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공작 각하!”
“샤콜….”
페드로가 반색하고 공작부인, 아니, 엄마가 파리한 안색으로 그를 불렀다.
아빠는 인상을 설핏 찌푸리더니 성큼성큼 걸어 엄마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로사나, 괜찮나?”
“응, 나는 괜찮은데….”
엄마의 떨리는 시선이 나와 셰키나에게 닿았다.
나에 비해 다소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는 건 셰키나인데, 왜 내가 더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역시 일단 물러나는 게 맞나?’
여기까지 여론이 나빠졌으면 아빠의 평판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뭣보다 이 고대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뜨거운 시선에 심장이 절로 쿵쿵 뛰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가장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뜨거운 햇볕 아래에 드러낸 느낌이었다.
‘체스는 어딨지?’
일단 체스를 데리고 물러나자.
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자 아빠의 미간이 한 차례 꿈틀 움직였다.
“야, 너 여기서 물러나면 영영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는데 물러날 거야?”
일단 물러나려는 내 앞을 셀렘이 가로막았다.
그럼 이미 상황이 악화했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하라고.
“아네트.”
“네.”
“네.”
나와 셰키나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빠가 나와 셰키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곤 나를 내려다봤다.
“너, 또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군.”
“아닌…데요….”
“보아하니 일단 집 나가서 알아서 하려고 하는 게 뻔히 보이는군.”
“…….”
이 사람은 정말 독심술이라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 오브리, 공작 각하. 그, 그 애는… 악마가 들린 가짜….”
곁에 있던 사용인 중 하나가 용기를 내 아빠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보란 듯 고개를 까딱이곤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겠어?
내 몸짓을 알아들었는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 애가 악마라고 생각하나?”
“아, 악마는 아니더라도 악마를 소환한 건 분명히….”
“그렇군, 그럼 너는 오늘부로 짐을 싸서 이 저택을 나가라.”
“예, 예…?”
눈을 동그랗게 뜬 사용인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손으로는 엄마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이 애를 내 딸이라고 했고 그 말을 번복한 적이 없는데.”
그의 말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내 말을 의심할 거라면 네가 나가야지. 내가 네 목을 베어내기 전에.”
아빠의 주변으로 날카로운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흩뿌려져 있던 녹색의 빛이 날카로운 수정처럼 뭉치더니 이내 주변을 위협하며 허공에서 반짝거렸다.
“샤콜….”
엄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아빠가 빙긋 웃었다.
“로사나, 그대는 들어가서 쉬고 있도록 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하지만, 그럼 저 애는….”
“내 딸은 이 애야.”
“하지만…! 저 애는 당신과 똑같은 능력을….”
엄마의 눈이 흔들렸다.
엄마도 뭐가 진실인지 제대로 믿을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그저 혼란 속에서 믿을 만한 거라곤 오브리 가문의 직계만이 가질 수 있는 녹의 힘뿐이겠지.
“페드로.”
“네, 주인님.”
“내 책상 서랍 두 번째를 열면 서류 하나가 있을 테니 그걸 로사나에게 줘. 그리고 방에 데려다주게.”
“아, 네. 알겠습니다.”
아빠의 말에 엄마는 흔들리는 눈을 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엄마에게 있어 아빠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지 확실해지는 부분이었다.
“다른 놈 중에서도 내 뜻을 따르지 않을 놈들이 있으면 나가도 좋다. 오늘 하루만 불문에 부칠 테니.”
아빠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너도 내 집에서 나갔으면 하는데.”
“…저, 저는 단지 이곳으로 오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계시를 받고….”
셰키나가 울멍울멍 젖은 눈으로 설움을 꾹 참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집을 잘못 찾은 모양이지.”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도 그 애는 위험해요, 악마를 소환했으니까요. 그 애를 아버…, 아니, 공작님 곁에 둘 순 없어요.”
“나가지 않겠다면 내가 네 목을 벨 수밖에 없는데.”
아니, 아빠가 왜 이렇게 공격적이지?
예전에는 그래도 멍하니 셰키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모습이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공작님께서는 악마에게 홀리신 거예요…!”
“나가라. 세 번은 없다.”
아빠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
셰키나는 일이 제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퍽 당황스러운 듯 입술을 깨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주인님.”
이윽고 엄마를 방에 데려다준 페드로가 돌아왔다. 살짝 굳은 표정에선 아까와 같은 당황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페드로, 더는 시끄러운 일 없도록 처리해. 나가겠다는 놈들이 있으면 내보내고.”
“네, 알겠습니다.”
페드로가 나를 향해 빙긋 웃어주곤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빠는 더 이상 관여하기 싫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공작님! 공작 각하! 그 애를 받아들이면 후회하실 거예요! 그 애는 공작부인을 죽게 할 거라고요!”
‘쟤 진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콰앙-!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셰키나의 바로 뒤에 있던 기둥이 굉음을 내며 쩌저적 갈라졌다.
뿌연 먼지가 사라지고 보니 기둥에는 아빠가 늘 손에 쥐고 다니는 부채가 꼿꼿하게 꽂혀 있었다.
“흡….”
셰키나가 상당히 놀란 듯 눈을 홉떴다.
‘아빠 무서워.’
그리고 저 분노가 나에게 향할까 봐 한층 더 무서웠다.
‘…이거 어쩌지.’
이제라도 좀 덮을 수 없을까 싶어서 바닥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젤리를 주섬주섬 주워 몸에 찰싹 붙여보려는 때였다.
“너.”
아빠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넵!”
나는 급히 들고 있던 젤리를 내던지며 힘껏 대답했다.
“내 집무실에 가 있어라.”
“그….”
“허튼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가서 기다려.”
“네….”
허튼 생각이라면, 내가 지금 어떻게 이 상황에서 덜 혼나기 위해 도망갈까를 고민하는 걸까?
‘아니, 근데 혹시 이런 일이 있을 것도 같아서 저택에 이미 장치는 마련해 뒀었는데….’
나는 나가더라도 이 집안에 체스와 프릭 박사님, 그리고 다르아는 남아 있을 거다.
이미 그들에게 사정은 다 설명해 둔 터라 내가 셰키나에게 밀려 몸만 빠져나가게 되는 건 상정 범위 내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붙잡혀서 혼나게 될 건 상정 내의 일이 아니었지….’
나는 터덜터덜 아빠가 말한 것처럼 집무실로 향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투명한 막 밖으로 나가자 이젠 다들 셀렘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 좋은 소식과 좋지 않은 소식 두 가지가 있는데 뭘 들을래?”
내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셀렘이 허공에 드러누워 물어왔다.
“…둘 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럼 그냥 안 좋은 소식부터.”
그런다고 굳이 또 안 좋은 소식부터 전해 줄 건 뭐야?
“쟤 죽이기 힘들겠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정확히는 쟤를 죽여도 네 저주가 풀리진 않을 것 같아. 이미 끝난 내 저주와 다르게 네 저주는 현재 진행형이잖아.”
“그렇지.”
“직접 마주하고 알았는데, 너와 저놈은 지금 연결이 되어 있어.”
셀렘이 양손의 검지를 하나씩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윽고 그 사이로 붉은 실이 생겨나 셀렘의 양 손가락을 서로 묶어 연결했다.
“즉, 너희는 게임 중이라는 거지. 나는 이미 게임을 한 뒤 패배한 상황이고.”
“…음.”
“네가 이번 삶에서 저놈을 죽이면 저놈은 이번 삶에서 네게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못할 뿐이야.”
“…그 말은.”
“네가 저놈을 죽여도 대가를 지불한 저놈은 다시 살아날 테고 네가 저주에 먹혀 죽은 뒤 다음 생에 또 이 싸움이 이어진단 말이지.”
셀렘이 허공에 빨간 실을 휙 흩뿌리더니 그 아래를 왈츠라도 추는 듯 빙글빙글 돌며 여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