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0)

<34화>

“지금 싫다고 했나?”

“네, 아직 저택에 적응하지 못한 딸이 있어서 멀리 원정을 가는 건 조금 내키지 않는군요.”

“달리 누굴 보내란 말인가?”

“정화 능력을 갖춘 형님께서 역병이 창궐한 마을에 가시고 이그나 공작이 토벌에 나서면….”

“저기, 말씀 중에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종장이 허리를 살짝 굽혀 보이곤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들어와 황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손님께서 오셨는데 들여도 괜찮으실지요.”

“손님? 언제부터 화이트 시즌에 이 안으로 손님을 받았지?”

샤콜 오브리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라고 할까요?”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시종장.”

그가 슬쩍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곤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꼼꼼한 시종장답지 않게 살짝 문을 열어놓은 채였다. 이내 바짝 긴장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오브리 공작 각하께서 회의에 방해되니 아쉽지만 돌아가라고 하시는군요.”

“아….”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과는 다르게 아주 앳되고 어린 것이었다.

“그렇군요,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콰앙-!

샤콜 오브리가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야, 심장 떨어지겠네. 갑자기 왜 그래?”

이그나 공작의 물음에도 샤콜 오브리는 굳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샤콜, 그 아이 아니니? 네 딸….”

“아, 네.”

멍하니 대답하는 와중 밖에서 대화 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에요, 제가 생각이 부족했나 봐요. 만나러 오면 아버지께서 만나주실 거라고 생각하다니 멍청했죠.”

덜컹-

당장 뛰쳐나가기라도 하려고 했는지 원탁이 크게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샤콜 오브리를 본 적은 모두 처음이었던지라 하나같이 다들 퍽 신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흐음, 매정한 아버지네. 여기까지 찾아온 딸내미를 쫓아내다니.”

이그나 공작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

“…아가씨, 혹시 사탕 좋아하십니까?”

호칭에 당황한 것인지 시종장이 짧은 공백 끝에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샤콜 오브리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제 상반신만큼이나 커다란 도시락통을 든 여자아이가 회의실 안에 훤히 드러났다.

“아, 아버지! 바쁘시다면서요.”

“…생각해 보니 별로 바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시종장 할아버지께서 방금 돌아가라고….”

“휴식 시간이다.”

샤콜 오브리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던졌다.

“큭, 아하하하하!”

이그나 공작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녕, 꼬마 아가씨. 우리 초면이지?”

벽을 짚은 이그나 공작이 퍽 양아치처럼 비딱하게 입을 열었다.

***

“아, 네.”

그럼 우리가 초면이지 구면이겠니?

이상한 걸 묻는다 싶다. 그러나 여기에 있다는 건 네 명의 공작 중 한 명일 테니 적당히 잘 보여둬야지.

‘아마도 이그나 공작인가?’

햇볕 아래에서 잘 탄 가무잡잡한 피부에 호쾌한 분위기와 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붉게 타오르는 듯한 머리카락까지.

세상에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이 더 없다면 아마 이 사람은 적(赤)의 이그나 공작일 것이다.

“초면이에요.”

내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이그나 공작이 잠시 멈칫했다.

“야, 초록아.”

그가 샤콜 오브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샤콜 오브리가 불쾌한 얼굴을 하며 쌀쌀맞게 그의 손을 내쳤다.

“예의 없는 놈.”

“얘 나 줘라.”

“뭐?”

“나 예전부터 딸 키워보고 싶었거든.”

“그건 네 부인에게 가서 부탁할 일이지.”

샤콜 오브리가 짜증 난다는 듯 대꾸하곤 그를 옆으로 밀쳤다.

“아니면 나랑 사돈이라도 할 생각 없냐? 우리 아들들 잘생기고 능력도 좋잖아. 첫째도 둘째도 다 오케이야.”

샤콜 오브리에게 이렇게 격의 없이 구는 사람은 처음 본다.

같은 공작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그만큼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신기할 따름이다.

“너랑 사돈을 맺느니 폭주해서 죽는 게 낫겠군.”

“와, 목숨이 걸려 있으면 사돈 정돈 맺어줄 수 있잖아.”

“너 같은 걸 시아버지로 두게 될 내 딸이 불쌍하군.”

그가 코웃음을 치며 내게 턱짓했다.

“들어와라. 뭘 그렇게 가져왔지?”

“아버지 식사요. 아버지가 황성 음식은 맛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조금 부끄럽다.

그게 신경 쓰인다고 음식까지 해서 회의실에 쫄래쫄래 난입하다니 말이다.

“근데 제가 방해되는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나와주셨으니까 이것만 드리고 바로 돌아갈게요.”

“…….”

총총총 다가가 커다란 도시락을 내미는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묘했다.

“아버지?”

무거우니까 좀 받아주지 않을래? 망할 아버지야.

팔이 파들파들 떨리는데도 손을 뻗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침 휴식 시간에 찾아와서 방해는 아니었다.”

“아, 네….”

뭐, 그랬겠지.

그냥 귀찮았을 거다.

“식사는?”

“이제 돌아가서 하려고요.”

“…와서 먹고 가든가.”

“아… 제가요?”

저 안으로 들어가서 먹으라고?

싫은데.

먹다가 얹히거나 체할 것 같다. 저기 있는 거 심지어 황제잖아.

“괜찮아요, 아버지 일하시는데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휴식 시간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할 거지?”

“그래도 휴식 시간도 방해하고 싶지 않고….”

“휴식 시간에 자식과 적당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부모가 할 일이다.”

싫다고!

싫어, 싫어, 싫어, 싫단 말이야!

“앗, 네. 감사합니다! 사실 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근데 아버지, 저 너무 무거워요….”

벌서는 것도 아니고, 팔이 파들파들 떨리는데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가 내 짐을 가져갔다. 옆에서 떠드는 이그나 공작은 완전히 무시한 채로.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새하얀 피부를 지닌 남자와 어쩐지 삶에 찌들어 보이는 남자, 그리고 아르고 공작이 있었다.

아마 새까만 쪽이 흑(黑)의 지배자인 아데우스 공작일 테고, 저 365일 야근에 시달리는 것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가 황제가 분명했다.

눈두덩 아래에 자리한 짙은 다크서클이 그의 피로함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저, 아네트 오브리라고 합니다….”

하나같이 샤콜 오브리처럼 콧대 높을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다.

“그래, 먼 길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비를 생각해서 여기까지 오다니 기특한지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네 아비가 황성 음식이 맛이 없다고 했다고?”

병약하게만 보이는 남자가 빙긋 웃고는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물어왔다.

“어….”

황제의 앞이라 거짓말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하자니 눈치가 보였다.

‘아까 너무 솔직하게 말했구나.’

그런 거 아니라고 해야 했는데 말이다.

“그게….”

“그럼 맛이 없는 걸 맛이 없다고 하지 뭐라고 하겠습니까? 폐하.”

황제가 이렇게까지 현실성 있게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껏 본 소설에서는 황제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무슨 일이든 단숨에 끝내 버리는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너무하는군, 내가 자네 때문에 황성 요리사를 뽑을 땐 무려 직접 심사를 보고 있는데 말이지.”

깍지를 낀 손 위에 턱을 올린 채 황제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편히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 가려무나.”

“네, 감사합니다.”

“이게 녹의 아이입니까?”

아데우스 공작이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딸은 물건이 아닐 텐데.”

‘이거’라고 말한 것에 제법 기분이 상했는지 샤콜 오브리가 말했다.

나는 시종 할아버지가 오브리 공작의 옆자리에 놔주는 의자에 앉으며 기 싸움을 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정말 다들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네.’

얼른 먹고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느릿하게 다리를 흔들 때였다.

“이 저주 덩어리가?”

“아데우스 공작.”

결국 황제가 제재하고 나섰다.

“길어야 7년이겠군요.”

아데우스 공작의 말에 어깨가 절로 굳었다.

“녹. 이거 곧 죽을 겁니다.”

그는 마치 내 본질을 꿰뚫어 본 것처럼 한없이 불쾌하다는 시선을 한 채 선고했다.

쾅-!

다음 순간, 아데우스 공작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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