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내가 만드는 거 전부를?”
“응, 하지만 네가 주고 싶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거나 개인적으로 팔고 싶은 건 주지 않아도 돼. 뭣하면 제작되는 물품의 50~60%만 넘겨도 괜찮고.”
내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힐 이그나의 눈이 커졌다.
“비율은 물론 널 더 많이 챙겨 줄게. 나도 새로 시작하는 거라 훌륭한 파트너가 있었으면 했거든.”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대단한 걸 만들진 못할 거야.”
“만들 거야.”
그건 미래에서 보고 온 내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과거에서도 보고 왔겠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마력을 모아서 만드는 폭탄 같은 거야. 그리고 그건 마력을 다룰 줄만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어.”
힐 이그나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그건 네가 귀족이 아닌, 모두를 위한 무기를 만들기 때문이잖아.”
“……!”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난 그게 좋아. 소수를 위한 무기보단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무기가.”
내 말에 힐 이그나는 침묵했다.
“게다가 난 널 믿어, 왜냐면 너는 발명을 ‘즐기는 사람’이잖아!”
그는 생각하고 상상한 것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보단 즐기는 사람이 훨씬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즐기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결국은 반드시 빛을 볼 것이다.
인생은 등산과 마찬가지다. 평평한 길도 있지만, 굴곡이 있고 발을 딛기 힘든 험준한 길도 있다.
하지만, 넘어지고 쉬고 울면서도 결국은 꺾이지 않고 걸어간 사람만이 세상에 다시 없을 그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사진과 그림만으론 느낄 수 없는 그 경이로움을 손에 넣는 것이다.
“천천히 생각해 봐도 괜찮아.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널 지원할게.”
“…나도 날 못 믿는데, 너는 날 믿는구나.”
“다른 사람이니까 믿을 수 있는 거야. 원래 나 자신을 믿는 게 가장 힘들어.”
스스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라서,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하지만 결국 그 번민 끝에 자신을 증명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믿는다.
이그나 공작이 그랬을 테고 샤콜 오브리가 그랬을 테고 이름을 알린 수많은 사람이 그랬을 것이다.
“내 상단은 사실 아무것도 없어서…. 네가 거절한다면, 오브리 공작가의 상단으로라도 납품해 주면 좋겠어.”
솔직히 기반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제안하는 게 조금 민망하긴 했다.
“지금은 줄 수 있는 게 ‘합성 마석’의 제조법뿐이지만….”
“…….”
“그, 그래도 희귀 재료가 있는 위치나 원하는 건 대부분 구해 줄 수 있어!”
위치 같은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록서도 있고 말이다.
- 록서입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기’는 성이야!
이름이 ‘록서’인 거잖아.
‘기록서’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아니, 나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넌 갑자기 왜 나타나서 난리야?
- 록서는 ‘이 세계’의 정보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이 세계’의 이야기가 적힌 이야기의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기록된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설명하려고 튀어나오지 좀 말라고.
- 힝, 서운한 록서.
…와, 얘 정말 실화인가?
대체 안 본 사이에 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 서운한 록서는 곧 이 세계의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러 왔습니다.
수식어가 추가됐어.
근데 이 세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무슨 이야기가?
- 이 세계의 주인공이 예기치 않은 이변을 감지했습니다. 예정보다 빠르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머릿속으로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정보에 정신이 없었다.
물어볼 말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고 있는데 힐 이그나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해도 될까?”
“어?”
“그, 방금 말한 대로 해도 되면… 너한테만 내 물건을 납품해도 좋아.”
방금,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웃는 얼굴로 굳은 채 생각했다. 기록서랑 대화하느라 정작 힐 이그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안… 될까?”
“아, 아니…. 되는데?”
뭔진 모르지만 일단 던져보자. 설마 위험한 말을 하진 않았겠지.
“정말?”
어쩐지 기대감에 빛나는 힐의 눈을 보며 나도 적당히 마주 웃었다.
“고마워.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조만간 형님을 소개해 줄게! 친구부터 시작해 보면 좋을 것 같아.”
“…어?”
네 형님이랑 내가 갑자기 뭘 시작하는데.
“뭐야, 제대로 안 들었어?”
“아니, 들었는데 그래서 잘 정리가 안 돼서.”
“내가 형님을 소개해 주고 형님이랑 너랑 서로 맘에 들면 약혼하기로 했잖아!”
아니, 내가 언제.
내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자 힐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대체 언제 소개팅을 잡은 거야.
게다가 약혼 약속까지.
생각 없이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었는데.
“어, 그래…. 친구 하면서 맘에 들면.”
아마도 얘 또래의 꼬꼬마 어린이가 맘에 들 일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 뭐….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할게.”
“응! 형님은 아주 멋지신 분이야. 넌 꽃처럼 예쁘니까 분명 형님도 네가 마음에 드실 거야.”
“그, 그래. 그러면 좋겠네…. 우리도 같이 잘해 보자. 네가 만든 발명품은 분명히 세상을 뒤바꿀 테니까.”
“…응.”
내 말에 힐이 설핏 웃었다.
방금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가 사르르 풀어지며 보이는 미소가 힐의 분위기도 단숨에 풀어져 보이게 했다.
“잘 부탁해, 아네트.”
“응, 나도.”
나는 방긋 웃으며 힐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좋아,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형님과의 소개팅이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말이다.
‘잘한 거겠지?’
뒤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힐과 함께 테라스를 벗어났다.
“‘합성 마석’의 제작 방법은 조만간 편지로 정리해서 보내줄게.”
“응, 알겠어. 형님과의 만남도 날짜 잡아서 편지할게!”
“어어, 그래….”
테라스를 나가자 우리를 두고 사라졌던 샤콜 오브리와 이그나 공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했다.
샤콜 오브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반면 이그나 공작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 잘해 보라고.”
이그나 공작이 샤콜 오브리의 어깨를 한 차례 툭, 치며 말했다.
평소라면 짜증을 냈을 샤콜 오브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둘째야, 잘 놀았냐? 이만 가자.”
“네. 아네트, 편지 쓸게.”
“응, 다음에 보자.”
“그래그래, 다음에 보자고.”
이그나 공작이 내 머리를 한 번 꾹 누르더니 힐과 함께 휘적휘적 걸어 연회장을 벗어났다.
“아버지,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더 있을 건가?”
샤콜 오브리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그럼 돌아가자.”
“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톤 정도 낮은 게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아까 이그나 공작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었는데….’
무슨 심각한 대화라도 나눈 걸까?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백 퍼센트 무슨 일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마차에 올라타서 저택까지 오는 내내 그는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문득, 불안이 뺨을 적셨다.
‘- 서운한 록서는 곧 이 세계의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리러 왔습니다.’
‘- 이 세계의 주인공이 예기치 않은 이변을 감지했습니다. 예정보다 빠르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문득 기록서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차 안은 고요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이.
***
“아까부터 짜증 나게 구는군. 대체 여기까지 와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지?”
샤콜 오브리의 어깨를 붙잡고 기어코 빈 응접실을 찾아 들어온 이그나 공작이 웃는 얼굴로 문을 닫았다.
“초록아, 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도 되냐?”
“꺼져라, 말 섞기도 싫으니.”
“네 딸 말이야. 지금 밖에서 우리 둘째랑 놀고 있는 그 애.”
이그나 공작의 말에 그를 스쳐 지나 문을 열려던 샤콜 오브리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 애 진짜 네 딸이냐?”
이그나 공작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며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니, 내가 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그 자르단 마을, 역시 초록이 네가 가는 게 낫겠는데.”
“내가 멀리 원정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래, 내가 거기나 마물 토벌 둘 중에 하나 가려고 자료를 받아봤단 말이지.”
이그나 공작이 손가락으로 제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근데 거기 ‘성녀’라고 추앙받는 웬 여자애가 하나 있다더군. 녹색 머리카락에 딱 초록이 너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
샤콜 오브리의 눈이 커졌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본 이그나 공작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를 ‘아네트’라고 이름을 밝혔다던데….”
이그나 공작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초록아.”
그가 여상스럽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