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래서 이번 데뷔탕트는….”
그의 목소리가 꽤 멀리서 들렸다.
아마 내가 샤콜 오브리의…, 아니, 아빠의 이야기에 집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진짜 딸?’
오브리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가 나라고?
사실을 알게 된 뒤 몇 달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빠를 마주하고 있으면 괜히 정신이 멍해지고 기분도 이상해졌다.
왜냐고?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무슨 소설 제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어쩌면 내 상황을 로판 소설로 쓴다면 대충 이런 제목이 달리겠지.
<시한부인 내가 잃어버린 오브리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라든가….
아니, 어쩌면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겠다.
<시한부 실험체로 죽었다 살아나니 사실은 내가 공녀였대요> 같은 것들.
그게 아니면….
<회귀했더니 왼팔에 흑염룡을 지닌 천재 공녀가 되었다> 같은 괴상하고 오글거리는 제목들 말이다.
물론 나는 천재고 회귀한 것도 맞지만, 내 왼팔의 고대어를 흑염룡이라 하기에는 살짝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 아무튼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제목들에 꼭 어울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도 어딘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이쯤이면 인정할 때도 됐잖아, 나!’
무려 그사이 해가 바뀌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있는 힘껏 뺨을 꼬집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이상한 게 있었다.
어제 밖에 나갔다가 조금 다쳐서 왔던 터라 온종일 이 자리에 앉아 아빠의 잔소리를 듣고 있는데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조금 묘하고 아련했다.
‘…일이나 많아지고.’
처음에 가짜 아빠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도 이 집안을 어떻게든 살리자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이 또 진짜 아빠라면 더 필사적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근데 정말 이런 나르시시스트가 내 아빠가 맞나?’
어쩌면 조금쯤은 아니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아네트, 너 내 얘기 듣고 있나?”
“네, 아빠.”
늘 부르던 호칭에도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심장 안쪽에서부터 몽글몽글 뭔가가 솟아오르는 기분 말이다.
‘죽을 때가 됐나.’
사실 피가 솟구치고 있는 거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이 기분을 나 혼자만 느껴야 한다는 게 안타깝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도 이 가문을 떠날 때까지도,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그리고 나는 이제 진심으로 부디 그러길 바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내 얘기 제대로 들은 거 맞나?”
“네, 열두 살부턴 세미 데뷔탕트를 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데뷔탕트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세미 데뷔탕트는 보통 소년 소녀들이 사교를 나누고 약혼 상대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는 어린 나이부터 고생이야.’
귀족도 편하진 않았다.
“그래, 이제 곧 신년이니까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 훅 지나간 날짜를 보고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자르단 마을의 일이 터진 후로도 무려 몇 달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르아가 무사히 수도에 정착해서 약 개발을 시작했다.
‘내 이름의 가게도 세웠고 상단도 냈고… 계좌도 개설했지.’
그리고 괴짜 과학자…, 아니. 프릭의 발명품 카멜레온 젤리도 차차 개발되어 곧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필요한 일은 거의 다 한 듯하다.
나는 남은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왼팔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피부와 거의 흡사한 질감이 놀라웠다.
‘좋네.’
이제 언제 소맷자락이 올라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그 징그러운 걸 보일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젖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에 젖어도 괜찮고 얼마나 편안한지 모른다.
팔에 붙어 있다고 해서 무겁거나 답답하지도 않았다. 슬라임의 체액이라는 게 생각보다 여러모로 장점이 있었다.
팔을 걷고 다닐 수 있는 사실이 제일 좋았다.
‘다만 불에는 약하다고 했지.’
그럴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이나 뜨거운 열기에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프릭이 아직 시작품이라고 했으니 곧 열기에도 강한 제품이 나오긴 하겠지만.
나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아빠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빠.”
“왜?”
“오늘 바빠요?”
“나는 늘 바쁘다.”
묻기가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같이 있기 싫은가 싶은 생각에 입술이 절로 툭 튀어 나갔다.
‘요 몇 달 계속 이상하게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는 거 같단 말이지.’
정확히 자르단 마을을 다녀온 뒤부터 그랬던 것 같다.
“아, 그렇구나. 알겠어요.”
“…왜?”
“아, 바쁘신데 괜찮아요.”
“내용에 따라 시간이 날 수도 있고….”
이 아저씨 정말 구질구질하게 구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고개를 홱 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아버지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오라버니한테 말해 볼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
“네?”
“생긴 것도 같군.”
“…갑자기요?”
내가 황당하다는 듯 반문하자 그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왜, 뭐 문제 있나? 원래 있던 일이 생각해 보니 내일로 미뤄진 걸 깜빡했군.”
뒤에 서 있던 페드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어깨를 바르르 떨고 있었다.
웃긴 건지 아니면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의 산이 슬픈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확실한 사실은, 그의 머리가 양옆으로 작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뿐.
“정말요?”
“그래,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요.”
“뭐냐고 묻잖니.”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뺨을 긁적였다.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빠, 저랑 쇼핑 가지 않으실래요?”
별것 아닌 제안인데 괜히 뺨이 절로 붉어졌다.
그가 진짜 아빠라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이런 제안도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죽기 전에 추억 하나쯤은 남기고 싶으니까.’
평생 부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그리워서, 애정이 그리워서, 칭찬 한 번을 그리도 원해서, 개처럼 실험당하며 미친 과학자에게 농락당했다.
‘일부러 잃어버린 게 아닌 줄은 알지만….’
그래도 조금은 속상하고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뭘 하자고?”
“그, 쇼핑이요. 근데 역시 바쁘시면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벌써 정오다.
아무리 빨리 나갔다가 들어온다고 해도 수 시간은 훌쩍 지날 텐데, 그러면 일을 거의 못 할 것이다.
“…좋다.”
“괜찮으세요?”
“오늘은 바쁘지 않다고 했을 텐데. 생각해 보니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도 같군.”
페드로의 어깨 떨림이 뚝 멈췄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지금의 페드로는 울먹거리는 중이고, 아까의 페드로는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가자.”
그가 바로 새하얀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저택을 벗어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수도의 부티크 샵이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느껴졌다.
저번에 왔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년은 온갖 연회와 데뷔탕트의 장이거든. 바쁠 때가 됐지.”
“데뷔탕트….”
그러고 보니 내 또래의 어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들도 많이 보였다.
“근데 뭘 사려고 나오겠다고 한 거지?”
“합성 마석 동향을 살펴보려고요. 물론, 아빠가 잘 팔아주고 계시지만요.”
“그래, 요즘 상단 거래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품목이 네가 개발한 합성 마석이다.”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잘했더구나.”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뺨을 슥슥 문질렀다. 조금 부끄럽다.
“근데 오늘 나오자고 한 건 합성 마석 때문만은 아니에요.”
나는 거리에서 가장 화려해 보이는 남성용 매장으로 아빠를 슬쩍 잡아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반듯한 정장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디자인의 제복,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아빠가 합성 마석을 잘 팔아주고 그 돈을 전부 내게 꽂아준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 돈이 생겼다.
그래서 사실 자르단 마을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문을 맡겨둔 것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맡겨둔 거 찾을 수 있을까요?”
“오, 아가씨 오셨군요. 물론입니다. 여기 다 잘 준비해 두었습니다.”
매장 주인이 창고 같은 곳에서 세 개의 상자를 꺼내 와 내 앞에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잠시 보고 계시면 포장 준비를 해서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나는 멀어지는 주인을 보며 장식장 위에 올려진 상자를 보았다.
이 남성용 매장은 여러 가지 옷을 팔기도 하지만, 품질 좋은 보석으로 만든 브로치 같은 것도 팔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녹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보석이 박힌 커프스 링크 두 개와 브로치 하나가 있었다.
이건 프릭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 하나였는데, ‘공명석’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공명해서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보석이었다.
“이건 ‘공명석’이라는 건데 아직 상용화되진 않은 거예요.”
“공명석?”
“네, 제가 데려온 과학자 프릭 박사님이 만든 거예요. 커다란 공명석 하나를 여러 조각으로 쪼개서 가공하면 다른 조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줘요.”
“그런 기능을 가진 보석이 있나?”
“네, 가까워지고 있으면 공명석이 점점 세게 진동하고 멀리 있으면 공명석이 점점 약하게 진동해서 잃어버린 사람도 찾을 수 있어요.”
“…너는 참 신기한 걸 많이 만들어내는군.”
“프릭 박사님이 한 거예요. 그래도, 아빠에게 가장 먼저 주고 싶었어요.”
나는 커프스 링크가 담긴 상자를 하나 들어 아빠에게 내밀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