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 그래서 본론은 이런 게 필요한데 도와주실 수 있나 해서요….”
나는 쿠키와 홍차를 한참이나 마시다가 아차 싶어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술 재료?”
차마 올람이 쓴 그 괴상한 메모를 보여줄 수는 없어서, 내가 조금 더 풀어 정리한 메모를 보여줬다.
맨 위에 적은 주술 재료라는 문구를 본 아빠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물었다.
“네….”
“이게 왜 필요하지?”
“일전에 좋은 소식 두 개 중 하나는 못 알려드렸잖아요.”
상황이 영 그랬던 탓에 말하지 못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지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제 영혼을 다시 제대로 이 몸에 정착시킬 수 있다고 해서….”
근데 사실 그렇게 되면 아네트의 몸은 결국 아빠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단점은 있었다.
“신빙성은 있는 말인가?”
“네, 주술로 유명한 사람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도와주기로 한 건지 어떻게든 꿇어앉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이 몸을 제가 빌려 쓰게 되는 거니까 불쾌하실 순….”
“바로 알아보도록 하지.”
그와 내 말이 동시에 겹쳤다.
“뭐?”
“어…, 살고 싶다고요….”
매섭게 일그러진 아빠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냉큼 말을 돌렸다.
“그래.”
아빠는 다행히 내 말을 가만히 들어 넘겼다.
페드로는 어느새 방에 없었다. 아마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준 것이 분명하다.
“근데 아빠, 정말로 괜찮아요?”
“뭐가 말이냐.”
“그냥…, 이런 거 전부요.”
아빠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내용물이 반쯤 남은 쿠키통을 밀어주었다.
“나라고 멀쩡한 건 아니다.”
그가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있을 정도로 어린애도 아니야. 그 시절, 아이를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혼란과 격변의 시기에 죽임당하거나 잃어버린 아이들은 아주 많다.
귀족의 아이들도 평민의 아이들도 다름없이 말이다.
…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네 덕에….”
아빠가 상체를 숙이더니 나와 시선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났으니 됐다.”
“…….”
“내 딸도 만나고 새 딸도 만났으니 내게는 그저 좋은 일이지.”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나는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꾹꾹 문질렀다.
“뭐….”
“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도 아빠는 처음인데 나쁘진 않네요!”
나는 소리치듯 내뱉고는 문을 열고 후다닥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거 잘 부탁드려요!”
물론 나가기 전, 볼일을 한 번 더 상기시키는 건 잊지 않았다.
“큭, 아하하하!”
닫히는 문 사이로 이렇게까지 커다란 아빠의 웃음소릴 들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이불에 푹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때였다.
“저, 저도…! 아빠는 처음인데 나쁘진! 않네요!”
머리 위에서 살짝 과한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진짜 한 편의 콩트라도 보는 줄 알았어!”
망할 놈의 셀렘이었다.
“흐지므라….”
얘가 요즘 점점 친근하게 군다.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이러는 거야?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솔직하지 못한 건 서로 똑 닮았네.”
“아니거든?”
내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허공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셀렘이 불쑥 다가왔다.
“뭐, 평화로워서 좋잖아.”
“응, 평화롭지….”
내 목숨이 째깍째깍 닳고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슬슬 또 통증이 올 때가 됐는데….’
이젠 통증이 언제 올지도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지경에 올랐다.
“근데 그놈은 언제 공허를 죽여준대?”
“…레그? 모르지, 뭐. 의뢰했으니까 조만간 해결해 주지 않을까?”
“아, 몸이 근질근질해. 드디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하긴, 목숨이 끊기든 안 끊기든 누군가 공허의 악마를 죽이면 공허의 악마는 되살아나기 위해서 지금껏 빼앗았던 사람 중 한 사람분을 대가로 내어줘야 한댔지.
“넌 원래 몸을 되찾으면 뭘 가장 먼저 하고 싶은데?”
“나?”
“응, 너.”
내 물음에 셀렘이 고민하는 듯 턱에 손가락을 올렸다.
“일단, 그거지.”
가느다랗게 쭉 찢어진 금색 눈동자가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반짝였다.
“복수!”
“…복수?”
“공허의 악마를 어디 가둬놓고 그놈이 먹은 인간의 수만큼 죽여버리는 거야!”
셀렘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놈을 다시 아무것도 아닌 공허로 돌려보내는 거.”
두 손을 맞잡고 허공에서 빙그르르 도는 모습이 혼자서 왈츠라도 추는 것처럼 기뻐 보인다.
“나는 지금 그게 목표야.”
셀렘의 말엔 뼈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고 날카로운 뼈. 긴 시간 당한 만큼 복수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얘도 보면 본래 착한 애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성격이 말이다.
“너 또 이상한 생각 했지?”
“아니?”
“그래서 살 방법은 찾은 거야?”
셀렘이 데구루루 굴러와 내 앞에 서며 말했다.
“응.”
“그럼 잘됐네.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게 됐으니까.”
근데 그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설득을 하려고 해도 이미 책으로 돌아가 버린 건지 대답도 안 돌아오고.
“그러고 보니 벌써 다음 달이면 신년이네.”
시간 참 빠르다.
그리고 내 몸에 번진 글자는 이제 더 숨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온몸에 들러붙어 있는 카멜레온 젤리 때문에 몸이 도리어 무거울 정도였다.
‘힘이 없어.’
요즘 하루에 한두 시간 돌아다니는 것도 한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겠지.’
죽는 건 싫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조금 행복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너 올해는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뭘?”
“감사의 날에 선물. 요 몇 년간 제대로 못 챙겼다고 했잖아?”
아,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부모에게 감사를 표하는 풍습.
최근 몇 년은 정신도 없었고 사실 익숙하지도 않은 행사라 그냥 넘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새해 첫날에 아빠랑 마주치는 횟수가 많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선물을 기다렸던 것 같다.
“응, 하긴 해야지.”
뭘 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리에 힘을 주고 늘어지려는 몸을 단단히 세웠다.
“응, 들어와.”
“아가씨, 다르아 씨가 아가씨를 만나 뵈어야 한다고 찾아왔는데요….”
왔으면 들여보내면 되지 왜 저렇게 떨떠름한 얼굴이야?
아니, 떨떠름하다기보단 난감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들여보내.”
“네, 그게 상태가….”
골드가 저렇게 당황하는 일은 드문데 신기했다.
“곧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녀가 당황하면서도 허리를 굽히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르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끄흡… 흑….”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눈물은 쉬지 않고 흘렀는데 또 눈 밑을 얼마나 문질렀는지 안쓰러울 정도로 빨갰다.
“다르아, 무슨 일 있었어?”
“흐으으윽… 끄흡, 끅…!”
내가 벌떡 일어나 다가가자 다르아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등을 스쳤다. 늘 의연한 다르아가 유독 예민하게 구는 일은 딱 하나뿐이었다.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일이다.
다르아는 제 남편의 일만 엮이면 늘 침착함을 어디에다가 던져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설마.’
내 ‘설마’는 항상 적중한다.
나는 순간 든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했지만, 이미 떠오른 생각은 쉽게 털리지 않았다.
사실 다르아의 남편은 아슬아슬한 시기이긴 했다.
조금씩 개발해 가는 약물로 수명을 늘려가고는 있었지만, 언제 악화돼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도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최근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밖에도 나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잠을 자는 시간이 현저하게 늘어서 아빠가 집무를 어머니의 방에서 보는 날도 늘었다고.
그러니까,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남편이 죽었어?”
내 물음에, 다르아는 다시금 눈물을 터뜨렸다.
“아, 아, 히끅, 가씨….”
그러고도 한참이나 울던 다르아가 간신히 진정한 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