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긴, 그의 입장에선 ‘제.학.협’을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제국 학자 협회’는 가장 명망 있는 협회로서 보증이기도 했다.
이곳을 통하지 않으면 후원을 받기도 어려울뿐더러 연구 지원을 받는 것도 힘들다.
그나마 그가 지금 연구를 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제.학.협’에서 얼마 되진 않더라도 1년에 두 번 연구 지원비를 소속 학자들에게 지급하기 때문이었으니까.
그게 끊기면 연구를 위해서 막일이라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로버트 박사의 말도 맞습니다. 그 논문이라는 것을 찾아서 일단 진위를 확인한 뒤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크흠, 하지만….”
“모두 ‘올해의 학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들은 이해하지만, 일단 자중하시지요.”
단상 위에 선 학자의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아마 그가 제학협의 협회장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어쩐지….’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동조를 해준다 싶었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본 거였군.’
뭐, ‘합성 마석’에 대해서 귀띔이라도 받고 싶으면 확실히 잘 보일 필요는 있겠지.
특히나 이 집단은 지식과 학문에 미친 사람만 모인 학자 협회가 아닌가.
“로버트 화이트 박사.”
“예, 예! 존경하는 협회장님.”
아직은 성공하지 못해서 자격지심과 열등감만이 가득한 남자가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그대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을 맹세합니까?”
협회장의 주변으로 보랏빛을 띠는 마석 두 개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아…, 네. 전 그런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협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그 논문을 제출해서 결백을 증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외알 안경을 쓴 그가 흘긋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퍽 친근한 미소에 멀뚱히 눈을 끔뻑였다.
‘뭐지…?’
이상한 할아버지네.
짧게 생각하며 나는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로버트 화이트에게 다가갔다.
“로버트 박사님.”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뭐….”
으득-
“뭡니까?”
“저는 책을 아주아주 많이 읽었으니까 어쩌면 오해했을 수도 있겠어요.”
나는 그의 비밀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
그가 철저하게 숨기는 이 비밀을, 언젠가 꼭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정도다.
“만약, 오해였다면 죄송해요.”
내가 손을 내밀었다.
“…….”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체면치레를 아주 중시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욱하면 아까처럼 욕설이나 내뱉는 다혈질적인 면모가 더 두드러졌다.
“…오해인 걸 알았다면 다행입니다.”
딱히 오해라고 하진 않았는데.
‘오해였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한 거니까. 하지만 오해가 아닐 테니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가 살짝 허리를 굽혀 내 손을 맞잡으려는 때였다.
“캬아악!”
어깨에 앉아 있던 키메라, 아니, 체스가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로버트 화이트의 머리 위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아아악!”
아니, 사뿐하게 머리에 발톱을 박았다는 게 더 옳을 것이다.
투둑-!
뭔가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툭.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억…!”
“헙….”
“저런….”
정확히는 왁스를 듬뿍 발라 정갈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만 바닥에 떨어졌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민둥민둥하고 번쩍거리는 머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머리 위에는 고양이가 심혈을 기울인 듯 발톱 자국이 가지런히 났고 선혈이 비쳤다.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손을 떨며 제 머리를 더듬거렸다.
“아, 아아….”
그는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늘 끔찍하게 여겼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사실에 아주 열등감이 있어서 직접 가발까지 개발해서 머리에 붙이고 다닐 정도였다.
한 번은 내가 그가 대머리인 사실을 알게 됐다고 두들겨 맞았던 적도 있었다.
“아차, 죄송해요….”
나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며 체스가 총총총 가져다준 가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 이….”
로버트 화이트의 손이 허공에 높이 솟았다. 막을 새도 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올 때였다.
“너는.”
그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가시를 세운 줄기가 어느새 그의 팔을 칭칭 휘감아 꽉 조이고 있었다.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면 줄기가 그것을 빨아들이며 새빨간 장미꽃을 피웠다.
“내 딸을 함부로 대한 오늘을 평생 기억하게 될 거야.”
“무, 무슨….”
“기억하며, 후회하고, 시간이 다시 돌아가길 바라며, 용서를 구하고 싶겠지.”
“먼저 무례하게 군 건 공녀님이십니다!”
“하지만 할 수 없을 테고.”
샤콜 오브리는 상대의 항의를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제 말을 이어갔다.
덕분에 대화가 전혀 이어지질 않았다.
샤콜 오브리가 제멋대로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실제로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할 말만 꾸역꾸역하고 있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다정한 내 딸이 무례하게 군다면 네가 뭔가 잘못했겠지.”
순간, 들려온 말에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공작 각하!”
“어디서 그 냄새나는 입을 놀리는지, 역겹군.”
샤콜 오브리가 낮게 혀를 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국 어디에도 발붙이고 있기 힘들 텐데 안타까운 일이군.”
그는 옷자락 안쪽에 있던 묵직해 보이는 부채를 느긋하게 꺼내며 말했다.
“저는 단지 결백을 증명하려고 말하고 있었을 뿐이고 무례한 행동은 공녀께서 먼저….”
지금은 공녀인 내게 손을 들어 올린 순간부터 네놈은 이미 끝났다는 걸 왜 모를까.
“퍽 억울한 모양이지?”
“억울합니다.”
“그래, 물론 억울하겠지.”
샤콜 오브리가 빙긋 웃었다. 로버트 화이트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네놈은 오늘을 기점으로 불행해질 거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을 테고 매일같이 목이 언제 잘릴지 겁에 질려 살게 되겠지.”
그가 웃는 얼굴로 속삭이듯 조곤조곤 말했다. 그것이 도리어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네놈의 하찮은 머리털이 없는 걸 왜 내 딸에게 화를 내고 지랄인가.”
샤콜 오브리의 입술 사이로 믿기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죽지 말고 오래 살게. 버러지보다 못한 삶으로.”
샤콜 오브리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 남자는 내 편이고 내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정말 한 대 때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사내였다.
‘하지만, 안 되지. 여기서 추방해서 복수하는 건 약해. 아직 조금 더 괴로워해야 하는걸.’
이 남자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신이 헌책방에 팔아버린 논문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먼저 찾겠지만.’
이 남자는 그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벌벌 떨겠지.
“에이, 아빠! 그러지 마세요.”
나는 부러 샤콜 오브리의 몸을 끌어안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제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몸이 살짝 굳은 샤콜 오브리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내려다봤다.
“아빠, 너무 많이는 괴롭히지 마세요. 로버트 박사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나를 한참이나 보고 있던 샤콜 오브리가 빙긋 웃으며 내 겨드랑이를 잡고 나를 안아 들었다.
“어….”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영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내가 화들짝 놀라 굳어버리자 샤콜 오브리가 보란 듯이 입을 열었다.
“내 딸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내게 그렇게 말한 그가 로버트 화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딸이 착한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샤콜 오브리의 서늘한 말에 나는 바짝 긴장한 채 그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혹여나 몸이 닿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그가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서, 내 딸의 첫 연회인데 언제쯤 시작할 예정이지?”
샤콜 오브리가 단상 위에 선 협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연회를 마음껏 즐겨주시기를 바랍니다.”
협회장의 선언에 한쪽에 서 있던 오케스트라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선율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서서히 풀리며 시선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아래를 흘긋 보니 로버트 화이트가 가발을 챙겨 분한 얼굴로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저런 표정을 하면 안 될 텐데.’
앞으로 겪을 일이 산더미처럼 많을 텐데 말이다.
그의 결말은 아주 비참할 것이다. 나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생각이었으니까.
눈앞에서 제 노력의 산물을 전부 빼앗기고 실험체를 구할 돈이 없어지겠지.
실험을 지속하기 위해서 저 되먹지 못한 인간이 일을 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럼 연구를 위한 돈을 구하기 위해 저 비열한 인간이 무엇을 할지는 정해진 바였다.
연회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사교계의 연회랑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 연회에 참가한 학자의 대부분이 남자로 구성된 탓인 모양이다.
‘그래도 여자들이 아예 없진 않네.’
열 명 중 두 명꼴로 여자들이 있긴 했다.
다만, 묘하게 여자와 남자의 파벌이 나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는 남자들이 따돌림을 시킨다는 게 조금 더 옳았다.
“오! 있다, 있다.”
그 때 뒤에서 들린 낯익은 목소리에 샤콜 오브리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