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뭐야, 마물이면 없애줄까?”
가만히 지켜보던 닉스 이그나가 한 걸음 불쑥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더는 날 곤란하게 만들지 마. 이건 내가 쓰고 있는 거야. 아빠 몰래 팔에 그림을 그려 넣었거든.”
나는 적당히 닉스 이그나에게 변명을 뱉었다.
사실 그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응,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림이라고.”
눈을 가늘게 뜬 닉스 이그나가 반쯤 드러난 내 고대어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마물이 덮고 있는 거야?”
“마물은 아니고 마물을 원료로 써서 만든 젤리야.”
“마물로 만든 젤리…?”
내가 살짝 뜯어 보이자 닉스 이그나가 신기하단 표정을 한 채 손가락으로 카멜레온 젤리를 쿡쿡 찔렀다.
“이렇게 덮으면, 피부랑 똑같은 색하고 질감으로 변해서 감쪽같거든.”
“와, 이런 건 처음 봐.”
“이번에 출시할 예정이라서.”
아마 모험가 길드나 이런 쪽에서 대량으로 구매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건 위험한 거야?”
천진한 표정을 하고 있던 닉스 이그나가 이윽고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물음이지만, 그 안에 뼈가 있음을 모르진 않는다.
‘역시 그냥 넘어가 주진 않네.’
후계자가 괜히 후계자는 아닌 모양이다.
“위험한 거라고 하면?”
“팔이라도 잘라내야지.”
닉스 이그나의 주변으로 날카로운 불의 칼이 뜨거운 불길을 내뿜으며 생겨났다.
“…무식하고 과격하긴.”
“괜찮아, 내 검은 불이라 바로 지혈도 될 테니까.”
그보단 그렇게 잘리고 싶지 않은 거거든.
사지 멀쩡하게 죽고 싶은 내 마음을 왜 몰라줄까.
“안 돼.”
카펠 아르고가 닉스 이그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주변으로 새파란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제 막 힘을 배우기 시작한 놈이 덤비네?”
“아네, 시러.”
카펠 아르고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 말을 들은 닉스 이그나가 휙 나를 봤다.
“너도 싫어?”
“싫지, 좋겠냐?”
“…그렇구나.”
닉스 이그나가 대번에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검을 없앴다.
입술이 툭 튀어나온 것이 정말로 속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저거에 잘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통 어디에 있겠냐고.
“너 내 팔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말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아? 해결하기도 빠를 테고. 저주의 종류라면 더욱 말이야.”
이 멍청해 보이는 녀석까지 이게 저주라는 걸 단번에 간파해 낼 줄은 몰랐다.
“나중에 말할 거야.”
“그럼 그냥 지금 말할게.”
“야, 너 이거 지금 말하면….”
내가 목소리를 깔자 연회장으로 돌아가려던 닉스 이그나가 힐긋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너 바로 얼마 전에 악몽 꿔서 오줌 싼 뒤에 이불 불태워 버린 거, 신문에 대서특필될 줄 알아.”
“…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반사적으로 입을 떡하니 벌렸던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 아니. 뭐, 뭐,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있지.”
“이, 있다고? 어, 어떻게….”
“고대 식물 중에 과거를 기억하는 식물이 있거든.”
뻥이다.
그런 식물이 있으면 세상에 카메라가 개발될 일도 없었겠지. 물론 화가가 생겨날 일도.
“거기에 마력을 주입하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모습을 띄워줘.”
“그, 그런 식물이 있어…?”
“있지, 나는 녹의 아이잖아. 무슨 식물이든 다 살려낼 수 있어.”
이것도 뻥이다.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확신이 98% 정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능력을 쓰지 못하니까.
“그, 그건 실수니까…!”
“알겠어, 신문사에 대서특필할 때 꼭 실수라고도 덧붙이라고 할게.”
“아아악! 왜, 왜 그래! 그런 건 숨기기보단 어른들한테 말해서 해결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알아서 할 거야. 이미 다 계획도 세워뒀고.”
물론, 당연하게도 이것 역시 뻥이다.
활짝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닉스 이그나는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그건 절대 비밀이야….”
“네가 내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말하지 않을게. 반드시 네가 이불을 꾹꾹 싸매고 뒤뜰에 가서 불로 태워서 없앤 일은 비밀로 할 거야.”
“…아.”
사실 나도 기록서를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내용이기는 했다.
불장난하면 밤에 화장실을 가게 된다는 옛말이 있는데, 그게 정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만 돌아가도 될까?”
연회장.
덧붙인 말에 닉스 이그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정이 떨어졌겠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살짝 안쓰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귀찮게 붙는 걸 막기 위해서도….’
그 때 닉스 이그나가 짧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무룩해져 있거나 실망스러운 표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그의 뺨은 홍조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네트.”
“응.”
“내 치부를 알고도 비웃지 않고 협박 소재로 사용한 건 네가 처음이야.”
“…어?”
“…역시 난 네가 좋아. 꼭 내 아내님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혹시, 얘는 피학적인 성향을 지녔던 걸까?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데뷔탕트는 꽤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그래, 그것은 폭풍전야 같았다.
아주 커다란 폭탄을 위한, 기나긴 폭풍전야 말이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특히나 내 체감상 남들보다 배는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4년.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고 내 몸 상태도 정말 물 흐르듯 함께 나빠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리저리 벌여놓은 사업들이 꽤 성과를 거뒀다는 거다.
수도에 차린 가게가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얻어 제국에서 가장 큰 매장이 되었다.
백화점에 오기 위해서 관광을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처음 생길 때보다 증축도 꽤 해서 지금은 건물이 6층짜리가 되었다.
거래하겠다는 상단과 업자도 많이 생겨서 정말 백화점에 한 번 들르면 뭐든지 다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스카우트를 했던 발란 웍스가 신의 한 수였다.
얼마나 일을 잘해 주는지 증축하는 내내 그의 도움을 꽤 받았었다.
“너도 슬슬 한계인 모양인데.”
거울 앞에 선 채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내 어깨에 앉아 있는 셀렘이 보였다.
“그러네.”
나는 거울에 드러난 몸을 보았다.
열여섯이 되면서 훌쩍 자란 키와 제법 어린애 태를 벗은 앳된 낯은 확실히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온몸을 빼곡하게 채운 글자를 보고 있으려니 불쾌감이 스멀스멀 터져 나왔다.
이제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제외하면 몸 전체가 시커먼 고대어투성이다.
카멜레온 젤리를 만들어 주는 프릭도 내가 가져가는 양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프릭이 소개해 준 사람이 곧 온다고 했었나?’
3년 전부터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이제야 답장을 받은 모양이었다.
프릭이 주술에 한해서는 아주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하긴 했지.
‘별로 기대는 안 하지만.’
나는 익숙하게 온몸에 카멜레온 젤리를 덕지덕지 붙이며 고개를 떨궜다.
피로감은 짙어지고 잠은 많아졌다. 상당히 익숙한 감각이다.
“그 뒤로 그놈의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어.”
셀렘이 내 어깨에서 다리를 가볍게 굴리며 말했다.
“난감해,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셀렘은 눈과 손 일부가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3년 전, 자르단 마을에서 셰키나를 본 뒤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네게서 무언가를 뺏어 가려면 얼른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셀렘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셰키나가 나와 어떠한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셀렘의 말에 따르면 ‘공허’가 내 소원을 이뤄줘야만 나는 또 한 번의 삶을 얻게 되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이 회귀는 그런 식으로 무한하게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셀렘처럼 몸 전체를 빼앗길 때까지.
물론 그게 무슨 계약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고.
“나타나지 않으면 이 게임은 끝나는 거야?”
“너도 죽고 공허도 죽겠지.”
내 물음에 셀렘이 담백하게 설명했다.
‘내 결말은 뭐 다 죽는 거뿐인가.’
어떻게 생존 루트가 하나도 안 보이냐.
어떤 이야기도 이렇게 꿈과 희망이 없진 않을 텐데.
“넌 이미 그놈의 주술에 걸려 있는데, 네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는 건, 결국 놈의 주술이 실패했다는 거니까.”
주술이 실패하면 시전자는 대가를 치른다.
“아, 그래.”
아, 나도 꿈과 희망이 있는 세계로 가고 싶다.
“뭐, 놈도 죽고 싶지 않으면 슬슬 나타나겠지.”
셀렘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악마처럼 웃었다. 가끔 얘는 내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겠다.
“아빠한테 가야겠다.”
막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얘, 들었어? ‘진짜’ 오브리 가문의 공녀님이 나타나셨대! 녹의 공녀님!”
폭풍이 밀려오는 소리가 귓가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