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어쩐지, 갑자기 장막을 쳐달라고 해서 뭔가 했는데!”
“그냥 생각을 좀 해봤을 뿐이야.”
“…생각?”
“응.”
내가 길드장을 찾아간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는 그 길드장이 복수를 위해서 아주 적합한 능력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셰키나가 물러날 곳이 없다면 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손이 닿지 않은 곳.
또한 자신의 이해자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충실한 조력자가 되어 모든 걸 여주에게 내어주었던 사람이 있는 곳.
정보 길드의 길드장.
바로 그가 있는 곳이었다.
“그냥 그곳밖에 없었어.”
나는 가볍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나한테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어 달라고 하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냐며 중얼거리는 표정이 어찌나 충격받은 듯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다니….”
아니,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걸 상의하는 사이였어?
내가 황당하게 셀렘을 바라보는 때였다.
“아네트, 나왔구나!”
막 길드를 나서려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내게 아는 체를 해왔다.
‘아, 얘네가 남았었지.’
대화가 원만하게 잘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원만하게 굴릴 관계가 남아 있었다.
“내가 물어봤는데, 이 근처에 대박 맛있는 맛집이 있대. 거기 가자. 예약해 뒀어.”
닉스 이그나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박 맛있는 맛집이 당일 예약이 된다고?’
그에게 끌려가 보니 어수선한 가게 안과 난감해하는 가게 주인이 보였다.
급히 사람들을 내보낸 듯, 식탁 위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음식들이 가득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부르주아 놈들은 일단 기본적인 예의도 개념도 없다니까.
“너네 협박이라도 했냐?”
“엥? 협박? 아니!”
“그냥 와서 정중하게 하루 빌릴 수 있냐고 물어본 것뿐이다.”
공작가 자제가 둘이나 와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비켜줘야지, 그럼 소시민이 어떻게 하겠는가.
‘하여튼 사람 마음을 이렇게 몰라서야.’
이미 다 난장판으로 만들어놨으니 이제 와서 못 먹겠다고 할 수도 없고.
‘돈이나 풍족하게 쓰고 가줘야겠다.’
얘네도 돈을 아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먹자!”
우리는 중앙의 가장 커다란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위로 음식이 순식간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만찬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터지겠는데.’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대충 제일 근처에 있는 음식을 접시에 덜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체 왜 여기에 온 건데? 날 위해서 무슨 의뢰를 하려고?”
“사람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사람?”
“그래, 올람이라는 인물.”
사브나크 아데우스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올람?”
퍽 독특한 이름이다.
고대어의 한 종류로 보이는데, 나름 수업받으며 공부한 나도 잘 떠오르지 않는 단어다.
“그게 누군데?”
“현존하는 주술사 중에 고대 주술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아, 혹시 프릭이 소개해 주려는 사람이 이 사람이었던 건가?
‘올람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야.’
그 말은 즉, 소설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프릭도 그렇고 사브나크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꽤 실력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사브나크가 안다는 말은 아데우스 공작이 언질을 줬다는 얘기겠지.’
사브나크가 실제로 움직였다는 건 적어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검증받았기 때문일 테니까 말이다.
‘조금 기대해 봐도 되는 건가.’
그가 방법을 알아서 이 굴레를 어떻게든 끊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프릭 박사가 아무나 소개해 주려고 하진 않았겠지만….
“근데 연락처도 거주지도 전혀 모른다잖아, 그래서 같이 의뢰하기로 한 거!”
“의외네….”
“뭐가?”
“둘이 같이 움직인 게.”
서로 원수지간처럼 만나면 으르렁대는 일이 일상이었는데 말이다.
“네 팔에서 이상한 걸 봤다고 나한테 매일같이 찾아와서 졸졸 쫓아다녔다.”
사브나크가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결국 술술 다 불었단 얘기구나.
“맛있네.”
생각 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술술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니 접시가 텅 비어 있었다.
“입맛에 맞나 보네, 다행이다. 내가 알아봤다고.”
닉스 이그나가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찾아주지 않아도 돼.”
“뭐?”
“아는 사람이 연락이 닿아서 내게 소개해 준다고 했거든.”
내 말에 닉스 이그나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사브나크도 충격적인 표정으로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놨다.
“…그렇게 발 빠른 자가 네 주변에 있다는 건가?”
“그게, 발이 빠르다면 빠르지.”
“그자는 올람이라는 남자를 얼마나 컨택했지?”
“3년…?”
만났을 때부터였으니까 어쩌면 4년이 되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렇군, 내가 졌다.”
뭘 또 졌는데.
언제부터 경쟁이었는데.
“아아~! 아네트는 다 계획이 있구나. 나는 맨날 따라가질 못하네.”
닉스 이그나가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의욕을 꺾어버린 모양이다.
얘네는 연회만 나가면 영애들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도 많으면서 대체 왜 나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철모르는 시절이라고 하기엔….’
이미 얘네도 나도 꽤 자랐고.
나는 열여섯이지만, 이놈들은 열아홉쯤은 되었을 거다.
“아, 근데 넌 왜 이 위험한 곳까지 온 건데?”
“할 게 있어서.”
“공작 각하께 부탁드리지.”
“안 돼.”
아빠 손을 더럽히고 싶진 않았다.
내가 지금부터 할 건 따지자면 인도적이지 않고 더러운 일이었으니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는 주겠지만, 어느 누가 가족을 그런 일에 끌어들이고 싶겠어.
‘그래도 조만간 그곳에 다시 발을 들이겠네.’
일단,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가서 다른 보육원으로 옮기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 길드장이 빨리 연락을 주면 좋겠는데.’
준비가 끝나고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말이다.
“근데 그놈 믿을 만한 놈 맞아?”
“이번 일에 한해서는.”
“그래?”
내가 내민 것들이 그에게는 꽤 가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 뭐가?”
닉스 이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어…?”
고개를 돌리니 셀렘이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 이 미친놈…….’
뭘 태평하게 말을 걸고 앉았어!
나는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셀렘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서 두 사람에게로 돌렸다.
“아냐, 좀 피곤한가 봐. 환청이 들린 것도 같고.”
나는 괜히 귓불을 한 차례 쓸었다.
“슬슬 돌아가야겠다.”
거짓말이 아니라 몸 상태도 어쩐지 나빠지는 느낌이다.
요즘 체력이 꽤 떨어졌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숨이 가빠지고 피로감이 짙었다.
“안색이 나쁘긴 하네.”
“냄새도 나빠.”
“확실히.”
공작가의 후계자는 다들 전생에 짐승이었나?
왜 이렇게 냄새에 집착하는 거야?
“데려다줄게.”
“아, 괜찮아. 마차….”
…가 없네.
정확히는 먼저 가라고 했었다.
“…가 없어서 부탁 좀 할게.”
걸어가거나 아니면 공용 마차를 타기에 지금은 조금 심적으로 지쳐 있었으니까 말이다.
***
“젠장, 젠장! 젠자아앙!”
콰드득-!
쨍그랑-!
와장창-!
더러운 흰 가운을 걸친 남자가 책상 위에 있던 약품과 종이를 전부 바닥으로 쓸어내며 비명처럼 욕설을 내질렀다.
“아아아악!”
“흐익!”
곁에 있던 소년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내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남자, 아니…. 로버트 화이트는 소년을 힐긋 보곤 화풀이하듯 그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이거 안 치우고 뭐 해?”
“죄, 죄송합니다.”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는 소년이 기듯이 다가와서 빠르게 떨어진 물건을 정리했다.
“다 그년 때문이야. 그 망할 년이 내 앞길을 다 망쳐놨어!”
로버트 화이트가 제 머리를 쥐어뜯다가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X발, 키메라는 쓰지도 못하게 됐고.”
대놓고 그런 건 만든 적도 없고 할 마음도 없다고 했으니.
이미 평판은 땅에 떨어져서 제대로 들어오는 후원마저 없어 이제는 먹고사는 것도 간신히 할 정도였다.
‘실험체로 쓸 만한 것도 두세 마리밖에 없는데….’
설상가상 실험을 할 돈도 없었다.
“아네트 오브리, 그 망할 어린 년이…!”
그를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발표하기도 전에 그 아이디어가 적용된 물품이 그녀가 운영하는 상단에서 먼저 출품이 됐다.
전부 관리되고 있는 실험체들이 나가서 아이디어를 훔쳐다 팔았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혹시나 누군가 들어올까 봐 문을 전부 걸어 잠그고 빛도 들어오지 않게 했다.
그뿐이랴, 로버트 화이트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번에!
또!
그가 생각해 낸 발표 직전의 아이디어가 적용된 물건이 거기서는 이미 특허로까지 등록된 판매 상품으로 나왔다.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세부적인 디테일이 다르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전부 똑같았다.
“돈, 돈이 필요해…….”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서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