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30)

<52화>

파사삭, 파사삭.

풀숲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고양이, 인가?’

꿀꺽, 침을 삼키며 슬쩍 풀숲으로 향하는 때였다.

풀숲에서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내 몸을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렇게 강하게 던져진 게 아니라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갑자기 돌멩이가 튀어나오니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다.

“누구, 있어요?”

툭-!

대답 대신 또 한 차례 돌이 던져졌다.

성큼성큼 다가가 풀숲을 두 손으로 확 열어젖히자 예상치도 못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였다.

잔뜩 움츠러든, 나와 비슷한 또래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어쩐지 무척 작게만 느껴졌다.

아이가 나를 흘긋 보더니 흠칫 어깨를 떨었다.

꼬질꼬질한 피부와 뺨, 낡아서 다 해진 옷, 그리고 제대로 씻지 못한 듯 떡 진 머리까지, 아이는 몰골이 꽤 엉망이었다.

또래 같기는 한데 나보다 작고 조금 말이 어눌해 보이기도 한다.

“안녕? 아가.”

“…….”

“여긴 어쩐 일이야?”

“여기, 우, 우리 집이야…. 나, 나가….”

내 말에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내게 던지기 시작했다.

“아야, 아, 아야. 아파!”

“나, 나가아아, 여긴 우리 집인데… 마마랑 오빠랑 미사 집인데….”

“여기가 너희 집이라고?”

인기척은 꽤 오래전부터 없어 보였다. 도저히 최근까지 누가 사용했다곤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 규모면 그래도 마을에서 좀 잘 살았을 거 같은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자세히 보니 옷이 꽤 좋은데.’

적어도 시중에서 기성품으로 파는 옷은 아니다.

입고 있는 사이 키가 자란 것인지 소매와 바짓단이 짧기는 했지만, 옷 자체는 꽤 고급품이다.

‘이 집의 주인이었다고?’

하지만, 촌장이 말하길 이곳은 사용하지 않는 빈집이라고 했다.

‘…어?’

자세히 보니 이 아이는 병에 걸린 흔적이 없다.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 마을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우물을 이용할 수 없었던 남매.’

이 아이가 그 남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언니는 촌장님이 여길 사용하라고 해서 온 것뿐이야.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니?”

“촌장, 나쁜 사라미에여…. 나뿐 촌장…. 나쁜 사라미….”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반사적으로 옷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뭔가를 묻는 것도 미안한 일이지.

“아가야, 혹시 이름이 뭐야?”

“미, 미사….”

“그래, 미사. 언니는 아네트야. 아네트. 혹시 오빠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 언니가 오빠 데리고 올게.”

“오빠아아….”

뭐가 또 서러운지 오빠라는 단어에 아이가 기어코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여, 여기가 너희 집이면 여기에 네 방도 있어?”

엉엉 울어젖히기 시작한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는 다급히 손가락을 뻗어 집을 가리켰다.

“훌쩍.”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네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수 있어? 언니가 오빠 찾아서 어떤 일인지 물어보고 도와줄게.”

나는 애써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관계가 틀어지면 안 돼.’

어떻게든 오빠 쪽이 애지중지 여기는 여동생의 마음을 사야 했다.

여기서 아이들의 호감을 얻어야 이유는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만이 저주의 근원이 있는 ‘우물’의 어떤 장소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도, 도와여…?”

“그래, 도와줄 수 있어.”

“오, 오빠는… 어, 마을 밖에서여 마싰는 걸 가져온다고 해써여…!”

“그랬구나. 그럼 이제 네 방에 가서 쉬고 있을 수 있지?”

“네…!”

“누가 보냈냐고 하면 이걸 보여주면서 예쁜 언니가 여기로 가라고 했다고 하면 돼.”

나는 예전에 샤콜 오브리에게 받은, 녹의 문양이 새겨진 씨앗 목걸이를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네!”

“언니는…, 이걸 잠깐 빌려 갈 수 있을까?”

나는 아이의 엉망인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진 오래된 머리핀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거, 엄마가 미사 준 건데….”

“응, 다시 예쁘게 닦아서 가져다줄게.”

“진짜여?”

“응, 진짜로. 오빠만 찾으면.”

아이가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손으로 제 머리에 꽂힌 머리핀을 투둑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뜯어냈다.

“…어.”

엉킨 머리와 함께 잘 풀어주려고 했던 내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휘저었다.

“요기….”

“어어, 고맙다.”

후두둑,

머리카락과 함께 손바닥 위로 떨어진 머리핀을 보며 나는 애써 웃었다.

‘이 친구 터프하네….’

터프해도 너무 터프해서 잠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 가도 대여…?”

“어, 그래. 근데 다른 사람들도 쓰고 있을 거라 너무 놀라진….”

타다다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바람만을 남기고 휑하니 사라졌다.

아까 왜 풀숲으로 숨어들 때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발이 엄청 빠르네….’

고양이보다도 더 재빠른 것 같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남매 중 오라비 쪽을 찾으러 마을 중심으로 향했다.

딱히 샤콜 오브리를 찾거나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거다.

“어차피 녹은 진짜를 찾았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가짜 따위.”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 망했네.’

하필이면 분위기 묘해지게 여기서 마주칠 건 뭔지.

나는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린 머리핀을 주우며 애써 웃어 보였다.

“…하하, 대화 중이셨나 보네요.”

“…아네트.”

서로 민망해지니까 그런 아련한 목소리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 아버지.”

“이건 그런 게 아니다.”

“네, 알아요.”

그런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대답이 썩 시원찮은 듯 샤콜 오브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만났구나.’

가짜지만 진짜 행세를 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으음, 저는 이만 볼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사실 샤콜 오브리가 정말로 그 아이를 원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 제 아이를 품고 가겠다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그 애가 이 남자를 죽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로사나 오브리에게 손만 대지 않았어도.

나는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를 버린다고 해도 결국 붙어 있을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귀찮아.’

정말 이럴 예정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수하고 자유롭게 사는 게 목표였는데….’

이건 뭐, 눈치채지 못한 사이 짐 덩이가 붙어버리지 않았는가. 그것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짐 덩이가.

“저기….”

내가 막 무슨 일 있었냐고 입을 열려는 때였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뒤쪽에서 아주 여리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떨어뜨리고 가셔서 가져다드리려고 왔는데….”

나를 포함한 두 공작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움직였다.

새하얀 뺨에 동글동글한 귀여운 눈매, 녹색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는 그래, 마치 샤콜 오브리의 축소판을 보는 것만 같았다.

“떨어뜨렸다고? 뭘 말이지?”

“아, 이 반지…. 아저씨들 거 아닌가요?”

갸웃하며 고개를 기울이는 소녀는 천진하고 무구하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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