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저는 아버지랑 가고 싶은 건데요….”
“내가 없었으면 아데우스 공작과 갔겠지.”
진짜 뒤끝 길다.
화이트 시즌이 끝나고도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그는 여전히 화이트 시즌에 머물러 있었다.
이유가 뭐냐고?
보는 대로다.
내가 아데우스 공작에게 잘생겼다고 한 뒤, 그에게 몇 번 더 말을 걸었더니 제대로 토라졌다.
‘아니, 저게 지금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어른이 할 행동이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아는 멋진 어른은 이렇게 쪼잔하지 않아.
“정말로 저랑 같이 안 가주실 거예요?”
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샤콜 오브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한테는 아버지가 최고예요. 하지만, 누가 절 싫어하는 건 무서우니까….”
일부러 그랬다고 몇 번째 설명하며 설득하고 있는 것인지 이 인간은 전혀 모르겠지.
“그래도 그렇게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다 아버지 덕분인데….”
사실 ‘제.학.협’의 연회는 혼자 가도 상관없다. 샤콜 오브리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나도 환영이라는 거다.
다만, 저 토라진 모습을 봤을 때 정말로 혼자 갔다 오면 찾아올 후폭풍이 두렵다.
그래, 후폭풍.
저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정말로 혼자 가는 순간, 그는 어쩌면 방에 틀어박혀서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이 있었다.
“누가 감히 널 싫어한단 말이냐. 오브리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를.”
“그래도….”
“쯧, 하는 수 없지.”
그가 낮게 혀를 찼다.
“그렇게 원하면 함께 가주마.”
“네, 원해요.”
나는 조금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갈 준비나 잘 하거라.”
“네, 피곤하실 텐데 감사해요.”
“뭐…, 감사할 건 없지. 배가 좀 고프기는 하지만.”
그냥 대놓고 내가 만들어 준 음식이 맛있으니 만들어 달라고 할 순 없는 걸까?
아니면, 귀족 사회엔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는 병이라도 만연해 있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굳이 입에 올리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훌륭하고 어엿한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혹시 쿠키 좋아하세요? 달지 않은 과일잼이 듬뿍 들어간 쿠키인데요.”
“난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거 없다.”
“네에, 그럼 선호하세요?”
“뭐, 먹을 만은 하겠구나.”
재수탱이 아저씨.
“알겠습니다, 아버지!”
내가 활짝 웃자 그가 내게 손을 뻗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부드럽군.”
“…네?”
“됐다, 나가 봐라. 참고로 오늘은 2시부터 4시 사이가 빈다.”
“아, 그럼 그때 올까요?”
“그냥 그렇다는 거다.”
어쩌라고, 인간아.
내가 떨리는 눈으로 샤콜 오브리의 곁에 선 집사, 페드로를 보자 그가 웃는 낯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페드로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인간을 상사로 모시게 된 걸까?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네트.”
“네, 아버지.”
“조심하거라.”
그가 던지듯 내뱉은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가 다치면 로사나가 속상해할 거다.”
정말로 한결같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알겠어요, 아버지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계세요.”
“…그래.”
살짝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넨 뒤,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아침부터 쿠키 반죽이라니….’
믿기지 않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주인님?”
“왜 부르지?”
“처리하실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왜 거기에 앉아 계시는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페드로는 있는 힘껏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그의 주인인 샤콜 오브리가 기행을 벌이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을 내팽개친 적은 없다.
당장 오늘 넘겨야 할 안건이 산더미인데 이렇게 여유로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전부터 여기저기서 안건의 처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천히 하겠다고 전해.”
“…외람되지만 긴급으로 올라온 건들입니다.”
페드로가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처리는 하고 싶다.”
“네, 뭔가 하실 수 없는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무리하지 말라잖아.”
샤콜 오브리가 툭 던진 말에 페드로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 말씀은?”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할 생각이다.”
“…그러시군요. 그럼 그게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여쭤도 괜찮을지요?”
샤콜 오브리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퍽 성의 없이 양옆으로 쌓인 서류의 산을 보곤 입을 열었다.
“저 윗부분 정도면 되겠군.”
“이 정도일까요?”
페드로가 한쪽 산의 반 정도를 들어 보였다.
“그거의 반.”
“…그러면 긴급한 것도 다 보실 수 없을 텐데요.”
“기다리라고 해. 내가 무리했다가 혹여나 쓰러져서 내일 그 애의 첫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평소에 하던 것의 반의반도 안 된다는, 목 끝까지 튀어나올 뻔한 말을 애써 꾹 삼켰다.
“주인님께선 뛰어난 능력을 갖추셨으니 이 정도까진 문제가 없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페드로가 들고 있던 서류를 한 번 더 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양하지.”
샤콜 오브리의 말에 페드로의 표정이 거무죽죽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일단 최대한 급한 것들을 모아 한 뭉치로 만들어 샤콜 오브리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들은 미룰 수 없는 급한 건들이니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샤콜 오브리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채 30분도 안 되어 모든 일 처리를 끝냈다.
정확히 그가 요구한 분량만큼만.
‘…이렇게 하실 수 있으면 티 타임 전까지 하시면 될 텐데.’
페드로가 명치 사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꾸역꾸역 쌓일 서류의 산을 생각하니 벌써 위가 아픈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옆에서 애원을 해봐도 샤콜 오브리는 단호했다.
그는, 한 번 결정한 것은 쉽게 바꾸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
하루가 지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차가 달리는 내내 긴장에 꽉 쥔 주먹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안에 땀이 차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긴장했구나.”
얼굴이 굳은 나를 본 듯 샤콜 오브리가 내게 말했다.
“조금요, 처음이라서 그런가 봐요.”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새하얀 연미복을 차려입고 긴 머리를 잘 땋아 앞으로 넘긴 채였다.
녹색 머리카락이 새하얀 연미복과 꽤 잘 어울렸다.
그와 맞추기라도 했는지 내 드레스도 레이스가 가득 달린 새하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저 사람 한 명만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사람?”
“네….”
“누구를?”
“그, 예전에 저 도와주셨던 은인분이신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샤콜 오브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곤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굉장히 잘해 줬었나 보지.”
“네, 위험할 뻔했을 때 도와줬었거든요.”
실제로 그녀는 오지랖이 넓고 정의로운 사람이라 불의를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했다.
“그분을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으니까 위치만 알고 싶어요.”
“아는 정보라도 있나?”
“네, 알기로 아픈 남편이 있고… 이름은 다르아예요. 행색을 보아 귀족은 아니고 평민 같았어요.”
“그걸로도 충분하긴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아는 게 더 있으면 말해 봐라.”
이걸로 충분하다고?
나는 너무 부족한 듯해서 조금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아, 음.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눈동자는 옅은 남색이었고요…. 아마 수도나, 혹은 수도 근교에 살고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기억나는 정보들을 그러모았다.
정확히 어떤 마을의 어느 곳에서 지내는지에 대한 상세한 것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전생의 나도 이 사실에 대해서 모른다는 얘기겠지.
“알겠다. 일주일 정도는 걸리겠구나.”
“일주일이요? 그것밖에 안 걸리나요?”
못해도 몇 달은 걸리는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에서도 오로지 아날로그 방법으로 사람을 찾으려면 이 정도 속도는 어렵지 않을까?
“겨우 이 근처를 조금 뒤지는 일인데, 뭐 얼마나 더 오래 걸리길 바라는 거지?”
하지만, 당신은 앉아만 있고 뛰어다니는 건 다른 사람들이니까….
‘물론 빠를수록 좋기는 하지.’
지금부터 연구하면 앞으로 3년 뒤에는 공작부인이 앓는 병의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최대한의 정보와 돈을 제공한다면 그보다 빨라질지도 모르지.
신문 기사에서는 그녀가 치료제의 개발에 착수하는 데만 무려 7~8년이 걸렸다고 했다.
약품 개발엔 돈이 많이 들고 돈이 없었던 그녀는 직접 발품을 팔아 약초를 캐기까지 했다.
그러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을 거다.
거기에 그녀는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필요한 약재와 정보를 알려줄 것이다. 그녀가 할 일은 그 황금비율의 배합과 제조 방법을 알아내는 것뿐이다.
어쩌면 3년보다 더 빠르게 완성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그녀의 남편도, 공작부인도 살 수 있다.
“그래서,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냐.”
샤콜 오브리의 타박 아닌 타박이 들리더니 녹색의 고풍스러운 마차 문이 활짝 열렸다.
“가자.”
마차에서 먼저 내린 샤콜 오브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심장 한쪽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그가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커다란 손은 여지없이 따뜻해서 퍽 기분이 좋았다.
문이 활짝 열렸다.
긴 악연과 재회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