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30)

<57화>

“네 몸이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네가 그 고대어에 먹힌 거?”

내 질문에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진짜 무섭다.

솔직히 생각해 보면….

무슨 달걀귀신도 아니고 새까만 몸과 얼굴 위에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선한 황금빛 눈동자만 반짝거리고 있다고.

진짜 바라보고 있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너 그 글자가 전신을 덮는 과정을 기억하나?”

“…기억하지.”

글자가 얼굴까지 뒤덮었을 때 나는 죽었으니까 말이다.

“한 번에 하나. 네가 새 삶을 얻을 때마다 무언가가 사라졌을 거다.”

“…무언가가 사라졌다고? 딱히 잃어버린 건 없는데.”

나는 전신을 한 바퀴 돌아봤다.

뭔가 두고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실에서 봤던 그림자처럼 글자 안쪽에 피부가 아닌 노이즈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이 눈을 찾을 때까지는 그걸 몰랐어.”

“…뭐?”

“내가 이 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몰랐다고.”

덧붙이는 목소리에 몸이 살짝 굳었다.

그 말은 즉,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게 갑자기 무슨 변화인지 모르겠군.”

그림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감격에 빠진 그림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침대에서 내려가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바깥은 여러모로 소란스러웠다. 저주가 사라졌으니 또 뒤처리할 것들이 남은 거겠지.

‘잘한 건지 모르겠다.’

본래 죽어야 했던 사람들이 결국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차라리 그 애에겐 이게 더 나은 복수일걸?”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싱글벙글 기분 좋아 보이는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더 나은 복수라고?”

“그래, 저주가 남긴 흉터는 쉽게 치료할 수 없거든. 저놈들은 평생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보기 싫을 정도의 끔찍한 흉터와 몰골을 끌어안은 채로 말이야.

그림자가 말을 덧붙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눈이 생겼기 때문일까?

원래는 그냥 좀 음침한 놈 같았는데 이제는 눈에 음흉함까지 서려선 확실히 나쁜 놈 같은 느낌이었다.

“뭐, 네 아비의 힘이라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빠가?”

“응. 하지만, 그 초록색이 그렇게 분별없이 정의감 넘치는 인간은 아니잖아?”

그건 맞는 말이지.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능력을 쓰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아마 아빠도 많은 걸 겪고 난 뒤에 정한 규칙이 아닐까 싶었다.

“이번 일이랑 관계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방금 꿈에서 뭔가를 봤어.”

“그게 뭔데?”

“처음에는 시먼의 기억이 꿈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그게 만약 시먼의 기억이었다면, 그 꿈에 뜬금없이 나타났던 그 천사 같은 소년이 자아를 가졌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의 기억을 봤느냐, 이건 명확했다.

시먼이 아니라면 내 꿈에 등장한 사람은 잠을 자고 있던 시먼의 여동생, 미사와….

그리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던 그 천사 같은 소년뿐이니까.

“나 그것과 비슷한 눈동자를 꿈에서 본 것 같아.”

“…꿈에서 봤다고?”

“정확히는 그 눈동자를 가진 소년을 꿈에서 본 거지만.”

그림자의 동공이 한껏 확장됐다.

확실히, 눈이 생기니까 조금 더 감정을 알기가 쉽다.

“소년…이라면, 어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은발을 가지고 있는, 보면 바로 홀려버릴 것 같은… 엄청 예쁜 애였는데….”

천진하게 웃는 모습이나 새하얀 피부 같은 것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이나 혹은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

“은발….”

그림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은발, 은발… 은빛, 머리카락….”

침잠하는 눈동자 사이로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내 거야.”

그림자가 말했다.

“그 머리카락, 내 거야. 내 거였어. 내 거였던 것 같아.”

제 머리를 감싸 쥐고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그림자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봤어!”

그림자가 내게 달려들었다.

작은 몸으로 내 멱살을 붙잡는 게 너무 하찮아서 말문이 막혔다.

“내 몸, 어디서 봤느냐고!”

“그러니까 꿈에서 봤다니까….”

내가 그림자의 뒷덜미를 붙잡아 떼어내자 놈이 내 손에서 힘없이 덜렁거렸다.

내가 그 소년을 만난 얘기를 천천히 해주자 그림자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래, 그놈이 대가를 치른 거야!”

“저주에 실패하면 돌아간다는 대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네 몸을 누군가에게 뺏겼다는 거지?”

“너도 마찬가지일 거다.”

“나는 대체 뭘 빼앗긴 거지?”

“네가 본 그건 아마도 ‘공허의 악마’일 거야.”

공허가 뭔데.

판타지 세상엔 정말 진짜 왜 이렇게 어려운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종족도 많지, 있어 보이는 이름도 많지. 아무리 내가 판타지 소설 마니아였다곤 해도 이제 좀 질린다.

“고대 악마 중 하나야. 어떻게 생겨나는지도 모르고 인지할 수도 없어. 모습도 숨결도 공기도 느껴지지 않거든.”

그림자는 내 질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신 한 가지 강력한 권능을 가진 놈들이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내가 본 그 애는 존재했어.”

확실히 눈에 보였고 인식했다.

심지어 시먼은 그와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래, ‘보통은’ 존재하지 않는 거다.‘공허의 악마’가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서 뭔가를 뺏어야 하지.”

“뺏어?”

어려운 내용이 쉬지 않고 나와서 그만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 정말로 기절하고 싶기도 했고.

“악마의 계약과 비슷해. 소원을 들어주고 그놈은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하나 빼앗아 온다.”

“…아.”

“그게 존재이든, 눈이든, 피부든, 어느 것이든 간에.”

그림자의 설명에 나는 그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내게는 정말 한없이도 먼 이야기라서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놈에게서 내 눈이 사라질 때 넌 뭘 봤지? 내 눈이 사라지고 남은 게 바로 ‘공허’ 아니었나? 그때 내 몸에서 봤던 그 노이즈 같은 거.”

“아냐….”

‘공허’라는 것이 저번에 그림자의 팔을 잡았을 때 보았던 텅 빈 팔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꿈속 소년의 황금빛 눈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보라색 눈동자였어.”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뭐?”

“거기에 있던 건 그 노이즈 같은 공허가 아니라, 보라색 눈동자였다고.”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상한 일이군. 빼앗은 것을 다시 뺏기면 ‘공허의 악마’에게 남는 것은 공허뿐이어야 하는데.”

그림자가 의아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생존해 있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인물.

“그 보라색 눈도 누군가에게서 뺏어 왔을 확률이 있어?”

내 물음에 그림자가 놀랍다는 듯 나를 흘긋 보더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가능하지.”

“가능하다고?”

“공허에 대해서 알려진 건 많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놈들이 몸을 바꿔 끼우며 살아간다는 사실이지.”

내 말에 그림자가 대답했다.

머릿속에 순간 전구가 번뜩였다. 어쩐지 실마리를 하나 잡은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그 눈동자 말이야. 아빠, 아니…. 샤콜 오브리의 진짜 딸에게서 뺏은 건 아닐까?”

“…뭐라고? 그 말 진심이야?”

그림자가 설핏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한데, 그럴 수도 있잖아. 그 눈동자 색, 어쩐지 아빠랑 비슷하게 느껴졌거든.”

애초에 거짓일 건 또 뭐가 있겠는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추측이 맞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공허의 악마’라는 놈을 붙잡으면 분명히 샤콜 오브리의 진짜 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애까지 찾는다면 은혜 갚기는 차고 넘치게 하는 거지.

솔직히 감사패에 평생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할 정도지만,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너 네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건가?”

“내가 한 말에 의미까지 있어야 해? 나는 그냥….”

“너 지금 네가 그 초록색의 진짜 딸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데.”

그림자의 말에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뚝 다물렸다.

“…뭐?”

그리고 그대로 멍청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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