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됐어, 넌 해결 못 해.”
집안의 가보인지 뭔지는 몰라도 해주가 가능했다면 진즉에 그 기록실에 있던 그림자가 시도해 봤겠지.
그는 나와 같은 저주에 걸려 있다고 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수십, 수백 번의 삶을 반복하며 제 몸을 야금야금 빼앗겼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해주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겨우 한 번에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는다.
“우리 가문의 가보라면…!”
그가 냉큼 목소리를 높였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상냥하신 록서 님께서 안 된다잖니.
“야.”
“…난 사브나크다. 너보다 나이가 두 살은 더 많다.”
“응, 그래서 어쩌라고.”
“너…, 원래 이런 성격인가? 아까는 생글생글 잘도 웃고 있더니….”
그거야 상대가 예의 바르게 굴거나 내가 어쩔 수 없이 을이 되어야 할 때뿐이지.
“너는 개한테도 체면 차리니?”
“개….”
그가 당황한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난 참고로 고양이파라서, 개는 싫어해.”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곤 몸을 돌렸다. 더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시간을 얼마나 버린 거야.’
사브나크와 꽤 오랜 시간 실랑이했다.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나 쐬기 위해 허름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순간, 무언가가 후다닥 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게, 뭐지?”
풀숲으로 후다닥 사라지는 무언가를 보며 나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
파사삭.
풀숲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
“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지셨길 바라요.”
퍽 앳된 목소리가 봄날의 햇살처럼 다정하게 내려앉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성녀님, 성녀님이 아니셨으면 저는 이미….”
“성녀라뇨, 과분한 호칭이에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임시 진료소로 차려진 허름한 천막 앞, 판상 위에 앉은 소녀가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이제 막 열 살, 열한 살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앳되고 작았다.
“…….”
“저 애는….”
샤콜 오브리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것과 흡사한 빛깔의 녹색 머리카락과 자신의 것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듯한 보랏빛 눈동자.
그 모습이 마치 오래도록 그리던 그 한 장면 같아서, 샤콜 오브리는 한참이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아네트….”
그의 입술이 멋대로 달싹거렸다.
아주 작은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서 흘러나오는 녹색 빛으로 사람들을 돌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
소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신가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쪽으로 줄을 서시면 되는데….”
“아니, 우리는….”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아서요. 무슨 용건이 있으실까요?”
따스하게 휘어진 눈동자와 다감한 앳된 목소리가 산뜻하게 내려앉았다.
“…….”
짧은 대화에서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한 아데우스 공작이 드물게도 샤콜 오브리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마이페이스로 사는 그라도 지금 마주한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황성에서 역병 해결을 위해 파견을 나왔다. 너는 누구지?”
샤콜 오브리가 한참 만에 냉정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활짝 웃었다.
“아네트, 아네트라고 해요. 부끄럽게도 고아라서 성은 없습니다.”
“…….”
쿵, 어디선가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
세 사람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네트, 라고.”
“네. 근데 환자분은 아니시죠?”
소녀가 푸시시 입가를 무너뜨리며 말했다. 샤콜 오브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들이 있는 뒤쪽을.
“그럼 죄송하지만, 잠깐 비켜주시겠어요? 제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많아서요.”
“…그러지.”
“감사합니다.”
샤콜 오브리가 한쪽에 선 채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분명히 녹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승계하지 않는 한, 오로지 그의 핏줄로만 이어지는, 녹의 힘을.
“그 힘은, 언제부터 사용할 수 있었지?”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사용할 수 있었어요.”
해맑게 웃는 소녀를 보며 샤콜 오브리가 고개를 돌렸다. 아데우스 공작의 표정도 살짝 굳어 있었다.
스스로를 ‘아네트’라고 칭하는 아이를 보는 아데우스 공작의 눈길이 묘했다.
“녹, 일단은 상황을 살펴야 합니다.”
“…알고 있다.”
샤콜 오브리가 몸을 돌렸다.
흘긋 뒤를 돌아보자 바쁘게 움직이던 소녀는 앉은 채로 허리를 엉거주춤 숙여 보였다.
한 바퀴 돌아본 마을의 상황은 꽤 심각했다.
마을에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하나같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이를 찾아볼 순 없었다.
“전염성이 생각보다 강한 걸지도 모르겠군.”
마을 전체를 감염시켰다면, 다른 마을에 퍼지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다.
당장이라도 봉쇄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이 역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
아니샤를 떠올리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가 봐도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 역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정말일까?
‘아니, 어쩌면 나와 같이 오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걸지도 모르지.’
애초에 알고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애가 허튼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위험한 일에도 적극적으로 발을 들이는 아이지만, 거짓말이나 허튼소리를 하진 않는다.
“녹.”
“뭐지?”
“방금 봤던 아이는 설마….”
일부러 주제로 삼지 않고 있는 내용을 꾸역꾸역 끌고 오는 아데우스 공작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네놈이 알 필요는 없다.”
“…저건 분명히 녹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샤콜 오브리가 섬뜩할 정도로 담담하게 반문했다.
“그래서라니….”
“저건 내 힘이 아니다. 저 아이가 타고난 성력인지 뭔지겠지.”
“…지금 데리고 있는 그 아이가 가짜인….”
흠칫, 샤콜 오브리의 살기등등한 시선에 아데우스 공작의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알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네놈은 내가 꼭 여러 번 말을 해야 이해를 할 수 있는 아둔한 뇌를 가지고 있는 건가?”
“지배자의 힘을 가진 아이를 방치할 순 없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지?”
샤콜 오브리가 아데우스 공작의 코앞까지 다가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바짝 얼굴을 들이댄 다음 숨죽여 입을 열었다.
“사방팔방, 그 애가 가짜였다고 말하라는 건가? 간신히 딸을 찾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아내에게도?”
“…자식이 아닌 아이를 진짜로 알고 있는 것보단 공작부인도 제 아이를 찾는 편이 더 기쁠 겁니다.”
아데우스 공작의 말에 샤콜 오브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네놈, 왜 남의 일에 참견이지?”
아데우스 공작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본인의 일도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처리하는, 제게 닥친 일도 귀찮아하는 사람이 바로 아데우스 공작이다.
남의 일에 이렇게 말을 얹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못 본 새 귀찮음이 사라지고 오지랖이 넓어진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는 아닙니다.”
아데우스 공작이 제 목덜미를 느리게 문지르며 대답했다.
“진짜 아이를 찾았다면, 지금 있는 아이는 갈 곳이 없어질 테니….”
그가 말끝을 끌었다.
“제가 데리고 가서 돌봐주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괴상한 소리지?”
“부모를 찾았다고 믿고 귀족으로 살아가던 아이를 다시 보육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콜 오브리가 쥐고 있던 부채가 단숨에 그의 목젖을 아프게 짓눌렀다.
아데우스 공작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 돌봐주고 싶다고 한 겁니다. 며느리로 들여도 좋겠고요.”
“네가, 아주 돌았군.”
“어차피 녹은 진짜를 찾았으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가짜 따위.”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하하, 대화 중이셨나 보네요.”
“…아네트.”
아니샤와 샤콜 오브리,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