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니, 다 큰 어른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런 게 허용되는 건 사춘기까지 아니었냐고.
“…웃었나?”
“아뇨, 그냥…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건 슬프잖아요.”
“뭔가를 좋아하는 순간, 그건 언젠가 내 약점이 된다. 내 숨통을 조르겠지. 그리고 결국 나를 떠날 거다.”
가볍게 건넨 말에 생각보다 무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전 앞으로도 좋아하지 마세요!”
“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반드시 당신을 떠날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서로 너무 좋아하진 말고 싫어하지도 않는 걸로 해요. 어차피 우린 5년 뒤엔 헤어질 거잖아요.”
그가 내게 마음을 주면 분명히 상처받을 거다. 단단한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마음이 여린 모양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다만.”
…마음이 여린 건 아닐지도.
냉혈한. 냉철한 인간.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이나 나올까 궁금하네!
귀족에게 ‘푸른 피’가 존재한다면 분명히 이 인간일 거다.
“네에, 저도 아버지께서 오다 주우신 간식들로 티 타임 시간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대로 돌아가서 죄송했습니다.”
나는 퉁명스러운 티를 팍팍 내며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건넸다.
타앙-!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노스 오브리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린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포크를 주울 생각도 못 하고 이노스 오브리가 굳은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얘한테 주운 음식을 주셨어요…?”
“뭐?”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직접 데리고 오셨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으십니까?”
“줍기는 누가 줍….”
황당하다는 듯 대답하던 그가 숨을 삼켰다.
여기서 줍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꼴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얘랑 곧 헤어진다는 건 또 뭡니까?”
“…….”
이노스 오브리에겐 5년 계약이라는 얘기는 안 한 건가?
내가 샤콜 오브리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꾹 다문 채로 낮게 혀를 찼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가서 볼일이나 봐라.”
“볼일은 얘랑 있습니다. 저랑 간식을 먹을 거거든요.”
“아, 남이 버리려고 했던 그 과자 말이냐?”
“버리려고 하긴 누가…!”
이번엔 이노스 오브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직접 나가서 사 왔을 테니 억울할 법도 했다.
지금은 갈아입긴 했지만, 방금까지 외출복이었던 걸 보면 들키고 싶지 않아서 사용인도 없이 혼자 사 온 게 분명했다.
둘 사이의 기류가 퍽 매서웠는데, 서로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모습이 퍽 웃겼다.
‘음….’
장난이나 좀 쳐볼까.
나는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저는 주운 음식도 버리는 음식도 잘 먹어요! 보육원에선 굶는 날도 많았는걸요!”
이건 사실이다.
“…….”
“…….”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생각보다 무서웠던 터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장난을 너무 쳤나? 생각하는 때였다.
“…이만 일이 있어서 가보지.”
“너, 얼른 와. 우유 다 식었어.”
샤콜 오브리가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멀어지나 싶더니, 이내 이노스가 내 손목을 잡아 제 방으로 데려갔다.
‘…뭐야?’
무섭게.
장난이 너무 심했던 건가 싶어서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
“오라버니, 화났어?”
“안 났어.”
방으로 들어간 그가 우유를 다시 데워 오라고 하녀에게 말하곤 나를 테이블에 앉혔다.
“다 먹어.”
“다는 못 먹는데.”
“그래도 많이 먹어.”
이노스 오브리가 내 앞접시에 쿠키를 산더미처럼 쌓아주었다.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쿠키는 먹기도 아까울 정도로 귀여웠다.
“와, 귀엽다.”
“귀, 귀여워? 내가 아침부터 가서 줄 서서….”
“이 맛있는 쿠키를 오라버니한테 버려준 사람한테 고마워해야겠다!”
“어…? 아, 그렇지.”
이노스가 말문이 막힌 듯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그래도 내가 받아서 가져온 거니까….”
“응, 쓰레기 처리해 주려고 그랬지. 오라버니도 장하네.”
“…….”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쿠키를 아득아득 씹어 먹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너무 놀렸나?’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하녀가 다시 가져온 꿀이 듬뿍 든 우유를 홀짝홀짝 마셨다.
따뜻한 우유가 몸을 사르르 녹여주는 듯했다.
‘평화롭네.’
어쩌면 내가 미친 과학자에게 가지 않았다면, 그 옛날 과거에 누렸어야 하는 행복일지도 몰랐다.
“자, 이것도 먹고.”
아무튼 평화로운 하루였다.
배는 터질 것 같았지만.
***
후두둑-
산처럼 쌓인 뭔지 모를 것들이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오더니 내 발치에 닿았다.
높이는 내 키를 수배는 뛰어넘고 성인 열 명이 팔을 벌리고 둘러싸도 사람이 모자랄 것 같은 그 넓은 방엔 온갖 간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 내가 평생 먹는다고 해도 이걸 다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의심이 될 ‘확신이 안 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내가 이노스 오브리와 한정판 쿠키로 티 타임을 가진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이게, 뭐야? 메리…, 골드.”
“그게….”
메리가 난감한 듯 어색하게 웃자 골드가 대신 대답했다.
“가주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간식을?”
“네.”
“…이 많은 양을?”
“…네.”
천하의 골드가 대답을 살짝 늦게 했다.
그렇지? 이 양에 나만 놀란 건 아니지? 사실 모두가 놀랄 거야.
이 미친 양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잖아.
“…이건 또 어디서 주우셨대?”
“그게 이건… 주우신 게 아니랍니다.”
“주운 게 아니라고? 그럼 누가 버린 거래?”
“아, 아뇨….”
메리가 얕게 웃는 낯으로 내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공은 지진 난 듯 미친 것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 이번에 인수하신 공장에서 나온 생산품 중 일부라고….”
“일부?”
“네. 아가씨를 위해 ‘직접’,‘발품을 팔아서’,‘괜찮은 공장을 인수했다’고 전달하라고 하셨어요.”
내가 지금 뭘 들었지?
이건 꿈인가?
그래, 어쩌면 꿈일 수도 있겠다.
이게 꿈이 아니면 뭐겠어.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일 리가 없지.
“…라고 거짓말이라도 하랬어?”
“아뇨, 여기 서류입니다.”
나는 급히 서류를 받아 내용을 살폈다. 안에는 가문의 인장이 찍힌 부동산 서류가 있었다.
“…불경한 말이긴 한데, 혹시 아버지가 미치셨다니?”
“그….”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사람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됐어, 나 아버지한테 다녀올게.”
나는 간식의 산을 뚫고 방을 뛰쳐나가 그대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 아네트인데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안에서 짧은 침묵 끝에 허락의 말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평소보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팔짱을 낀, 한층 더 오만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뭐야, 저 포즈.
심지어 왜 서류의 산을 배경으로 책상에 기댄 채 서 있는 건데. 무슨 농담이야, 저건?
‘설마 일부러 자세 잡으려고 나온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어.
“…….”
근데 이 사람, ‘설마’의 명중률이 너무 높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 무슨 일이지?”
내가 손에 떡하니 건물 서류를 들고 있는데 왜 여상하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건데.
무슨 일인지는 일을 벌인 본인이 뻔히 알 것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밖으로 마구잡이로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 험난한 세상,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아버지, 선물… 주셨더라고요.”
“그래, 내가 ‘직접’ 매물을 둘러보고 ‘친히’ 시찰까지 갔다가 계약까지 했지만, 딱히 고마워할 건 없다.”
“…….”
하고 싶은 말이 수십 개가 있었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모두 쏙 들어갔다.
여기서 그게 뭐냐고 하는 순간, 이 인간의 기분은 나락으로 치달을 거다.
당장이라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으면 은혜도 모르고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공작부인께 갈 걸 그랬네.’
혼자서 튀어 나가는 이 사람을 말리기 위해선 공작부인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 네. 너무 기뻐요! 감사해요, 아버지. 선물을 받아본 건 이번이 정말 처음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 어마어마한 서류가 내 첫 선물이기는 했다.
“근데 저는 이런 공장을 받아보는 것도 처음이고 관리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주신 간식만 받아도 될까요?”
“관리는 이쪽에서 할 거다. 수익은 네게 가겠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민데….
“저는 이렇게 큰 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요.”
“앞으론 계속 받을 테니 익숙해지면 되겠군.”
“그게….”
“세미 데뷔탕트를 치른 후 네 앞으로 올 선물은 이것보다 더 클 거다.”
샤콜 오브리가 당당하게 말했다.
어쩌면 나는 귀족의 자격이 없나 봐. 벌써 심장이 벌렁거리고 마음이 무거운 걸 보니까 말이다.
‘아니야, 그냥 맡아둔다고 생각하자.’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줄 물건이라고 생각해 보자고.
- 진짜 딸인 ‘키이’가 오면 어차피 난 쫓겨날 텐데.
머릿속으로 파고든 뜬금없는 음성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 라고 주인님은 생각합니다.
라고, 이상한 기록서가 착각합니다.
- …….
내가 녀석을 따라 하자 순간 기록서가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