 차장님이 눈앞에 있는 거야?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가 어쩐지 창백한 낯으로 빙긋 웃고 있었다.

피라곤 흘리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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