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것의 등장에 모두가 침묵에 휩싸였다. 족히 4단은 되어 보이는, 꽤 커다란 도시락이었다.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준 건지. 정말… 귀찮군.”
샤콜 오브리가 혀를 끌끌 차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당연히 아무도 할 말이 없었다. 수제 음식을 만들어 준 자식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귀족가의 아이들은 딱히 음식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배우질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 맛없을 게 뻔한 음식 가지고 되게 뻗대는군.”
이그나 공작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샤콜 오브리의 행동이 눈꼴시어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으랴. 샤콜 오브리라는 인간은 사람의 배알을 아주 꼴리게 하는 데 뭐가 있었으니까.
“글쎄, 맛이 없을진 모르겠군.”
그 때였다.
똑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살짝 열렸다.
“만찬이 준비되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도록.”
황제의 말에 문이 활짝 열리고 시종장과 사용인들이 들어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공간을 채우고 산해진미가 금세 눈앞을 가득 메울 때 샤콜 오브리는 여유롭게 보자기를 풀었다.
샤콜 오브리가 누구인가?
모든 것에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음식은 최고급 식재료로 만든 게 아니면 결코 먹지 않고 디저트마저 원산지까지 가릴 정도였으며 옷을 만드는 원단도 직접 수입하거나 제작할 정도로 모든 것에 까다로웠다.
황성에 있는 요리사들도 샤콜 오브리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을 정도였다.
황제가 맛이 괜찮다고 칭찬한 음식을 맛없다고 신랄하게 깐 뒤로는 말이다.
“그거 먹다가 토하는 거 아닙니까?”
아데우스 공작이 제법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갓 만든 음식도 아니고 무려 도시락이다. 음식의 맛은 반 이상 떨어졌을 텐데 그걸 먹겠다고?
그는 제 앞에 만찬 음식 대신 도시락 네 칸을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뭐냐, 이건. 괴상하게 생긴 음식이 잔뜩 있네.”
“글쎄, 내 딸은 귀찮게 새로운 시도도 많이 하곤 하니까 말이야. 달라는 얘기도 안 했는데 챙겨 주다니, 시간이 남아도는 건지 뭔지. 쯧.”
그가 짧게 혀를 차면서도 우아하게 포크와 수저를 들어 음식을 제 접시로 덜어 왔다.
“매번 귀찮아 죽겠군.”
어디까지나 이건 샤콜 오브리 혼자만의 의견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말을 아니샤가 들었다면 아마 그녀는 억울해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은 결국 샤콜 오브리였기 때문이다.
“아네트, 너. 네가 만들어 줬던 그때 그 음식 꽤 맛있었다.”
“아, 그러셨어요? 마음에 안 드신 줄 알았는데.”
“괜찮다고 했었을 텐데.”
“다행이에요, 다음에 시간이 되면 또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팔짱을 낀 샤콜 오브리가 짧은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내일 닷새간 화이트 시즌에 참가하러 간다.”
“아,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그래, 잘 다녀오겠다. 음식이 꽤 먹을 만했어.”
“아, 네… 감사합니다.”
“화이트 시즌에 나오는 음식들은 제법 수준이 낮지. 난감한 일이야.”
그가 자꾸만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니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렇, 군요. 아버지….”
“그래, 뭐 그렇다는 거지. 굶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네.”
“그럼 쉬어라, 이만 가보마.”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버지.”
아니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사라지자 아니샤의 얼굴이 확 찡그려졌다.
“…저 인간 설마, 도시락이라도 싸 달라는 거야?”
에이, 설마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설마’의 적중률이 너무 높은 탓에 불안했던 아니샤는 아침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한 보따리 싼 것이다.
“…귀찮게 이런 걸 왜 만들었지? 하여튼, 일을 사서 하는 타입이구나.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먹겠지만 말이야.”
“…다녀오세요, 아버지.”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이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다들 들게.”
황제가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하나둘 식사를 시작했다.
샤콜 오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실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처럼 화려한 기교가 들어가거나 데코레이션이 되어 있지는 않아 보기에는 심심했지만, 맛은 좋았다.
낯선 음식이 꽤 많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맛이 없는 건 아니다.
샤콜 오브리는 미식가인 만큼 다양한 요리를 즐기는 것도 꽤 좋아했던 터라 독특한 음식들이 술술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맛있느냐?”
“네, 형님.”
“나도 한번 먹어봐도 되겠느냐? 샤콜.”
입맛 까다로운 샤콜 오브리가 포크와 스푼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아르고 공작 역시 호기심이 동했다.
평소라면 곧장 대답했을 샤콜 오브리가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괜찮습니다.”
두 번은 안 된다는 의미다.
대답에 섞인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아르고 공작이 새빨간 색의 고기를 집어 한입 먹었다.
“음…, 좀 맵구나.”
“네, 맵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맛있구나. 네가 독점하고 싶어질 만도 하다. 이걸 그 아이가 만들었다는 거니?”
아르고 공작이 놀란 눈을 하자 샤콜 오브리가 설핏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 만들었다고 합니다.”
샤콜 오브리가 선심 쓰듯 스튜가 담긴 그릇을 슬쩍 밀었다.
“스튜도 한번 드셔보십시오.”
아르고 공작은 사양하지 않고 스튜를 한 스푼 먹었다. 잡내라곤 조금도 나지 않는, 도리어 평소 먹던 것보다 한층 더 풍미가 깊은 스튜였다.
“실력이 아주 뛰어나구나….”
아르고 공작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샤콜 오브리가 왜 굳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두고 이 투박한 식사를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보고 있던 다른 공작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도시락을 바라봤다.
“오브리 공작!”
이그나 공작이 웬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나도 한입만 먹어볼 수 없을까?”
“없다.”
“양도 많은데 좀 어때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샤콜 오브리의 매정한 말에 이그나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공작끼리 이렇게 서운하게 굴어 뭐 해?”
“첫 만남부터 남을 괴상한 별명으로 불러젖힌 주제에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건 애칭이지, 애칭. 애정에 기반한 호칭 몰라?”
“모른다.”
초록이 따위에 애정이 담겼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는.”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황제가 위가 있는 자릴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나도 한 접시만 먹어보고 싶군.”
“폐하께서는 어차피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가 있으시니 두 분께 부탁해 보십시오.”
“…….”
샤콜 오브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우아하게 식사를 마쳤다.
도시락 내부가 텅텅 빌 때까지 혼자서 4칸짜리를 전부 먹은 것이다.
세 공작과 황제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집요함과 쩨쩨함이었다.
그날, 논의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 자식이 얼마나 잘났느냐에 대한 논쟁.
제국민들이 알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
“다음 안건은… 그래, 토벌 건이네. 마물 토벌은 주기적으로 아르고 공작가가 맡아왔었는데, 이번엔 어떤가?”
황제가 카드 패를 살피다가 카드 한 장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번에도 저희가 나가겠습니다. 어차피 마물의 활동 영역은 북부가 제일 넓으니까요. 끙….”
담담하게 대답한 아르고 공작이 낮게 신음하며 카드 한 장을 가져갔다.
“그럼 이 안건은 그렇게 하도록 하지.”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간단한 메모와 함께 서류를 치웠다.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의 맨 윗장을 흘긋 본 황제가 카드를 뒤집어 내려놓곤 서류를 읽었다.
“이건 좀 머리가 아프겠어.”
“뭡니까?”
“역병이네. 자르단 마을. 신전에서 정화 능력을 쓸 수 있는 신관들을 파견했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하는군. 여긴 주기적으로 보고가 들어오는 곳이라 슬슬 파견을 해야겠어.”
“폐하 차롑니다.”
이그나 공작의 말에 황제가 서류를 내려놓고 카드를 들었다.
“정화 쪽이면 아르고 공작이 나설 곳 아닙니까?”
“하지만, 아르고 공작에게만 일을 떠맡길 순 없지.”
황제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그나 공작이 한숨을 푹 내쉬며 카드를 던졌다.
“졌어.”
그가 귀찮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삐딱하게 입을 열었다.
“뭐, 어디 끼워 넣어도 적당히 제 역할을 하는 안성맞춤인 사람이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녹’이라면 확실히 무슨 일이든 잘하시기는 합니다.”
이그나 공작의 패배 선언에 패를 고르고 있던 아데우스 공작이 말했다.
녹의 힘을 가진 샤콜 오브리는 치유 능력을 떠나서 식물을 다룰 수 있고 식물에 박학다식한 만큼 어떤 일도 평균 이상은 해냈다.
녹의 힘은 식물의 힘을 강화하기도 하니 식수나 땅 등의 단순 오염에 의한 정화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오브리 공작은 어떤가.”
“싫습니다.”
샤콜 오브리가 카드를 내며 말했다.
그 단호한 거절에 황제가 카드를 내다 말고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