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30)

<87화>

“흡…….”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온몸이 도려내지듯 끔찍한 고통이었다. 누군가 칼을 들고 살점을 저미는 기분마저 들었다.

“야, 괜찮냐?”

셀렘의 목소리가 꽤 멀리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죽을 것 같아….”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으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다.

“흐읍….”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오늘따라 쉽게 통증이 잦아들지 않았다.

“너는, 혼자 있을 때나 솔직해지는구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진다 싶었더니 커다란 손이 내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웅크리고 있는 내 몸을 덥석 안아 들곤 그대로 나를 도닥거리며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아….”

아빠의 손가락 두 개가 내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아빠….”

“그래.”

녹색의 빛무리가 이마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통증이나 몸에는 변화가 없다.

“아흑….”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한 끔찍한 통증은 사그라들 생각도 하질 않았다.

“…효과가 없군.”

아무래도 저주라서 그런 모양이다.

“전 괜찮….”

입술을 달싹이는데도 고통스러워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아빠가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눌렀다.

아득-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빠의 손가락을 깨물어 버렸다.

“아, 죄송….”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자 아빠가 다른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으니 잠이나 푹 자거라.”

내 말에 아빠의 손끝에서 무언가가 자라났다.

이름 모를 풀이었는데, 아빠의 손가락 끝에서 순식간에 자라나더니 이내 갈색의 씨앗을 툭 뱉어내고 사라졌다.

아빠가 그것을 내 어금니 안쪽에 넣어주었다.

“가볍게 깨물어 보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빠가 지켜보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달콤한 향이 코 안 가득 퍼지는 듯하더니 눈앞이 몽롱해졌다.

“푹 자고 일어나렴.”

“흐….”

수면 효과가 있는 씨앗이었나?

낚였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아빠에게 한마디를 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씨앗의 효과가 좋았다.

툭, 고개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더니 이내 머릿속이 어두워졌다.

밤이 찾아왔다.

***

색색거리는 숨을 뱉으며 잠이 든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샤콜 오브리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는 것이 익숙한, 혼자서 뭐든 해내는 게 익숙한 아이.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도,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다.

손에 주어진 것조차 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아이는 그저 제힘으로 버티고 서려고 애쓴다.

곁에서 보는 입장에선 그저 답답할 뿐이다.

“언제쯤은 좀 믿고 의지해 줄는지.”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조금은 충동적이긴 했지만, 그 이후엔 꽤 제대로 부모 노릇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괘씸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난감하군.”

목을 전부 베어 짐승의 먹이로 던져줘도 부족할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아이의 과거를 들으며, 견뎌야 했던 일상을 들으며, 욕설을 내뱉고 검을 뽑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무리가 아닐까? 얘는 참는 게 습관이야~ 글렀어, 글렀어.”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샤콜 오브리의 미간에 주름이 자리 잡았다.

“넌….”

“안녕, 아버지?”

“누가 네 아버지지?”

“그러니까, 파트너 아버지?”

송곳니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셀렘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며 가볍게 건네는 말에, 샤콜 오브리의 인상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네놈이 일을 난감하게 만들었어.”

아네트의 등 뒤로 악마의 내통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가 이 작고 새까만 것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어, 나도 나올 생각은 없었는데 파트너가 권유하잖아.”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어찌나 가증스럽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꺼져라.”

“에엥, 꺼지는 건 좀.”

셀렘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근데 그렇게 사나운 표정도 하는구나. 가족들 앞에선 물처럼 유순하기에 나는 무슨….”

서슬 퍼런 시선을 마주한 셀렘이 시뻘건 입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빨 빠진 짐승 새낀 줄 알았지 뭐야. 근데 발톱 숨기고 있는 맹수였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서늘한 표정의 샤콜 오브리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셀렘은 여유로웠다.

“넌 대체 뭐지?”

“네 딸의 말로(末路)?”

“너도 같은 주술에 걸렸다는 건가?”

“응,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말이야.”

셀렘이 머리를 긁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온통 새까만 몸체에 샛노란 눈, 거기에 한쪽 팔만 색이 칠해진 것처럼 피부가 붙어 있는 괴이한 꼴이다.

“기억이 안 난다고?”

“아마 놈한테 기억도 빼앗긴 거겠지.”

셀렘이 제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파트너 살릴 준비는 잘 되어가?”

“네놈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하고 있다.”

“좋겠다, 파트너는 살려줄 사람도 있고.”

셀렘이 허공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파트너는 언제쯤 알까?”

“뭘?”

“파트너 아버지가 일이 술술 풀릴 수 있도록 뒤에서 손을 써뒀다는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샤콜 오브리가 아네트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단을 세울 때도 가게를 세울 때도 말이야. 밑에서 협상하고 협박해 줬잖아?”

“그냥 한마디씩 얹어뒀을 뿐이다.”

“그게 그거지!”

셀렘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샤콜 오브리는 아네트의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을 뿐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얘가 이 집에 와서 여태까지 뭘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

“역시 그렇지? 내가 말…!”

“근데 네게 들을 마음은 없다.”

샤콜 오브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셀렘의 말에 그는 더 대답하지 않고 가져온 책을 펼쳤다.

“아, 왜왜왜왜애왜! 왜애애애~!”

셀렘이 허공에서 샤콜 오브리의 주변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샤콜 오브리의 뺨이 한 차례 짜증스럽게 씰룩였다. 이내 그는 손을 휘저어 한 번에 셀렘을 잡아챘다.

“꺼져라.”

“궁금하잖아.”

“네게 듣는 건 의미가 없어. 저 애가 언젠가는 얘기해 주겠지.”

“그 언제가 언제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샤콜 오브리가 한숨을 내쉬며 셀렘을 허공에 내동댕이쳤다.

셀렘은 “어이쿠!” 하는 작은 소리를 내더니 데굴데굴 굴러가 갑자기 백 텀블링을 하며 그대로 멋지게 착지했다.

물론, 어차피 허공에서 일어난 가증스러운 쇼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너, 내 딸 앞에서도 그러고 있나?”

그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묻자 셀렘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걸?”

셀렘이 시선을 슥 피하며 슬쩍 말을 덧붙였다.

“…아마.”

샤콜 오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언제가 언제가 되는 그 날을 위해서 믿고 기다려주는 게 부모가 할 일이지.”

“얘는 둔해서 네가 도와준 거 하나도 모를 텐데도?”

“보답받으려고 한 일도, 알아주길 바라서 한 일도 아니다. 애초에 이 애는 내가 도와주지 않길 바랐겠지.”

괜한 참견을 한 것은 자신이라며 덧붙이는 말에 셀렘이 눈만 끔뻑거렸다.

“그건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셀렘이 아네트의 배 위로 몸을 던지며 말했다.

“…응?”

물론 착지에 성공하진 못했다.

샤콜 오브리가 잽싸게 그를 낚아채 다시금 내동댕이쳤으니까.

“…뭐야?”

“어딜 올라가지?”

“파트너의 몸?”

“꺼져라.”

샤콜 오브리의 행동에 셀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혹시 수백 년 전에도 살아 있거나 해서 나랑 만난 적이 있었나?”

“…….”

샤콜 오브리는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아예 시선을 책에 고정해 버렸다.

“아니, 이상하게 친근감이 느껴진단 말이지.”

셀렘이 턱을 가볍게 문질렀다.

“뭐, 파트너도 너희 지키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우리 파트너 아버지께서도 힘을 좀 내보시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아네트는 그에게 공작부인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헛된 희망이 그들을 조금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뭐야, 나한테 듣고 싶지 않은 거 아니었어?”

셀렘이 허공으로 훅 날아오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기회는 지나갔어. 떠나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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