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
닉스 이그나도 이번에는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가 흘긋 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서 있는 아빠를 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모든 걸 물려받은 지배자 자체를 이기기엔 좀 부족한데….”
닉스 이그나가 제 머리를 붙잡더니 끙끙 앓는 신음을 냈다.
“좋아, 그럼 역시 3년만 기다려!”
그러고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그 안에 반드시 강해져서 올 테니까.”
“다 죽여?”
닉스 이그나와 대화를 하는 도중 문득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카펠이 내 곁에서 서성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뭐라고?”
“다 죽여? 아네 내 거?”
다 죽이면 내가 자기 게 되냐고?
소름이 쫙 돋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얘는 순수한 만큼 발상이 꽤 위험하다.
‘하긴, 긴 시간 암살 길드 같은 곳에서 이용됐다고 했지.’
그곳에서 이 애에게 말을 가르치는 대신 뭘 가르쳤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죽이면 안 돼.”
“…아네, 카페 시러?”
“싫지는 않지만…. 역시 카펠이 조금 더 많이 공부해서 멋진 사람이 되면 좋겠네.”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세상을 알게 되면 나 같은 거에겐 금세 관심을 끌 테니까 말이다.
“세상도 많이 보고 말이야.”
“응, 그러하다. 아네 내 거?”
“그때 가서도 카펠이 날 마음에 들어 하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사실 카펠이 어떻게 자랄지 다 알고 있다.
무뚝뚝하고 여자에게도 타인에게도 흥미 없는 사람으로 자란다.
그렇게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을 만나게 되어….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 ‘공허’는 카펠의 앞에 나타나는 건가?’
그 애가 오브리 공작가에 입양되지 못했다고 한들, 그게 카펠과 만나지 않게 된다는 건 아니다.
그 말은 즉, 그 ‘공허’라는 존재가 언제 또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거다.
“하하하, 다들 아네트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샤콜.”
“당연합니다, 누구 딸인데.”
아빠 딸이긴 한데, 그렇게 자랑하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저기!”
닉스 이그나가 손을 번쩍 들더니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바닥을 보였다.
“그래도 오늘은 나랑 데이트해 줘야지.”
“뭐? 내가 왜….”
닉스 이그나의 뒤에서 힐 이그나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내 동생이랑 약속했다며.”
“…아.”
맞아, 그랬었지.
어쨌든 소개받기로 했으니 그와 한 번 정도는 함께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
나는 닉스 이그나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나!”
그리고 그 손 위에 카펠도 손을 올렸다.
“그럼 나도.”
마지막으로 그 손 위에 사브나크 아데우스가 손을 올렸다.
손이 사단으로 쌓였다.
“뭐 하는 거야?”
웃는 얼굴의 닉스 이그나의 주변으로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감시자로.”
“그럼 나도….”
사브나크 아데우스의 말에 이노스 오브리까지 끼어들 것 같은 느낌에 내가 서슬이 퍼렇게 선 눈으로 노려보자 이노스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너도 헛소리 말고.”
나는 웃는 얼굴로 사브나크의 손을 내쳤다.
“…너무하네.”
사브나크가 퍽 충격받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얘는 나랑 언제부터 친했다고 친한 척이야?
하지만 내가 거부하니 사브나크도 두 번은 질척거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다음은….’
카펠인데.
내 허리에 매달린 얘를 어떻게 떼어내지?
“카페… 시러?”
“아니, 싫지 않아.”
싫지는 않은데,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
데려갈 수는….
카펠이 눈을 반짝거렸다. 순진무구한 눈빛을 쏘는 그를 보며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
“아네트, 너무해!”
닉스 이그나가 내 오른쪽 손을 붙잡은 카펠 오브리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럼 어떡해? 애를 놓고 와?”
“애라니… 누가 봐도 나랑 동갑이잖아.”
닉스 이그나가 카펠 오브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아직은 좀 애잖아.”
카펠 오브리가 보란 듯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애 맞겠지?’
생각하는 도중, 내 말을 들은 닉스 이그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꼭 붙잡은 내 손은 놓질 않는다.
“대체 내가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꽉 잡힌 왼손을 보며 혼잣말을 하자 그가 웃었다.
“이상하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나는 이유가 필요 없다는 게 더 신기한데.”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면 대체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래? 그러면 너라서 좋아.”
“…….”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했다는 건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거야.”
“내 얼굴에 반했을 수도 있잖아.”
“….”
말해 놓고 조금 쪽팔린다.
분명히 귀엽게 생긴 얼굴이기는 했지만, 그걸 내 입으로 말하는 건 다소 문제가 있다.
“음, 그래! 네 얼굴에 반한 거야!”
짧은 침묵 끝에 닉스 이그나가 말했다.
한 가지는 알겠다.
얘가 그래도 최소한의 매너는 있다는 사실.
나는 시뻘겋게 물든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붕붕 휘저었다.
‘근데 좀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데….’
설핏 미간을 찌푸린 내가 막 왼손을 내려다보는 때였다.
뚝, 뚝, 뚝.
점성이 있는 액체가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이게 뭐지?”
이변을 그도 눈치챘는지 닉스 이그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던 그가 나와 느리게 손을 떼어냈다.
닉스 이그나의 손도 그 점성이 있는 액체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게 뭐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어?
분명히 카멜레온 젤리로 가려놨던 왼팔의 고대어가 반쯤 드러나 있었다.
“아, 미친….”
X 됐다….
이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카멜레온 젤리가 녹아내린 것이다.
‘그때 프릭이 분명 불을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얘가 불을 사용하는 능력자인 걸 깜빡했다.
아니, 사실 깜빡하지는 않았는데. 설마 나에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는 게 좀 더 옳은 말이겠지.
“너 그, 능력 썼어? 불 말이야.”
“불? 아니, 나라도 아무 때나 힘을 쓰진 않아. 힘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구분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근데 이게 왜 녹아내린 건데.
그렇다고 닉스 이그나의 체온이 딱히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 근데 아버지가 보호막은 둘러주셨지.”
닉스 이그나가 제 목에 걸린 투박한 뼈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했다.
“보호막?”
“삿된 것이나 마물이 나한테 닿으면 저절로 불이 붙는 거야.”
“….”
그거네.
카멜레온 젤리가 아무리 가공을 해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결국 카멜레온 슬라임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 말은 즉, 얘도 마물이라는 거지.
“근데 이게 뭐야?”
그가 점성이 있는 액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그리고 네 팔의 문양도….”
아, 진짜 망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반쯤 녹아내린 카멜레온 젤리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떨궜다.
“왜? 무슨 일 있어? 혹시 이거 마물이야?”
닉스 이그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네 주변엔 신기한 녀석들이 모이네.”
갑자기 나타난 셀렘이 내 머리에 툭 앉으며 말했다.
‘얘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아직 닉스 이그나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긴 한데 말이다.
킁킁, 곁에 있던 카펠이 내 팔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아네, 아프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
“아프다, 냄새.”
얘는 무슨 개도 아니고.
나는 오른손으로 카펠의 머리카락을 슥슥 문질렀다.
그래도 내가 아프다는 걸 눈치채 준 사람은 얘가 처음이다. 짐승처럼 자라서 그만큼 육감적인 부분이 발달한 걸까?
“아프진 않아.”
아직은 말이다.
“거짓말.”
내가 내뱉은 말을 들은 카펠이 지체 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 말을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