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30)

<30화>

나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근데 ‘키이’가 입양아가 아니라 이 집안 진짜 딸이라고?’

진짜 딸은 죽은 거 아니었나?

의아함에 눈을 끔뻑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록서야?

혼자서 맨날 불쑥불쑥 튀어나와 잘만 떠들더니 갑자기 왜 또 조용해진 걸까.

- 록서는 착각이나 하는 이상한 기록서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택합니다.

삐졌네.

근데 책에 감정이 있던가?

책이 토라지기도 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하다 하다 이제 책까지 달래야 하는 처지가 되다니.

- 달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록서는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주인님이 록서의 기록을 원하는 것은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너, 록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3인칭으로 칭하는 것이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역시 토라진 게 분명하다.

- 세상이 본래 알아선 안 되는 일을 ‘특별하고’ ‘대단하며’ 심지어는 ‘특혜에 가까운 권능’을 가진 록서는 주인님께 그 권능을 이용해 친절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하지만….

왜 이렇게 말하니까 전혀 인정하고 싶지가 않은 걸까?

그리고 애초에 내 인권은? 내 생각을 다 읽는 거면 내 인권은 어디에 있는데.

내 인권도 침해받는 거잖아. 남의 인권 타령하기 전에 주인님 인권을 먼저 지켜봐.

- …키이는 오브리 공작가의 진짜 막내딸입니다.

아니, 그런 거라면 나는 여기에 눌러앉아 있는 게 아니라 진짜를 찾아주고 보상을 받는 편이 좋지 않나?

- 남겨진 기록에서는 말입니다.

모호한 뉘앙스다.

남겨진 기록이라는 건 무슨 기록을 말하는 거지?

너한테 적힌 기록을 말하는 거야?

- 정확히는 ‘주인님’의 기록입니다. 주인님께서 본 기록에선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본디 기록이란 승자의 시점에서 승자가 원하는 대로 남길 수 있는 승자의 유구한 권리입니다.

기록서의 이야기가 조금 어려웠다. 정확히는 이해되지 않는다기보단,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옳았다.

만약, 이해해 버리면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 같아서.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표정을 굳히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 끔찍한 폭군이 황제가 되어 남긴 기록으로 인해 후대에 이르러 성군으로 미화되어 ‘진실’과는 다르게 ‘사실’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기록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 기록서가 아니라 록서입니다.

키이…, 그러니까 ‘셰키나 오브리’가 사실은 가짜인데 진짜 딸인 척을 했다는 거잖아.

기록서 네가 말하는 게 이거지?

- 셰키나 오브리는 오브리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가 맞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기억할 테니까요. ‘진짜’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기록서가 아니라 록서입니다.

오브리 공작가의 진짜 딸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셰키나 오브리가 앞으로도 유일무이한 공녀가 된다는 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찾아? 기록서엔 뭐 안 적혀 있어?’

내가 머릿속으로 다시 슬쩍 물을 때였다.

“…네트.”

- 이미 ‘사실’은 바뀌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주인님이 계시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기록서가 아니라 록서입니다.

“…….”

얘 진짜 이름에 짜증 나게 집착하네. 말끝마다 대체 뭐야아!

“아네트!”

“네!”

귓가에 내리꽂히는 음성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한 나는 코앞에 산처럼 쌓인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간식들을 보며 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대답이 없지?”

“아, 그게….”

“앞으로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나?”

“…….”

어쩌지?

‘…하나도 안 들었어.’

하나도 안 듣다 못해 거의 무시하는 수준이었다. 왜냐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거든.

‘뭐라고 중얼거리긴 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는 데에 너무 집중하느라 배경음 따위로만 들렸다.

모르겠다.

대충 얼버무려 보자.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저는 원래 귀족이 아니었으니까요.”

“상관없다. 너는 공작가에서 유일한 공녀니까.”

“유일한 공녀라고요?”

“그래, 다른 놈들은 딸이 없거든.”

어쩐지 샤콜 오브리가 퍽 고소하다는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맞아, 다른 공작가엔 여식이 없었어.’

생각해 보니 다른 공작가의 후계자는 전부 영식들뿐이었다.

신문에서 본 기사를 떠올리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때문에 셰키나 오브리가 입양됐을 때 신문이 꽤 떠들썩했었다.

마치 셰키나 오브리를 위한, 셰키나 오브리를 중심으로 도는 그녀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처럼.

“뭐, 조만간 ‘화이트 시즌’이 있으니 그때 보면 되겠지.”

화이트 시즌은 또 뭐야?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내 손에 큼직한 초코칩 과자를 하나 얹어주며 입을 열었다.

“네 명의 공작과 황제가 만나서 의견을 나누는 회의라고 보면 된다. 네 개의 힘을 관리하는 자들은 황제에게 주기적인 보고를 하고 정보 교환도 할 필요가 있거든. 중요한 안건을 국정에서 논하기 전에 그 회의에서 한발 앞서 논의하기도 하고.”

역시 특수한 힘을 가진 공작가는 큰 영향력이 있는 모양이다.

꽤 신기한 이야기다. 신문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다.

“왜 화이트 시즌이에요?”

“무슨 색의 빛이든 전부 모으면 흰색이 된다고 해서….”

해서…?

“카드 게임에서 훌륭하게 패배한 황제가 첫 회의 때 정했다.”

첫 회의에서 카드 게임을 한 거야?!

그 게임에서 황제가 져서 황제한테 이름을 지으라고 시켰다고?

이 사람들 생각보다 친한 건가? 사이가 썩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닐지도 모르겠다.

“뭐, 3전 연패를 당하더니 사기라고 우기며 열이 제대로 받은 황제가 전부 황족 모독죄로 처넣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었지.”

음, 역시 아닌가 보다.

‘황족 모독죄’라는 얘기를 듣고도 누구도 말리지 않고 그 일을 강행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사기가 아닌데도 사기라고 했어요?”

그건 좀 깬다.

“사기였다.”

네?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화이트 시즌’은 긴급한 소집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고 일 년에 두 차례 닷새 정도 진행한다. 그 기간은 황성에 머물러야 하니 저택엔 오지 못하고.”

의외로 공작이긴 했구나.

가끔 한량이 아닌가 했는데.

“이상한 생각을 했군.”

“아닌, 데요…?”

샤콜 오브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넌 내 딸이니, 기죽지 말고 언제나 당당하거라.”

“네.”

“그리고 네 앞으로 초대장이 왔다.”

“초대장이요?”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지금 내게 올 초대장은 딱 하나일 테니까!

후두두둑-

작지만은 않은 상자가 앞으로 내밀어졌다.

산처럼 가득 쌓인 초대장이 마치 간식처럼 바닥으로 쏟아졌다.

“…….”

그래, 초대장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건 초대장의 산이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찾는 초대장은 ‘제학협’의 ‘가을 학회’ 초대장뿐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있는 건 누가 봐도 다양한 살롱에서의 티 타임 초대장이었다.

“뜯어져 있는 건 이쪽에서 한 차례 확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번 거른 양이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초대장에는 내가 직접 답장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그가 사납게 덧붙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초대장이 있었길래 저런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가 가도 되는 거예요?”

“데뷔탕트를 안 했으니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래 친구를 사귀기엔 좋은 자리지.”

“음….”

그럼 굳이 갈 필요는 없지.

친구를 만들 생각도 없고 하하호호 놀겠다고 이 가문에 입양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티 타임 초대장밖에 없었나요?”

나는 편지를 하나씩 꺼내 발신인을 살피며 물었다.

“대부분은 그랬지. 아, 하나 ‘제국 학자 협회’에서 온 연회 초대장이 있긴 하더구나. 네가 ‘올해의 학자’로 선정되었다더군.”

찾았다.

차분한 남색 봉투에 유려한 글씨체로 ‘제국 학자 협회’란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냉큼 그걸 열었다.

“여기 가도 되나요?”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하지만 네 또래는 없을 거다.”

“네, 알아요.”

근데 그래도 가고 싶은 거니까.

옛날부터 그 미친 과학자의 얼굴을 보고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원한다면 가렴.”

“감사합니다!”

“다만, 거기엔 네 또래도 거의 없어서 혼자 갈 수 없다.”

“메리랑 골드도 데리고 갈게요.”

“동반자는 1인만 가능하다.”

음, 그러면 둘 중 하나만 데리고 가면 되겠지. 골드보단 메리가 더 나으려나? 아니면 차분한 골드?

“메리나 골드한테 의사를 물어보고 둘 중 한 명을 꼭 데리고 참석할게요.”

“…그래?”

팔짱을 낀 샤콜 오브리가 느리게 읊조렸다.

“하지만, ‘제국 학자 협회’는 최소한 거기에 있는 학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식인만 출입할 수 있다. 메리와 골드는 그런 면에선 좋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샤콜 오브리의 뉘앙스가 좀 이상하다.

마치 메리와 골드가 나를 따라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 같았다.

“저 가지 말까요?”

“아니, 상관없다.”

이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은데.

“메리와 골드를 데리고 가는 건요?”

“말했다시피 별로 추천하진 않는군.”

“그럼 누굴 데리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샤콜 오브리가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데리고 가도 나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는 특정 인물을 대답하지 않았다.

“널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고 두뇌 회전이 빠르고 뛰어나며 거기 있는 학자들을 가볍게 눌러버릴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외모도 제법 뛰어나고 어느 정도 권력이 있으면서도 너에게 낯설지 않은 사람이 괜찮을 것 같군.”

“…….”

그냥 가지 말라고 해,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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