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들, 저 녀석이 초록이. 녹의 힘을 물려받은 오브리 가문의 가주다.”
부러 고개도 돌리지 않는 샤콜 오브리의 뒤로 뻔뻔하게도 상대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사람을 색깔로 부르는 건 무례한 짓입니다, 아버지.”
“그래그래, 우리 아들.”
뒤에서 들리는 퍽 성의 없는 목소리에 결국 샤콜 오브리가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적(赤)의 이그나 공작이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그 곁에는 붉은 눈의 소년이 있었고.
다만 아들 쪽은 피부가 가무잡잡하지 않고 새하얀 편이었는데, 눈동자는 또 루비같이 새빨간 색이었다.
머리카락 색은 신기하게도 밤하늘의 남빛을 닮아 있었지만.
“초록… 아니, 오브리 공작이 품에 소중하게 안고 있는 아이가 그의 딸 아네트 오브리지.”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마이페이스인 사람이다.
아무도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혼자 나서서 자기소개까지 대신해 주는 걸 보니 말이다.
“정말 어이가 없군.”
“만나서 반갑냐? 뭐, 그렇다고 해도 좋지.”
“사람의 기분을 멋대로 재단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하하, 기분이 좋은 듯 호쾌하게 웃는 남자의 옆에 선 소년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자기소개는 직접 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하고 계신 일은 무례한 것입니다.”
“뭐, 어쨌든 여긴 내 똘똘한 둘째 놈. 인사하라고.”
이그나 공작은 소년의 잔소리를 웃는 얼굴로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가 소년의 등을 퍽퍽 내리치자 소년이 살짝 휘청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브리 공작 각하. 이그나 공작가의 차남, 힐 이그나라고 합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정중한 인사였다.
귀족의 예법이라곤 어딘가에 버려두고 온 것만 같은 이그나 공작과는 사뭇 달랐다.
‘신기하네….’
반면교사 같은 걸까?
“샤콜 오브리다.”
차마 정중한 인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듯 샤콜 오브리가 대답했다.
“오브리 공작 각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놈에게 이렇게 제대로 된 자식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너도 힘들겠군.”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괜찮지 않은 건 아니구나.
샤콜 오브리가 나를 내려주었다. 아마 인사를 하라는 거겠지만, 또래 친구를 제대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어, 아… 안녕. 아네트 오브리라고 해…, 합니다?”
경어가 쉽게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초면에 반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자니 이 소년은 너무나도 정중했다.
“말은 편하게 해도 됩니다. 전 힐 이그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응. 너도 편하게 말해.”
“응, 그럴게.”
또래의 아이에게 정중한 경어를 듣고 있으려니 약간 민망했다.
다행히 그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법을 잘 알았다.
“그럼 애들은 애들끼리 친해지라고 두고 우린 우리만의 이야기를 해볼까?”
이그나 공작의 팔이 샤콜 오브리에게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다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허튼소리.”
“자기 딸이 아무리 사랑스럽다고 해도 친구 한 명도 없이 두는 건 안쓰럽잖아.”
“네가 신경 쓸 일이….”
“자, 가자고.”
이그나 공작이 기어코 샤콜 오브리와 어깨동무를 하고 그를 거의 질질 끌고 사라졌다.
“…아버지.”
괜찮은 걸까?
갑자기 싸우진 않겠지?
‘피곤하네.’
게다가 사람들이 이쪽을 엄청나게 보고 있었다. 묘하게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도 들어서 기분까지 이상해졌다.
“아네트, 잠깐 밖으로 나가서 쉴까?”
힐 이그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내심 반가웠던 제안에 냉큼 손을 올리자 힐 이그나가 나를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하며 테라스로 향했다.
그러자 시선이 뚝 끊기고 사람들이 쫓아오는 느낌도 사라졌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라스 유리 너머를 살피자 힐 이그나가 내게서 손을 뗐다.
“테라스에 온다는 건 잠깐 쉰다는 의미야. 그래서 테라스에 나가면 방해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지.”
내 생각을 읽어낸 듯 힐 이그나가 정확히 의아했던 부분을 짚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연회는 처음인가 봐?”
“응, 난 귀족가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 미안.”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힐 이그나가 사과했다.
“아니, 괜찮아.”
딱히 사과받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힐 이그나는 신기했다.
피부가 가무잡잡하지도 않고 덩치 역시 나와 비슷한 데다 키는 나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보통 이그나 공작가는 불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기 때문에 피부가 어둡다고 들었는데.
“나도 연회는 이 학자 협회 주최의 연회밖에 안 나가.”
“어, 왜?”
“난 이그나 가문의 아이 같지 않잖아.”
“그래?”
나는 고개를 설핏 기울였다.
확실히 피부색이나 머리 색, 그리고 적당히 또래만큼만 자란 몸을 보면 그렇지만, 성격은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을 빼면 닮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머리카락은 어둡고 피부는 또 새하얗지.”
“하지만, 눈매랑 성격이 똑 닮았던걸?”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힐 이그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아버지와 성격이 닮았다고?”
아, 거기부터가 싫은 거구나.
그는 대단히 불쾌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아, 그러니까… 네 생각을 고집 있게 밀고 나가는 점이 말이야. 왜, 이그나 공작님도 하고 싶은 말은 꿋꿋하게 하시는 편이잖아.”
그걸 바라보는 주변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말이다.
“근데 너도 공작님에게 잘못된 점을 꿋꿋하게 말했잖아.”
이그나 공작이 무시를 하든 말든 한 귀로 흘리든 말든, 조금도 위축이 되지 않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샤콜 오브리의 말에 여상하게 동조하기까지 했고.
방식은 조금 달랐지만, 마이페이스라는 점이 역시 두 사람이 혈육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래서 그런 거야.”
“…….”
힐 이그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설명을 했는데도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그, 불쾌했다면 미안해. 앞으론 주의할게.”
귓불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니 엄청 화가 난 게 분명하다.
‘때리진 않겠지.’
슬쩍 눈치를 살피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딱히 불쾌한 건 아냐. 그냥….”
힐 이그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차례 문지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 처음 들어보거든.”
힐 이그나가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래?”
자세히 보면 생긴 것도 꽤 닮았는데.
말투나 행동은 정중하지만, 눈매는 꼭 능글맞게 웃는 이그나 공작을 닮았다.
“나는 사실 적의 힘을 타고나지 못했거든.”
“그래?”
“응, 이그나 공작가의 피를 이은 사람은 모두 호전적이고 발육도 남달라. 그리고 힘도 세고 무기도 잘 다루는데 난 아무것도 아니야.”
자조적인 말에 눈이 절로 끔뻑였다.
‘하긴, 잘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우울해지기도 하겠지.’
하지만, ‘힐 이그나’는 긴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가 앞으로 개발할 발명품은 하나같이 세상을 뒤흔들 것들이니까.
합성 마석에 대해 알게 된다면 훨씬 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겠지.
미친 과학자, 로버트 화이트가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힐 이그나에게 ‘올해의 학자’ 자리를 뺏겼다고 얼마나 억울해했었는데.
“넌 너만의 능력이 있잖아.”
“이런 조잡한 무기 개발로 형님이나 아버지를 뛰어넘을 순 없어.”
“뛰어넘을 거야.”
신문에 그런 이야기는 물론 실려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니, 뛰어넘어야지.”
“…난 적의 힘이 없는걸.”
“그래도 마력은 쓸 수 있잖아.”
내 말에 힐 이그나가 멈칫했다.
“그건 귀족이라면 누구나….”
“응, 귀족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으니까 그 누구나 쓸 수 있는 걸로 1등이 되면, 멋지잖아.”
내가 씩 웃자 힐 이그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내가 내뱉은 말이 썩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힌트를 줄게.”
“힌트?”
“응, ‘합성 마석’을 만드는 방법. 우리가 먼저 발표했으니 ‘합성 마석’ 자체를 네가 판매할 순 없겠지만….”
그걸 이용해서 개발한 무기나 또 다른 물건들은 그가 판매할 권한이 있었다.
힐 이그나가 눈을 반짝 빛냈다.
“대신 ‘합성 마석’을 사용해서 만든 물건은 나한테 납품하는 거 어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냉큼 조건을 제시했다.
“오브리 공작가가 운영하는 녹주(綠珠) 상단에?”
“아니, 나한테.”
이제 나도 슬슬 제대로 내 돈을 벌어야지.
샤콜 오브리를 통하지 않고 내 사람이 되어줄 이들을 찾아야 했다. 날 대신해 움직여줄 사람들.
힐 이그나가 앞으로 만들어낼 물건은 세상을 뒤흔들 것들이다.
그리고 그 맛있는 걸 이그나 공작가만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하는 음흉한 생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