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30)

<88화>

“…….”

“…….”

눈이 퉁퉁 부은 다르아와 바짝 긴장한 장신의 프릭이 목을 바짝 움츠린 채 고개를 슬쩍 숙였다.

이 저택에 온 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공작가의 주인이 다리를 꼰 채 앞에 앉아 있으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긴 침묵 속에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자네들이 내 딸에게 고용됐다고.”

“아, 아… 크흠. 네.”

다르아가 메이는 목을 애써 가다듬고 빠르게 대답했다.

샤콜 오브리는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무감정할 정도로 무심해서 입을 벙긋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묻지, 왜 고용됐지?”

“네…?”

다르아가 반문했다.

“내 딸에게 고용된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왜 고용됐냐고.”

샤콜 오브리의 물음에 다르아는 입을 벙긋거렸다.

프릭은 낯선 이들에게 강제로 끌려와서 충격을 받은 듯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굳은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터라 대화가 용이해 보이지 않았다.

“그, 아가씨께 못 들으셨습니까?”

“…….”

다르아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뭐지?’

분명히 공작부인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라고 들었다.

‘공작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은 건가?’

다르아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게…, 아가씨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거라면… 계약서에 비밀 유지 사항이 있어서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다르아가 적당히 입을 열었다.

실제로 근로 계약서와 거래 계약서를 작성했으며, 그 안에 비밀 유지 조항이 있기는 했다.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말 못 하겠다고?”

“네, 아가씨께 직접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샤콜 오브리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프릭에게 물었다.

그가 샤콜 오브리보다 훨씬 장신인데도 불구하고 둥글게 말린 어깨가 소심함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으, 으응…. 아, 아네트랑 약, 약속했으니까….”

프릭이 분위기가 퍽 불편한 듯 몸을 움츠린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이 놀라운 발전이었다.

“마, 말 못 해….”

“말하지 않으면 내가 네놈들의 목을 여기서 벤다고 해도 말인가?”

샤콜 오브리가 손을 까딱이자 그의 주변으로 초록빛이 뭉쳐진 날카로운 가시들이 순식간에 자리 잡았다.

“흡….”

프릭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아픈 건 시, 싫어…. 나, 나 화낼 거야….”

그가 웅크렸던 몸을 펴며 말했다.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탓일까?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흥분하기 시작했는지 프릭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말을 안 하겠다, 이거군.”

“아가씨께서 곧 말씀드릴 겁니다. 저희야말로 이대로 아가씨께 가서 전부 말씀드릴 겁니다….”

다르아가 프릭의 손을 붙잡아 그를 말리면서 샤콜 오브리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감히 날 상대로 협박을 하는군.”

“협박이 아니라 보고입니다.”

“정말 그 애가 데리고 오는 것들은 왜 이렇게 간이 부었는지 모르겠군.”

사고를 치는 센서가 그런 사람들만 불러들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됐다, 가 봐.”

사실 강제로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많다. 아이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조처를 하는 것도 간단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들켰다간 정말로 그 애가 자신을 더 믿지 못하게 돼서 입을 다물어버릴 테니까.

‘나도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뒤에서 사람을 불러 뭔가를 캐내고 있는 자신이 퍽 어울리지 않게도 느껴졌다.

우습기도 했고.

“가 봐.”

거기까지 생각한 샤콜 오브리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그 애는 하나부터 열까지 쉽지 않아. 뭐든 혼자서 하려고 하니까.”

샤콜 오브리의 말에 슬금슬금 일어나던 다르아가 멈칫했다.

“공작 각하, 아가씨께서는 아마 곧 말씀드릴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얘기를 듣고 바로 알렸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말하지 않았다는 게 다르아 입장에선 좀 신기했다.

그 탓일까?

다르아는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는진 모르겠는데…, 제 남편도 공작부인과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

그 말에 샤콜 오브리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다르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 어리고 작은 아가씨께선 정말로 아무에게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샤콜 오브리가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님을 다르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면 아이가 걱정되니까 말해 달라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데려다 놓고 분위기 잡으며 고압적으로 말하니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싶어지지 않은가.

“공작 각하와 아가씨는 정말 부녀지간이 맞나 보네요.”

“무슨 허튼소리지?”

“둘 다 솔직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요.”

다르아의 말에 샤콜 오브리의 표정에 불쾌감이 깃들었다.

“지금 감히….”

“그리고 얼마 전에 제 남편이 완치됐어요.”

“…뭐라고?”

샤콜 오브리가 다소 멍청하게 반문했다.

로사나 오브리는,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소중한 아내는 머지않아 죽는다.

얼마 전, 아네트가 ‘진실’이라며 제가 지금껏 숨겨온 이야기를 밝히면서 전해 온 이야기에 마음의 준비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갑작스럽게 로사나가 죽음을 맞이했다면, 아마 폭주하고도 남았겠지.

‘로사나에게도 말해 뒀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친자 증명서를 확인한 로사나에게도 말했다.

결혼할 때 그녀에게 어떤 일도 숨기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매일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은 꽤 오래된 습관 같은 짓이었다.

모든 일을 그녀에게 전했다. 아이가 겪은 일부터, 지금 벌어지는 일,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까지.

말하지 못한 사실은, 진짜 딸의 영혼은 이미 소실되었다는 것 정도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로사나는 이미 정해져 있던 일이 아니냐며 언제나처럼 말갛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샤콜. 내가 죽어도 당신은 죽지 마. 당신은 아네트도 이노스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쑥쑥 클 때까지 곁에 있어줘.”

“…그래.”

뺨에 입을 맞추며 귓가에 속삭이듯 전해 오는 목소리는 다정해서….

그래, 너무나도 다정해서 그저 샤콜 오브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겁했지.’

애초에 그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으니까.

족쇄가 있다면…, 그녀와 한 약속이 있다면, 자신은 죽을 수 없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없는 삶을 버텨낼 것이다.

로사나도 그것을 알기에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이 듣고 싶은 얘길 해준 거겠지.

그녀와 비슷한 병을 앓는 사람을 수소문한 적이 있었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안 한 짓이 없었다.

하지만, 그 병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완치한 사람은 없었으며, 들려오는 것은 비참한 결말뿐이었다.

병을 아는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마약성 진통제와 수면제가 유일한 처방이라고.

그나마 아이가 나타난 뒤 그 ‘려화’라는 걸 우려서 만든 차를 약 대신 처방받고 있었다.

“경증이었나?”

“아뇨, 거의 죽기 직전이었어요. 그래도 예전엔 한 번씩 몸을 움직이고 대화도 나누고 했는데, 올해 들어선 눈을 뜬 적이 없었어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고 다르아는 덧붙여 말했다.

“어떻게, 완치했지?”

“…글쎄요.”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다, 다르아는 프릭이 그녀의 팔을 툭 두드린 느낌에 느리게 답했다.

“그건 직접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빠….”

‘쾅’ 하며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리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그 순간 다르아와 프릭은 보았다.

잠이 덜 깨 서늘하기 짝이 없는 시선의 아네트를 바라보는 샤콜 오브리의 어깨가 움찔하며 살짝 떨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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