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30)

<75화>

“아, 오랜만의 재회들 아니신가?”

“야.”

내 부름에 길드장이 졸린 듯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고개를 흘긋 돌렸다.

“의뢰받을 땐 비밀엄수 유지 및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진행한다. 몰라?”

내 말에 놈의 축 처진 눈꼬리가 한층 더 내려가 둥글어졌다.

이 축 처진 눈이 어쩐지 사람을 조금 열받게 하는 면이 있었다.

“우린 그런 낡은 방식 고수 안 해.”

“그럼 장사 접든가.”

정보 길드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주지 않으면 가게 문 닫아야지.

“싫으면 가든가.”

이게 이렇게 나오네.

하지만, 여기서 조금 아쉬운 건 나니까 어쩔 수 없다.

‘망할 처진 눈.’

나는 생각하며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그가 빙긋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딱했다.

길드장의 손짓 한 번에 어디선가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탁자에 다과를 올려주었다.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그러는 너희는 왜 여기 있어?”

지난 4년간 나는 꽤 바빴던 터라 연회고 뭐고 참가하지 않았다.

사실 반쯤은 여기저기서 사업 얘기를 걸어와서 귀찮은 것도 있었다.

“그게….”

“주술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 왔어. 관련된 사람이나….”

두 사람의 말에 내 표정이 묘해졌다.

“갑자기 주술?”

아니, 사브나크 아데우스는 그렇다고 치자.

애초에 얘는 주술이나 저주 계열에 관심이 많은 애고 아데우스 가문도 그런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치만, 네가 얼른 나아서 나랑 결혼해 줬으면 좋겠으니까.”

얘는 그놈의 결혼을 아직도 포기를 안 했네.

“너랑 결혼한다고 한 적도 없어.”

나는 뒷덜미를 가볍게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넌 왜 왔는데?”

“나 때문이라면 돌아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 말에 닉스 오브리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너무해! 그냥 가라고? 무려 일 년이나 기다렸던 예약인데?”

뭐?

무슨 의뢰를 받는 걸 일 년이나 기다리게 하고 받아?

내가 길드장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 바쁘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 미련퉁이들은 그걸 또 왜 기다리고 있는 거고?

“그리고 그 파란 늑대는 만나주면서 난 안 만나주는 거 너무하지 않아?”

성큼 다가온 닉스 이그나가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은근슬쩍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우는 낯을 해 보이는 게 좀 안쓰럽긴 한데, 그래도 피곤하다.

“내가 만나주는 게 아니라 걔가 찾아오는 거야.”

파란 늑대.

아르고 공작가의 후계자, 카펠 아르고를 말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말 까먹지도 않고 꼬박꼬박 찾아와서는 얼굴을 보고 사라지곤 했다.

가끔은 다과 시간을 가지긴 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얼굴만 보고 휭하니 가버릴 때도 있다.

딱 10초.

나와 적정 거리를 두고 마주한 채 10초가 지나면 “또 올게.”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게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를 일이다.

“오! 그럼 나도 찾아가면 만날 수 있어?”

영지에서 여기까지 올 자신 있으면 계속 오든가.

“뭐…. 약속하고 온다면.”

물론, 카펠은 한때 암살자였던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매번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나를 만나러 오지만 말이다.

“좋아! 매일같이 편지를 쓸게.”

“그러든가.”

거기에 내가 매일같이 답장해 주진 않겠지만.

“너는 최고야!”

순진한 건지 순수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바보인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굳이 그 맹점을 알려줄 마음은 없었다.

“…그럼 나도 정식으로 편지를 쓰지.”

곁에 있던 사브나크 아데우스가 말했다.

너도냐?

되묻고 싶은 말을 애써 꾹 참아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우리 가문에 들어오지 않아도 너라면 서재 정도는 빌려줄 수 있으니까.”

“그래. 조만간 시간을 내볼게.”

나는 적당히 사회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언제 이런 걸 권할 사이로 발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설마 그 최악의 첫 만남을 잊은 건 아닐 테고.’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사브나크 아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이놈은 뭘 하는 것인지 새하얀 피부에 반대되게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짙었다.

어쨌든 이놈들을 여기서 쫓아내는 게 최우선 목표다.

“볼일 끝났으면 이만 나가 줄래, 긴히 의뢰할 일이 있거든.”

“일이 끝나면 뭔가 예정이라도 있어?”

“그건….”

아차, 바로 있다고 대답했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말끝을 끌어버린 터라 이놈들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이제 몸만 보면 어엿한 성인이나 다름이 없는데 왜 이렇게 어린애 같은지 모르겠다.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구차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닉스 이그나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무슨 강아지 같아.’

그 황색 진돗개.

흔히 누렁이라고 불리는 그 애 말이다.

“그럼 밑에서 기다릴게! 같이 밥 먹자!”

“바쁜 거 아냐?”

너희 어엿한 가문의 후계자잖아.

“며칠 휴가를 내서 온 거라서 상관없다. 너만 시간 된다면 우린 문제없어.”

그러니까 휴가까지 내서 대체 왜 여기에 온 건데.

‘궁금하긴 한데….’

일단, 그건 식사할 때 물어보자.

“어어, 그래…. 시간 되면 기다려야지.”

일정을 하나 만들어두고 올걸.

아니면 능숙하게 거짓말을 할걸. 둘 다 못 한 나는 오늘 오후를 고스란히 뺏기게 생겼다.

“좋아, 까망이랑 아래에서 기다릴게! 이따 봐, 아네트!”

“그래….”

니네 좋을 대로 해라….

여기에 카펠이 끼지 않은 게 그나마 어디인가.

‘무슨 공작가 사총사도 아니고.’

유치해질 뻔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처진 눈으로 빙긋 웃고 있던 길드장이 내게 입을 열었다.

“사이가 좋으시네요.”

“아빠들끼리 친구…, 아니, 동료니까.”

친구라고 했다가 아빠가 얼마나 기함을 토할지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다 쫓아내고 하고 싶은 게 뭔데? 아동학대범, 인신매매범 없애는 자선사업?”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는 길드장을 보며 나는 가볍게 웃었다.

“자선사업?”

내가 흘린 비웃음에 길드장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뭐, 그렇게 보이면 좋긴 하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응, 겨우 그걸 위해서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일 리가 없잖아.”

사업체를 만들고 돈을 불리고, 거기에 수년을 웅크리고 있다가 정보 길드까지 찾아와 협상하는 수고까지 들였으니까.

“그럼 뭔데?”

“복수.”

“아하….”

심드렁하던 길드장의 입가가 쭉 찢어지듯 호선을 그렸다.

이제야 좀 납득 가는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복수! 그거 좋지.”

“근데 그놈들이 인신매매단이라서.”

“당한 적이라도 있나 보지?”

“너랑 비슷해.”

길드장의 뺨이 한 차례 씰룩였다.

그도 어릴 적 납치되어 부모를 잃고 끔찍한 꼴을 당하다가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살인부터 사기, 협박, 고문 등 끔찍한 일을 일삼는 이놈이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 범죄가 그거였다.

아동학대와 인신매매.

그에게 걸린 순간 산 채로 사지를 갈기갈기 찢긴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두 부류의 범죄자를 싫어하는지 훤히 보였다.

“오늘은 정말 신기하네.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소문.”

“아는 놈들은 다 죽였는데….”

눈이 처져서 무해하고 다소 의욕 없어 보이던 소년의 입가가 불쾌하다는 듯 삐딱해졌다.

“누가 또 살아 있었어? 말해 봐, 그러면 이번 일 공짜로 해줄 수도 있어.”

“돈 많아서 상관없는데.”

“5천만 데르크쯤 부르면 어쩌려고 그래?”

그의 말에 나는 픽, 웃었다.

“뭐야, 당신 몸값이 겨우 그거야? 아니면 소심한 거야?”

정보 길드의 길드장의 몸값이 그거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사실 금액 자체는 꽤 컸다. ‘천문학적’이라는 단위가 붙지는 않지만, 상단에서도 꽤 큰 거래가 오갈 때나 나올 법한 단위였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큰 거래도 여러 개 잡힌 터라 가게의 수익이 상당했고….

‘뭣하면 가문에서 좀 끌어와도 되고.’

아빠가 주는 용돈을 하나도 쓰지 않아서 아마 그대로 쌓여 있을 테니 말이다.

내 말을 들은 그의 입가가 두어 차례 씰룩였다.

“두 배.”

“뭐?”

“그쪽이 제시한 금액의 두 배 줄 테니까 일만 제대로 해.”

내가 방긋 웃자 길드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치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제 뺨을 가볍게 문지르더니 상체를 숙이곤 어깨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에 나는 소파에 몸을 묻고 가볍게 숨을 뱉었다.

“좋아!”

그가 두 팔을 벌렸다.

“뭘 원해? 내가 손수 원하는 대로 깔끔하게 처리해 줄게. 물론 사후 서비스도 같이.”

“일단 당신이 내 손발이 되어줘야겠는데.”

나는 마석 하나를 탁자 위에 느리게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무색투명한 장막이 우리 주변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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