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뭐?”
세상일의 대부분은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솔직히 예측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예측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비껴가거나 어긋나서 모두가 알아보는 일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그놈이 타깃으로 삼은 건 너잖아.”
“그렇긴 하지만, 다른 타깃이 있을 수도 있잖아. 굳이 타깃이 나 하나뿐이지는….”
그림자가 나를 오묘한 눈으로 보았다.
그림자 인형 같은 새까만 몸체에 유독 예쁜 황금색 눈알 두 개만 박혀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 오싹했다.
나를 전부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하나뿐이야.”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허가 강력한 권능을 타고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무적은 아니다.”
허공을 걸어온 그림자가 내 앞에서 또 거꾸로 매달렸다.
왜 자꾸 거꾸로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뭐, 나도 이 눈을 찾고서야 공허에 대해 조금 떠올렸으니 넌 모를 수도 있겠군.”
그림자가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공허의 타깃은 오로지 한 명이다. 즉, 그 낙인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의 타깃이라는 거지.”
그 말은, 내가 진짜 샤콜 오브리의 딸이라고?
말도 안 돼.
나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아니, 물론 어릴 적의 기억이니까 당연히 그렇긴 하겠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네가 추측한 게 정말 사실일 때의 얘기다. 뭐, 세상에 보라색 눈동자를 초록색 놈의 핏줄만 가진 것도 아니잖아?”
“맞아, 내 눈은 너랑 다르게 공허처럼 보이진 않잖아.”
“덜 뺏긴 거겠지.”
그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 않은가.
“그건 또 무슨 소린데?”
“글쎄, 네 몸이 실험 때문에 망가져 있었다며? 온전하지 않은 것을 가져가 봐야 흠집만 남을 뿐이잖아.”
공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특별함’이라며 덧붙인 목소리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러니까 네 눈에 그때 실험의 영향으로 무슨 문제가 생겨서 놈이 일부를 버렸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
“그 증거로 네 눈동자는 마치 색채를 잃어버리다 만 것 같잖아. 그래, 투명해지기 직전의 아주 옅은 회색빛이지.”
그림자가 내 눈을 찌르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짝 제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봐, 간신히 눈동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색소만 남은 느낌이란 말이야.”
어디서 났는지 허공에서 생겨난 구멍에서 거울을 꺼낸 그림자가 내게 그것을 들이밀었다.
늘 색소가 옅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냥 특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빠 딸이라고….”
말도 안 돼.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침대 위에 몸을 웅크렸다.
“아니, 애초에 이게 어떻게 가능해? 게다가 난… 녹의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
내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자 지루하다는 듯 허공에 드러누운 그림자가 지팡이를 던졌다가 받으며 나를 힐끔 보았다.
“그것도 뺏긴 거 아냐?”
“뭐? 그걸 대체 누가 빼앗…, 아….”
아니, 딱 한 명 있지.
자신이 샤콜 오브리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아니었다면 어렵지 않게 이 자리를 차지했을 이 세계의 주인공.
“…셰키나.”
아까 만난 그 아이는 보라색 눈동자에 녹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게 정말 내 거라면….’
나는 뭘 원해서 저 말도 안 되는 녀석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이런 꼴이 된 거지?
“난 대체 왜….”
“글쎄, 겨우 눈동자 하나만 되찾은 탓인지 내 기억도 꽤 모호해. 나도 왜 그랬는질 모르겠거든.”
그림자의 말에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수백 번 죽었다 다시 태어날 동안 얻지 못한 실마리를 네 덕분에 얻었어.”
그림자가 이를 드러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어찌나 형형하게 빛나는지 당장 검을 뽑아서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놈만 족치면 돼. 그놈을 죽이면 너나 나나 이 족쇄에서 해방이야.”
그림자가 새까만 제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왼쪽 어깨까지 올라와 아예 왼팔을 뒤덮은 빼곡한 글자를 보았다.
“내가 아닐 확률은 없는 거야?”
“희박하다고 봐야지.”
“내가, 아빠의 진짜 딸이라고….”
이 무슨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 다 있는지.
간신히 만난 부모에게 스스로 진짜 딸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다는 게 뱃속이 뒤집힐 정도로 괴로웠다.
“왜? 좋은 거 아닌가? 넌 드디어 죄책감 따위 없이 합법적으로 네 아비 곁에 함께할 수 있는 거니까.”
“…합법적으로? 어떻게? 내가 앞으로 몇 년 뒤에 죽을 시한부 인생입니다, 하고 밝히라고?”
간신히 찾은 딸이 웬 저주 때문에 죽어간다는 사실을?
집안이 발칵 뒤집히다 못해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말 못 해….”
도대체 몇 번이나 그들 심장을 부수란 말인가.
“일이 만약에 아주 잘 해결되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때 말해 볼래.”
아마 그럴 확률이 그렇게 높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차마 그 말은 채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켜냈다.
그림자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내 입장에선 꽤 심란했다.
나는 짧게 숨을 뱉었다.
“자르단 마을은 놈의 먹이 저장소 중 하나였겠지. 공허들의 권능은 강대하지만, 권능 사용에는 항상 대가가 따르거든.”
그 때 그림자가 손 위로 시커먼 구슬들을 만들며 말했다.
그는 무슨 광대처럼 구슬 여러 개를 허공에 받고 던지기 시작했다.
“근데 그 대가를 스스로 내고 싶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분산시킨단 말이야. 그게 먹이 장소야.”
마을 하나를 그런 용도로 쓰다니 대단하기도 하다.
“놈들은 욕망을 품은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그 원혼이 가득 담긴 저주를 걸 매개체, 그러니까 그 남매의 어미의 시체 같은 것을 받는 거야. 그걸로 먹잇감을 모아서 그들의 생명력을 빼앗고.”
원혼이 가득 실린 매개체를.
덧붙이는 목소리에 나는 이불 속에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얘기를 듣다 보니 머리도 아프고 무척 피곤해졌다.
내가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이자 그림자가 “쳇.” 하고 혀를 차더니 포르르 내려와 내 옆에서 쿨쿨 자는 체스의 털 속에 꾸물꾸물 파묻혔다.
“야, 우리 체스한테 뭐 해?”
“내가 이래 봬도 꽤 추위를 타거든. 이 짐승의 털은 아주 따뜻하군.”
추위를 탄다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게다가….
“…너, 그림자잖아. 근데 추위를 탄다고?”
“실례군. 내가 비록 그림자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안쪽은 사람이다.”
아, 그랬지.
형체가 그냥 노이즈처럼 처리되어 있을 뿐이다. 민망함에 입을 다물자 그림자가 마저 체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앞발과 뒷다리 사이에 푹 파묻혀 얼굴만 빼꼼 드러난 꼴이 퍽 웃기기도 했다.
“이름이 뭐야?”
“글쎄,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도 빼앗긴 거야?”
“빼앗겼는지, 원래부터 없었는지 모르겠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선 별 의미도 없는 일이지.”
푹신한 털에 파묻힌 그림자를 보던 나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매번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한 일이고.
“셀렘은 어때?”
“뭐?”
“셀렘 말이야, 어떠냐고. 네가 그림자도 아닌데 그림자라고 계속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아.”
체스의 가슴 털에 얼굴을 파묻었던 그림자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몸을 돌리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게 이름을 주겠다는 건가?”
“비슷하지, 임시 이름이야. 그림자라고 불러도 상관없으면 난 괜찮지만.”
“나는 그림자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림자가 내게 다시 따지고 들었다.
“그래서 이름 준다니까?”
아이씨, 정말 따지는 것도 많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서 그냥 됐다며 포기하려는 때였다.
“그거 고대어가 아닌가. 셀렘. 그림자라는 뜻이지.”
어, 들켰다.
그래도 그림자와는 발음이 달라서 있어 보이기에 한 말인데.
“싫으면 말고….”
내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그림자가 다시 꾸물꾸물 몸을 돌려 체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별로였나….’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감으려는 때였다.
“뭐…, 딱히 싫다곤 하지 않았지만….”
정말 귀찮다.
이놈의 솔직하지 못한 인간들.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셀렘.”
“…딱히 맘에 든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쩌라고, 인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