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흑마법사들이 여는 음침한 마법 대회 따위의 수준이 뭐 그리 높다고.”
이그나 공작이 딴지를 걸었다.
“일반 마법사보다 흑마법사의 수준이 더 높다는 걸 그 아둔한 머리는 언제쯤 이해할지 궁금하군요.”
말투는 정중한 경어에다 목소리도 차분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경멸과 신랄함은 꽤 노골적이었다.
“그대들은 대체 언제쯤이 되면 이 유치한 싸움을 멈출 건가?”
짙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금빛 눈동자에 찬란할 정도로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일찍이 쿠데타에 의해 황위에 오른 남자는 황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었다.
다만 살짝 피곤하게 내려앉은 눈꺼풀과 수척하고 병약하게만 보이는 외모로 일에 찌들어 밤샘 노동에 시달린 사람처럼 보여서 황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카리스마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를 보며 네 명의 공작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허리를 굽혔다.
피곤한 낯의 황제가 자리에 앉으면서 가볍게 손짓하자 네 공작이 다시 원탁에 앉았다.
“참 빨리도 오십니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이그나 공작의 말에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그대들은 짐에게 존경심을 좀 가질 순 없겠나?”
“그래서 제가 앞에 ‘존경하는’이라고 붙이지 않았습니까.”
“…됐네.”
황제의 대답에 이그나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내는 심드렁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오브리 공작, 잃어버린 딸을 찾았다고 하더군. 사망신고를 철회하고 신분증 발급을 요청했던데, 맞나?”
“네, 맞습니다.”
“딸? 따알?! 잃어버렸던 그 애를 찾았다고? 네가?!”
“내가 그대와 친구인가? 이그나 공작.”
샤콜 오브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같은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했으면 동기라곤 할 수 있지.”
“웃기는군.”
그는 신랄하게 이그나 공작을 비웃었다.
“와, 딸을 찾았다니 뭐 축하할 일이네. 매일같이 찾으러 다녔잖아?”
“그랬지.”
“오브리 공작부인이 아주 기뻐했겠어.”
“뭐, 아니라곤 못 하겠군.”
실제로 로사나 오브리는 매일 밤 그에게 돌아온 아네트에 대해 속삭이곤 했다.
신께서 굽어살펴 주셨다고.
“녹(綠), 격동의 시기에 잃어버렸던 그 애를 찾았다는 겁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데우스 공작이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샤콜 오브리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문제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데우스 공작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면서도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딸이라니 좋겠구나.”
아르고 공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한 번 봤을 때 아이가 참 착하고 똑똑하더군. 똑 부러지는 면이 유독 널 똑 닮았더구나.”
아르고 공작의 말에 샤콜 오브리의 입가가 한 차례 씰룩거렸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삐딱선을 탔다.
“흠흠, 한참 멀었죠. 애초에 별로 닮지도 않습니다.”
“그래?”
“네, 오히려 귀찮습니다.”
“귀찮은 아이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르고 공작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샤콜 오브리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귀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루는 쓸데없이 직접 요리해서 쫄래쫄래 가져오더니 선물이라고 하면서 제게 주고 함께 수도 구경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질 않나, 이번에는 ‘제.학.협’ 모임에도 바쁜 저에게 굳이 제가 아니면 안 된다며 꼭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질 않나, 얼마 전에는 간식거리를 선물해 줬더니 또 꽁지가 빠지게 달려와선 기쁘다고 방방 뛰질 않나. 게다가 이번에는 그 애의 아이디어로 개발한 ‘합성 마석’이라는 제품의 판매 권한이나 수익을 전부 저한테 다 넘겨주겠다고 하는데 쯧,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게다가 일도 저한테 떠넘기려는 것이, 딸이라고 하나 생긴 게 아주 귀찮아 죽겠습니다.”
“…….”
“…….”
“…….”
“…….”
샤콜 오브리의 우아한 얼굴과 다르게 속사포처럼 쏟아진 말은 ‘귀찮다’라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그렇구나….”
오브리 공작의 일이라면 대개 둥글게 받아주는 아르고 공작의 말끝조차 목소리가 살짝 떨렸을 정도였다.
“아니, 아니, 그보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개발한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무려 한 번 발사에 마을 하나를 부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했다고.”
“남을 죽이는 물건 따위를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군. 내 딸은 훨씬 더 포괄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합성 마석’을 만들었지.”
“하, 내 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도와주는 것 하나 없이 재료 수급부터 전부 해결했다고.”
“네가 얼마나 미덥지 못했으면 말하지 않았는지는 생각해 본 적 없나 보지? 네 아들이 불쌍할 지경이군.”
“하, 자주성이 높은 거지.”
“그래, 금방 독립해 버리겠으니 축하할 일이야.”
오브리 공작과 이그나 공작 사이로 스파크가 튀는 것만 같았다.
황제가 제 위장이 있을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위가 아프군.’
그리곤 뒤이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원수 보듯 싸우는 네 공작들을 데리고 닷새간 회의를 진행하려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회의가 굴러간 날이 없었다.
“제 아들이 이번에 고대의 고서를 복원해서 제출한 마법으로 ‘성인부’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훨씬 더 대단합니다.”
두 사람이 싸움을 시작하면 남은 두 사람은 말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말리기는커녕 끼어드는 놈이 있다.
“결국 ‘개발’이 아니라 남의 걸 베꼈다는 거군.”
“고서 번역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합니까? 하긴, 해본 적이 없으니 모르실 테지만.”
아데우스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평소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결국 남이 생각한 걸 가져다 쓴 것이 아닌가. 내 딸은 남의 걸 베끼지 않았다.”
아니었다.
사실 아니샤야말로 작정하고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아네트밖에 없기 때문에 성립되는 사기였지만.
“근데 그 ‘합성 마석’ 꽤 신기하긴 하던데,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야?”
“그걸 알려줄 것 같나? 애초에 모든 권한은 내 딸에게 있어. 내 딸에게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며 부탁해 보든가.”
“무슨 부탁을 그렇게까지 해야 돼?”
이그나 공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원탁의 한가운데에 앉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황제의 표정에 근심이 깊어졌다.
그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어사황이라고 아나?”
“어사황? 그게 뭡니까?”
그나마 가만히 앉아 있던 아르고 공작이 물었다.
깍지 낀 손등 위로 턱을 걸친 황제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황녀와 황자다.”
순간 회의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니 다들 무의미한 다툼은 적당히 하는 것이 어떤가?”
“허, 이 황제 아저씨가 뭘 잘못 드셨나. 당연히 내 아들들이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합니다.”
“아뇨, 제 아들이야말로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데다가 카리스마까지 있습니다.”
“내 아들은 짐승 같은 면모가 있어서 더 사랑스럽다네. 무술 실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도 정예 기사단을 붙이지 않으면 감당이 어려울 정도야.”
제국의 대소사를 논의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자식 자랑을 하러 온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샤콜 오브리가 가볍게 웃으며 뭔가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꽤 커다란 상자가 여러 개 쌓여 보자기에 한 차례 감싸인 도시락이었다.
“다들 새벽같이 일어나 입궁하면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랑 수제 도시락 받아본 적 있습니까?”
샤콜 오브리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