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아네트에게.
안녕, 아네트.
네가 알려준 합성 마석을 제작하는 방식을 응용해서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봤어.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서 보호막이 펼쳐지는 것들인데, 아직 조금 더 보완할 점이 있기는 해.
하지만, 마력이 없는 사람들도 어디에서든 돈을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괜찮은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몇 개 보내니까 한번 사용해 보고 의견을 주면 고맙겠어.
그리고 이번에 세미 데뷔탕트가 있잖아. 그때 너도 참석하지? 나도 참석하거든.
그날, 형님을 소개해 줄게.
형님께 이야기했더니 네가 엄청 궁금한가 봐. 데뷔탕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사실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쯤엔 벌써 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있잖아, 형님과 네가 서로 마음에 들어서 약혼을 하게 되면 좋겠다.
그럼 조만간 곧 보자, 아네트.
너의 친구, 힐 이그나가.]
나는 수북이 쌓여 있던 우편물을 정리하다 발견한 편지를 읽고 그대로 탁자에 이마를 박았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힐과의 비즈니스 관계에는 한 가지 조건이 걸려 있었지.
‘이그나 가문의 후계자라면….’
닉스 이그나.
그는 소문으로도 소설 속에서도 퍽 특이한 녀석이었다.
‘닉스’라서 스스로를 ‘피닉스’, 그야말로 불사조라고 지칭하는 자의식 과잉의 이상한 녀석.
“사춘기 남자애….”
그래, 흔히 말해 사춘기…, 약간 속되게 말해 중이병에 걸렸다는 댓글이 가장 많았다.
“…뭐,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생각하기엔 처리해야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나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거울 앞에 서서 원피스를 벗었다.
프릭에게 받은 특수한 액체를 오른손에 듬뿍 묻힌 뒤,왼손의 손등에 올리자,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카멜레온 슬라임으로 만든 발명품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건 ‘카멜레온 젤리’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사실 악용될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을 감싸주고 희망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면 했다.
오래되고 나을 수 없는 흉터를 가리거나 혹은 남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는 것을 숨기는 용도로.
찌이이익-
젤리가 살결에서 떨어지며 미묘한 소리를 냈다.
젤리는 왼쪽 손등부터 쭉 분리되더니, 이윽고 목까지 올라와 주술이 새겨진 목 부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이미 가슴골 사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 ‘카멜레온 젤리’는 물론 획기적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붙이고 있으면 아예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기만 하면 다행인데, 이게 녹아내려 피부에 있는 숨구멍으로 스며들어 혈관을 막고 몸을 썩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하루에 한 번은 뗐다가 붙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또 이 카멜레온 젤리는 반영구적이기 때문에 혹시나 접착력이 떨어지면 가게에서 파는 카멜레온 슬라임의 점액을 사서 조금 섞어 다시 반죽해 주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꼴이 엉망인데.”
이제 겨우 1년이 됐는데, 몸의 4분의 1은 먹힌 기분이다.
‘그 기록서를 읽은 대가겠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공기를 쐬어준 뒤 다시 ‘카멜레온 젤리’를 몸에 붙였다.
“어차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 데뷔탕트 날이고 뭐고 영원히 안 왔으면 좋겠다.”
***
그렇게 데뷔탕트 날이 다가왔다.
“…실환가.”
차라리 누가 이 모든 상황을 꿈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하고 작은 바람이 있었다.
“아네트, 입장하자꾸나.”
“네에…, 아빠.”
물론, 소원이 아무리 간절하다고 한들, 이미 한껏 차려입고 연회장 입구에 선 상황에선 이뤄지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아네트, 여기 내 손도 있어. 괜히 넘어지지 말고….”
“넘어지겠냐고….”
바닥에 넘어지지 말라고 카펫을 쫙 깔아놨는데 말이다.
“오브리 공작가의 샤콜 오브리 공작 각하, 이노스 오브리 소공작, 아네트 오브리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조곤조곤 대화를 나눈다고 한들, 결국 많은 인파가 모인 곳이라 꽤 시끄러웠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아빠와 오라비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은 채 연회장을 밟았다.
훅 쏟아지는 시선에 절로 숨이 막혔다.
“오, 주인공 등장했네.”
모두가 숨을 죽인 사이 들린 목소리는 꽤 낯익은 것이었다.
하긴, 이 얼어붙은 정적을 깰 수 있는 건 저만큼 무신경하고 자기 페이스를 갖춘 사람뿐일 것이다.
“얼마 전에 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네, 초록이.”
“…….”
아빠는 깔끔하게 그를 무시하며 지나쳤다.
손을 내밀면서 인사하는 이그나 공작을 그야말로 투명 인간 취급했다는 거다.
“상스러워서 곁에 있는 것도 불쾌하군.”
“동감이다.”
아빠의 말에 근처에 있던 아데우스 공작이 퍽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아데우스 공작은 우리가 오기 전까지 이그나 공작에게 꽤 시달렸던 모양이었다.
“아, 마침 잘됐네. 아네트, 너 우리 첫째랑 약혼 생각이 있다고 했다며?”
“네?”
“뭐?”
“뭐라고요?”
“…뭐?”
“정말이야? 나는?”
아니, 앞에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이해하겠는데, 뒤에 두 사람은 왜 놀라는 거야?
아데우스 공작과 그 곁에 있는 사브나크 아데우스였다.
그러고 보니 사브나크와는 그때 그렇게 불쾌하고 찝찝하게 헤어지곤 바빠서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 뒤로 온갖 일이 터져서 정신도 없었고 말이다.
“너는 뭐?”
내가 황당한 얼굴로 되묻자 사브나크가 입술을 달싹였다.
“약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네트!”
이노스 오브리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아니, 나도 모르는 얘기라니까.
아빠라면 이성적인 사람이니 이노스를 말려주겠지 싶어서 아빠를 봤는데, 이쪽은 한층 더 야차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듣는 소리구나, 아네트. 네가 정말 저런 말을 한 건가? 아니면 저놈이 기어코 미친 건가?”
아빠의 손에서 녹색의 빛무리가 슬금슬금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이그나 공작을 보았다. 그가 내게 빙긋 웃었다.
그 옆을 보자 어딘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힐 이그나도 있었다.
‘뭐가 좋은데.’
사람을 이렇게 난감하게 해놓고 뭐가 좋냐고.
“아, 그게 아니라….”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저놈이 기어코 미친 거군.”
아빠는 내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이그나 공작을 향해 매섭게 몸을 돌렸다.
아니,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아빠, 제가 비슷한 말은 했어요.”
나는 무슨 사달이 일어나기 전에 일단 중요 포인트만 전달했다.
“힐이 형을 소개해 준다고 마음에 들면 약혼하는 건 어떠냐고 하길래 제가….”
쓸데없이 다른 데 정신 팔렸다가 괜히 얼버무리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않았어도….
“제가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한 거예요.”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아빠가 느릿느릿 내 말꼬리를 잡아 으득으득 짓씹듯 말했다.
“네….”
아니, 당신은 내가 안 할 거 알잖아.
어차피 4년 뒤면 돌아갈 거라고 의사도 밝혔는데, 왜 화를 내는 거야?
“마음에 안 들면?”
“그거야 당연히… 없던 일이 되겠죠….”
나는 흘긋 힐 이그나를 바라보며 슬금슬금 대답했다.
사실 애초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내 말에 그는 다소 아쉬운 표정을 했지만, 약속은 약속이라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놈과 사돈이 되느니 폭주해서 죽겠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무섭게 해.
“아빠,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너는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해도 되고?”
아니, 이 인간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내가 약혼을 할 리가 없잖아!
“초록아, 애들이 서로 한 번 만나보겠다는데 왜 그렇게 날이 섰어? 무섭네, 무서워.”
바로 당신의 그런 점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기는 하는데.
“어? 찾았다! 뭐야, 같이 있었으면 말해 주라고, 힐.”
뒤에서 가무잡잡한 손이 뻗어 와 힐 이그나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하지 마십시오, 형님.”
힐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팔을 가볍게 내쳤다.
키득키득 웃으며 힐 이그나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