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무례하군.”
휙, 타악-!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뻗어 온 부채가 매섭게 허공을 가르는 도축용 칼을 가볍게 막았다.
로사나가 선물해줘 샤콜 오브리가 들고 다니는 부채 중 하나였다.
샤콜 오브리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부채로 칼을 막아 세운 그가 그대로 힘을 줘 칼을 쳐냈다.
칼을 쥔 소년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사뿐하게 바닥에 착지하더니 다시 달려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네 동생 무사해!”
달려오던 소년의 몸이 중간에 뚝 멈췄다. 갑작스러운 급제동에 샤콜 오브리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내가 손에 쥔 머리핀을 보여주자 소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미사를 어떻게 알지?”
“그게, 나는 아빠랑 삼촌 따라서 여기에 돌고 있는 역병을 없애러 왔는데, 이 마을 끝에 있는 집을 숙소로 받았거든. 근데 거기에 그 애가 와서 자기 집이라고 하더라고.”
“…아, 미사.”
짧게 탄식을 흘린 소년이 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방해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곧장 돌아가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건 괜찮아, 원래 너희 집이었다며.”
“…그걸 믿습니까? 이런 꼴을 한 고아들 말을?”
“그럼 여동생이 거짓말을 한 거야?”
내 말에 소년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차마 제 동생이 거짓을 말했다고 할 순 없는 모양이다.
“…….”
“있잖아, 나 알려주면 안 돼?”
“뭘요.”
소년이 자루를 갈무리하며 물었다.
갓 잡은 짐승이라도 들었는지 자루 아랫부분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근원.”
“그게 뭡니까?”
“이 병의 근원. 너는 어디에서 이게 흘러나오는지 알고 있잖아.”
내 말에 소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루를 묶던 손이 멈췄다.
“…….”
소년이 다시 자루를 꽉 맨 뒤 그걸 어깨에 걸쳤다.
“그쪽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 마을에서 벗어나게 해줄게.”
“…….”
“마을 사람들은 벌을 받을 거야.”
내 말에 소년이 픽, 웃었다.
“벌? 지금 저놈들이 받는 게 벌이야. 지하 감옥에 가둬서 배부르게 밥 먹이며 살게 하는 게 벌이 아니라.”
분노에 가득 찬 소년의 눈에서는 불이 뚝뚝 떨어졌다.
잔잔했던 눈동자에 숨겨진 것은 지독한 고통이었다.
“대부분은 아무 혐의가 없다고 하겠지. 마을 사람 중 몇이나 그 잘난 벌을 받을 것 같아?”
“…….”
“지금 보라고! 전부, 전부 고통받고 있잖아. 나와 미사만 빼고! 이게 신께서 주신 벌이 아니고 대체 뭐겠어.”
소년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치는 소년은 언뜻 희열에 찬 것처럼 보이면서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는… 모두 이대로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미사도 그걸 바라?”
“…….”
“너희 어머니는? 나는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아서.”
순간 소년의 눈에 불이 붙었다. 아마도 그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수도에 간다면, 너희 남매의 의식주와 안전을 보장해 주지. 실력이 나쁘지 않은데 원한다면 기사단을 추천해 줄 수도 있다.”
그 때 샤콜 오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냉정하고도 빠르게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무슨 비리가 있었는진 몰라도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제대로 처벌하도록 하겠다.”
“…내가, 귀족 따위를 뭘 믿고….”
소년이 한 꺼풀 꺾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빠는 네가 생각하는 귀족과는 달라.”
“…….”
“내가 널 지켜줄게.”
내가 손을 내밀자 소년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네 어머니를 죽인 원수도, 네 어머니를 매개로 네게 지독한 제안을 한 사람도.”
“…너.”
속삭거리듯 입술을 달싹이자 소년의 눈이 크게 떨렸다.
“날 도와줄 수 있어?”
“…아마도.”
이 저주의 근원이 밝혀지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였지만 나는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
“난 아네트 오브리야. 너는?”
“시먼…, 시먼… 카트라.”
“응, 시먼.”
조금 더 손을 내밀자 시먼이 엉거주춤 뻗은 손으로 내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도와줘.”
곧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얘기해 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적이 드문 숲 안이야말로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시먼이 고개를 끄덕이곤 내 손을 잡은 채 몸을 돌리더니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손을 잡은 채 샤콜 오브리와 아데우스 공작과 함께 시먼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 집은 대대로 ‘조언자’였습니다. 촌장이 있고….”
“그 전에.”
막 시먼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때, 샤콜 오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내 딸 손을 잡고 있을 생각이지?”
“아….”
시먼이 당황한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다. 샤콜 오브리가 그제야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촌장에게 조언하고 한 해의 농사에 대해 점을 쳐주며, 과일이나 농산물의 수확 시기를 알려주는….”
시먼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조금씩 재산을 불리고 먹고사는 가문이었습니다.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걸어가던 시먼이 어딘가에서 멈췄다. 수풀과 짚으로 뒤덮인 바위 앞이었다.
“어머니는 뛰어난 ‘점성술’을 가지고 계셨고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습니다. 다만, 점성술에도 제약은 있습니다.”
시먼이 엉성하게 덮인 수풀과 짚을 두 손으로 걷어내며 말을 이었다.
“점술사는 스스로에 대한 미래 예지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덥수룩하게 덮여 있던 수풀을 치우자 드러난 것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작은 바위였다.
바위 아래로는 땅이 있었는데, 묘하게 갈라진 흔적이 보였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이상하게 마을 사람들 손에 금붙이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 마을은 그렇게 풍족하지 않은데요.”
시먼이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지 헛웃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라진 뒤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해, 이번에는 여동생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분을 삭이기 위함인지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미세한 틈새 사이로 손을 욱여넣기까지 했다.
“미사까지 잃을 순 없었기 때문에 저는 필사적으로 그 애를 찾았어요. 그리고 마침내, 마을 곳간에서 막 실려 나가던 그 애를 발견했습니다.”
드르륵, 드륵.
바위가 서로 긁히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틈새가 서서히 벌어지더니 마치 문처럼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이를 악문 시먼의 잇새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어딜 잘못 맞았는지 머리엔 피를 흘리고 있는 그 애를요.”
“…힘들었겠네.”
“나는 그 애를 지키려고 했어요. 맞아가면서 그 애를 안고 마을 밖 숲으로 도망쳤죠. 그런데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어머니를 귀족에게 팔았던 겁니다! 긴히 점술을 보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다는 제안을 하면서요!”
그래, 소설 속에서도 이 이야기의 전말은 생각보다 슬픈 것이었다.
“어머니는, 은화 몇 푼에…. 그놈들이 금으로 된 장신구를 받아먹으며 어머니를 팔 때, 어머니는 겨우 은화 몇 푼 때문에…!”
퍽!
시먼이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건 결국 인간의 탐욕이 불러낸 일이었다. 점성술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가 죽으며, 원혼을 남겼다.
원혼이 남은 곳에는 강한 음기가 생기곤 한다. 그리고 그 음기를 누군가가 악용했다.
그래, 악용해서 그 음기와 원한을 사용해 결국 저주를 만들었다.
다만, 귀찮게도 이 저주라는 것은 근원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정화’의 힘을 가진 아르고 공작이 저주를 정화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근원지를 모르니 처리할 수 있었을 리가.
“그 전날, 내가 고기를 먹고 싶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생각 하지 마, 고기가 먹고 싶었을 수도 있지.”
“나만 아니었어도 어머니는….”
시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숙였다. 활짝 열린 바위로 된 문 아래로 길게 늘어진 돌계단이 보였다.
“어머니는 분명히….”
살 수 있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건 네 죄라고 할 순 없군.”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샤콜 오브리가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시먼이 무릎을 꿇은 모습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네 어미는 결국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아냐, 아니야…. 내가 아니었으면….”
“자식에겐 무리해서라도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지는 게, 결국은 부모의 본능이니까.”
시먼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도 샤콜 오브리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뭐지?”
“의외라서요.”
“뭐가?”
“아빠는 뭔가 팔짱 끼고 서서 알아서 하라고 할 것 같아서요?”
“넌 날 대체 뭘로 보고 있는 거지?”
오만한 나르시시스트.
…라고 말하면 혼나겠지.
“아빠죠.”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그가 영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입구예요.”
정신을 차린 듯 시먼이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
“네, 뿌리가 있는 곳이요.”
대답한 시먼이 먼저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시커먼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