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0)

<42화>

고대어가 처음보다 훨씬 더 짙어져 내 팔을 꽤 많이 뒤덮고 있었다.

나는 이 팔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며 살았다.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고대어가 늘어나 있는 팔을 보면 기분이 영 찝찝해지기 때문이다.

왼팔의 소매를 걷자 손목에나 조금 걸쳐 있던 문양이 이미 팔꿈치를 기준으로 아래쪽을 모두 뒤덮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이 작은 몸을 이렇게나 침식한 것이다.

‘대체 왜 그런 게 필요해?’

불쾌하고 불편한 이야기다.

- 침식은 록서를 볼 수 있는 권한. 즉, 주인님이 본래라면 누구도 볼 수 없는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기록서의 황당한 대답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침식이 심해진다는 게 그런 의미였어?

이 알 수 없는 고대어가 온몸에 퍼지면 결국 나는 죽잖아.

지금까지 알려준 정보는 결국 이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뤄진 거였네.

- …….

내 반문에 기록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무언의 긍정이라는 거겠지.

하긴 타인의 일생을 훔쳐보고 누군가의 미래를 아는 대가가 그렇게 가벼울 리가 없나?

‘…괴짜 과학자가 슬슬 정말로 연락을 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 연락이 없다는 건 내 편지에 답을 할 마음이 없다는 소린가?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와야지.

거기까진 귀찮아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젖혔다.

‘좋아, 가보자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다.

‘아니, 내 경우엔 두 번이긴 하지만….’

기껏 발을 들였으니 두 번째 삶의 마무리는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남은 7년 편안하게 탱자탱자 놀려면 그에 따른 준비도 필요하고 말이야.’

나는 가볍게 목을 문지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긴 어떻게 가면 돼? 그 새하얗고 텅 빈 곳. 새까만 그림자 하나와 책장 두 개만 덜렁 있었던 곳.’

내 물음에 기록서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 눈을 감고 그 장소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정말 성의 없다.

조금 피곤하기도 했던 터라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장소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생 그런 새하얗고 꺼림칙하면서 또 기묘한 느낌이 드는 공간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 오, 왔네.

이 ‘기록실’이라고 불리는 공간을 지키는 묘한 파수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그림자 형태의 그는 눈코입이 없어서 섬뜩한 느낌이었다.

- 이렇게 또 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 이번에도 기록을 읽고 싶은 모양이지?

그는 이미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물었다.

“…알면 얘기가 빠르겠네.”

웃고 있는 그림자의 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때는 없었던 붉은 혀가 보였다.

- 너도 대가에 대해선 들었겠지? 그날 그건 서비스였어. 첫 이용 서비스.

앞으로는 값을 치르고 허락된 한에서 원하는 만큼 읽고 가져가도 돼!

덧붙이는 목소리가 어찌나 신나게 들렸는지 모른다. 솔직히 다단계 하러 나온 사람 같았다.

어떻게든 사람 등쳐먹으려는 사기꾼들.

- 너 진짜 실례네, 정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림자의 목소리가 다소 짜증스러워졌다.

표정도 어쩐지 구겨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얼굴이 없으니 뭘 알 수가 없었다.

- 침식이 썩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너한테도 도움이 된다고 자부하지! 왜냐하면, 침식은 네 억눌려 있던 재능을 꽃피울 테니까.

재능?

갑자기 무슨 재능을 말하는 거지?

내가 가진 재능이라고 해봐야 별 시답지 않은 것들뿐이다.

보육원에서 필사적으로 배우고 미친 과학자의 수발을 들면서 몸소 체험했던 것들.

- 뭐야, 몰랐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림자가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 반문에 그림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 뭐, 조만간 이 세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알게 되겠지.

그림자가 키득키득 웃으며 훌쩍 물러났다.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 양쪽에 책장 두 개가 나타났다.

- 아니, 이미 시작됐을지도.

여전히 한쪽은 질릴 정도로 새하얗고 또 한쪽은 불쾌할 정도로 새까만 책장이다.

흑과 백이 뒤섞인 익숙한 책 한 권이 내 앞으로 두둥실 다가왔다.

나는 그 책을 받아 들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넌 대체 누구야?”

내 물음에 그림자가 웃었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허리를 꺾어가며 웃음을 터뜨린 놈이 이윽고 이를 드러냈다.

유쾌하다는 듯이.

- 나…, 핫, 내가 궁금한 거야? 내가 누구냐면, 그러니까 나는….

그림자가 아주 오래된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듯 주먹으로 제 머리를 퍽퍽 치더니 시뻘건 입을 활짝 벌렸다.

- 너랑 같아!

나랑 같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여? 새까만 먹물을 뒤집어쓴 모습? 아니면 그림자가 떨어져 나간 모습? 그것도 아니면….

그림자가 말끝을 느리게 끌었다.

- 네 말로(末路)?

그의 말에 숨이 절로 멈췄다.

이 그림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거다.

“설마….”

나는 그림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 봤을 때는 온통 새까매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하얀 방에 있는 새까만 존재.

인간이라고 하기보단 그림자 같은 것이 어디서 떨어져 나와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앞뒤가 맞지 않는가.

‘하지만 만약 이게, 이 고대어가 빼곡하게 온몸을 덮은 결과라면?’

내게 주어진 말로라고 해봐야 죽음뿐인데, 사실 그건 ‘말로’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이 그림자는….

“너, 나와 같은 저주에 걸린 거야?”

내 말에 그림자는 기특하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 그래, 나는 너와 비슷한 존재야.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내 저주도 너처럼 아주 작은 점에서부터 시작했지.

나는 그림자를 급히 붙잡았다. 그러자 내가 붙잡은 팔목에 있던 글자들이 전부 도망갔다.

피부가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 그래도 가장 가까운 말을 찾자면… 가끔 TV에서 나오는 지지직거리는 화면의 노이즈.

그래, 그것에 가까웠다.

- 아, 얘네 네가 싫나 봐. 아마 동족 혐오 같은 건가?

그림자가 신기하다는 듯 읊조렸다.

“그럼 넌 지금, 살아 있는 거야? 어디에?”

섬뜩한 느낌에 뒤로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 글쎄, 내가 살아 있나?

그림자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는 그 스스로도 자신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 짐작할 수 없는 존재처럼 굴었다.

- 몰라, 이미 잊어버렸어! 대신 난 세계의 이야기를 전부 알거든. 내일 네가 무슨 일을 겪을지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아.

그게 즐거운 일일까?

미래를 모두 안다는 말은 결국 긴장할 일도 즐거울 일도, 아무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니까.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 혹시 몰라?”

내 질문에 그림자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 나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모르는구나.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런 활자만 있는 세계에서 오랜 시간 혼자였을 걸 생각하니 속이 좋지 않았다.

- 괜찮아, 네가 이곳에 온다면 난 혼자가 아니니까.

그림자가 말했다.

“외로웠겠다. 줄곧 이곳에 혼자 있었으면…. 나라면 이미 미쳤을 거야.”

- 난 세상을 다 알아서 괜찮아.

“그렇게 알아도 넌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슬퍼한 적도 분명히 있겠지.”

- …….

“모든 걸 안다는 건 모든 일이 네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의미니까. 그건 아주 슬픈 일이잖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중 하나인 희로애락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런 의미다.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데도 잊힌다는 것은, 그랬다.

- …….

그림자가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손에 쥔 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책장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책장 넘길 때마다 침식이 더 심해지는 거야?”

내 물음에 그림자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네가 아는 정보가 세계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었을 때부터 시작되는 거야.

그림자가 설렁설렁 걸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 알겠어. 고마워.”

그가 나랑 같은 존재이자, 내 말로라고 생각하니 두려움도 적대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책장을 펼쳐서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파지직-!

몇 장 넘기지 않아 책과 내 손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 이게 겨우 몇 회차를 사는 네게 주어진 한계치야. 이제 세계는 대가를 받을 거야.

그림자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내 왼팔에 있는 문양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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