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30)

<91화>

“이봐, 무슨 생각 하는지 대충 짐작 가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무례하기는. 덧붙이는 목소리엔 어이없음이 섞여 있었다.

“아직 성인도 못 된 여자애 몸을 가지고 싶다는데 그럼 정상적으로 봐야 할까요?”

“실험체로 가지고 싶다는 거야.”

죽어서도 실험체가 되라는 말인가.

진짜 끔찍하게도 싫다.

“아하, 제 몸을 이런 짓 저런 짓 해가며 실험에 사용하겠다는….”

“대체 뭘 하면 그런 생각까지 하는 걸까?”

내 심히 구겨진 표정을 본 건지 올람이 퍽 난감한 낯으로 뺨을 긁적였다.

“나쁜 얘긴 아닐 거야.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남은 사람들에게서 너에 관한 기억을 지워줄게.”

“…네?”

“기억, 지워준다고.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너는 네가 혹시나 죽은 다음을 염려하고 있잖아.”

정확히 나를 꿰뚫어 본 올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도와줄게.”

올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마의 손길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절로 올라갔다.

“아무도 널 위해 슬퍼하지 않도록.”

모두가 나를 잊게 된다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겠지.

“아, 아, 안 돼!”

옆에서 웬 목소리가 치고 들어온 동시에 몸이 훅 들어 올려지더니 허공에서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프릭은 의외로 힘이 센 모양이었다.

“너, 너, 아, 안 돼!”

“…프릭?”

팔도 다리도 길어서 그런지 나도 꽤 자랐는데 다리가 바닥에 닿질 않는다.

어찌나 힘껏 높이 치켜들었는지 덜렁거리는 내 다리가 안쓰럽게 보일 정도다.

‘와, 높다.’

2미터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확실히 신기하네.

“그래서 프릭, 뭐 하는 거야?”

“너, 너, 아, 악마랑 계, 계약할 생각이야? 저, 절대 안 돼!”

“악마라니…. 올람, 악마였어요?”

“내가? 설마. 날 그런 한심한 거에 비유하다니 너무하구나, 프릭.”

“아, 아니! 아, 악마보다 더 모, 못됐어!”

음, 프릭이 이렇게 사색이 될 정도면 정말 못된 모양이다.

나는 잠시 멈칫한 채 올람을 흘긋 보았다. 입술을 툭 내민 걸로 보아 그는 이 상황이 썩 재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주, 주술사와, 야, 약속은 하, 함부로 하는 게, 아, 아냐….”

“알겠어요. 프릭이 막을 정도로 이런 짓 저런 짓 마구 하는 심각한 변태라는 얘기죠?”

내 진지한 말에 프릭이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런 짓 저, 저런 짓, 해!”

아마 내가 생각한 의미와 프릭이 말하는 의미는 각각 다르겠지만, 어쨌든 나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대요. 아쉽지만 시체도 실험체론 못 주겠어요.”

“도와주진 못할망정 스승을 방해하면 어떡하니, 프릭.”

스승?

나는 한 차례 눈을 끔뻑이며 여전히 허공에서 덜렁거린 채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

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

프릭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 가리키며 입을 벌렸다.

“정말로…?”

“그게 그렇게 경악할 일이니?”

올람은 내 반응이 살짝 기분 나빴는지 당황스러운 낯으로 되물었다.

“음….”

어떻게 저 성격에서 이런 성격의 남자가 자랐지? 근데 이런 설정이 소설 속에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올람이라는 인물이 있는 것도 몰랐지.’

올람이 여전히 허공을 부유하는 열매들을 하나씩 붙잡아 먹으며 입을 열었다.

“마물의 틈바구니에서 자라고 있는 걸 내가 데려다가 키웠단다.”

“키, 키우지 않았어. 노, 노예….”

“노예라니, 프릭. 너 부모 같은 존재에게 너무하는구나.”

올람이 퍽 마음 상했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프릭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 어쨌든, 안 돼.”

“알겠어.”

프릭이 질색하는 것도 신기하긴 했다. 평소엔 말수도 적고 존재감도 적은 사람인데.

워낙 장신이라 그러기 쉽진 않지만.

“키워놨더니 스승을 방해만 하다니… 괘씸하구나.”

올람의 말에 프릭이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찾으라는 제물은 찾았니?”

“네.”

“뭘 제물로 하려고? 웬만한 가치가 있는 걸로는 안 될 텐데.”

사실 그게 가장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며 덧붙이는 목소리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책이요.”

나는 작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면서 말했다.

어쩐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요즘 계속 책을 들고 다니는 참이었다.

덕분에 작은 가방도 마련했고.

“책?”

“네, 이 세계의 미래나 과거나 그냥 뭐 잡다한 것들이 적힌 책이에요.”

도대체 왜 이 책이 ‘기록서’를 가장해 나왔는지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구나.”

어느새 훌쩍 다가온 올람이 내가 들고 있는 책에 바싹 얼굴을 가져다 댔다.

“살아 있는 게 아닌 걸 제물로 가져온 사람은 네가 처음이네.”

올람이 키득키득 웃었다.

“네? 살아 있어야 해요…?”

“아니, 가치만 있으면 돼. 하지만 ‘제물’이라고 하면 사람은 금세 살아 있는 생명체를 떠올리잖아?”

나도 그랬지.

“그 제물에 사람의 영혼을 이 세계에 정착시킬 만큼의 값어치가 없으면 주술은 실패해.”

올람이 눈을 반달로 접은 채 노래를 부르듯 경쾌하게 말했다.

“그건 알고 있으라고.”

이 인간 나 실패하길 바라는 거 같지 않아?

‘이 사람에게 맡겨도 되나?’

슬쩍 불안해졌다.

하지만, 내 본래 주술을 해제할 수 있는 것도 올람뿐이라고 하니까….

유일한 돌파구가 그이긴 한데 영 미덥지 못한 돌파구다.

나는 눈을 한 차례 데구루루 굴리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올람은 내 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흥미가 떨어진 듯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하긴, 한글로 하나부터 열까지 적혀 있는, 읽지 못하는 책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내일 진행하게 될 것 같아요. 와주실 수 있나요?”

“그래야지, 약속했으니까. 너도 대가는 제대로 준비해 두렴.”

올람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네, 그럼 가볼게요.”

“잘 가렴.”

올람이 다시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정말 얄밉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

탁-

아네트가 나가고 올람과 프릭만이 남은 방은 올람이 과일을 먹는 소리를 빼면 조용했다.

“왜 그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거기에 우뚝 서 있는 거야? 내가 말했잖니, 너는 덩치가 커서 그렇게 있으면 부담된다니까.”

올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게 타박하듯 말했다.

그가 가볍게 손짓했다. 프릭이 쭈뼛쭈뼛 올람의 맞은편 자리에 슬쩍 앉았다.

“왜?”

“아, 아네트…. 살, 살려주세요….”

프릭의 말에 올람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서로 다른 색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한껏 가늘어졌다.

“말했잖니, 본인에게 이상만 없으면 멀쩡히 돌아올 거야.”

“그, 그렇지만, 제, 제물이 부족하잖아요.”

올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 부족하면… 실패하니까….”

프릭이 더듬더듬 말했다.

그 더듬거리는 말투가 퍽 답답할 만도 할 텐데 올람은 그런 기색 없이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러니까, 도, 도와주세요. 스승님….”

과일 바구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올람이 프릭을 보았다.

“내 귀여운 제자는 역시 우수하다니까. 부족한 걸 한 번에 짚어내다니 말이다.”

프릭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순히 미래나 과거가 적힌 책이라면 확실히 대가로는 부족하지.”

사람의 영혼을 정착시키는 주술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손을 뻗은 올람이 장신인 프릭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귀여운 제자가 부탁하니 별수 있나.”

“그, 그럼…!”

“사람을 싫어하던 네가 누군가를 도와달라고 하다니, 이 스승은 기쁘기 그지없구나.”

허공에서 손수건을 만들어 눈 밑을 톡톡 두드리는 시늉까지 했다.

“그만큼 그 애가 마음에 든 거니?”

“네, 네…. 아, 아네트는 저를 비웃지도 아, 않고… 닦달하지도, 않고… 더, 더럽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 그리고 냄새도 사, 상냥한 냄새라고 해주고….”

올람이 은근슬쩍 운을 떼자 프릭이 신이 나서 아네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한 프릭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평범한 미래 예지서였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래도 늘 가시만 세우는 제자가 오랜만에 재잘재잘 얘기하는 게 보기 좋으니 올람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리고 체스라는 아이가 있는데….”

프릭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인내심이 대쪽 같은 올람이 결국 웃는 얼굴도 포기하고 손을 내저을 때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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