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안녕, 카펠.”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카펠이 눈을 반짝 빛내면서 뭔가를 내밀었다.
반짝이는 푸른빛의 꽃이었다. 흐트러지는 물로 빚어 만든 듯, 아름다운 동시에 세상을 비추는 듯 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꽃이다.
일반적인 꽃이라기보단, 꽃 안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어, 꽃이네.”
내가 받지 않고 있자 카펠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내게 꽃을 내밀었다.
“아, 응. 고마워, 카펠. 신기한 꽃이네.”
“…그건 아르고 공작가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만 피울 수 있는 꽃이란다.”
“…저 쪼끄만 게.”
옆을 보니 난감한 기색으로 웃는 알프 아르고와 잔뜩 화가 나 굳은 표정의 샤콜 오브리가 보였다.
‘뭔데….’
다시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서 카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카펠이 한 손으론 내 옷자락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러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카, 카아페에….”
“…….”
아기가 갓 걸음마를 떼듯, 더듬더듬 나온 한껏 잠긴 목소리에 주변이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어, 응. 너 카펠 맞아.”
내가 카펠을 가리키며 그렇게 대답해 주자 카펠이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왜 이렇게 귀여워.’
나보다 두 살은 더 많은데도 귀여워 보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나보다 더 못 먹고 살아서 그런지 몸집이나 체격은 나랑 비슷했지만 말이다.
‘나도 몸이 작은 편인데….’
그런 나와 비슷할 정도면 얘도 나이에 비해 무척 작다는 거겠지.
“카아페!”
카펠이 다시 한번 자기를 가리키며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아, 내 이름을 물어보는 거구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네트.”
“아…?”
“아.네.트.”
“아…네….”
소년은 몇 번이나 작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네!”
애칭으로 삼자면 ‘안’이라는 애칭이 더 어울릴 것 같기는 한데.
“카페! 아네!”
본인은 카페가 되어버렸다.
그래, 카페에 비해 아네는 나은 이름일지도 모르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
그 순간, 카펠이 내 이름을 부르며 활짝 웃었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하염없이 무표정한 얼굴만 하던 소년이 웃은 것이다.
그러더니 내 품에 폭 안겨왔다.
정확히는 본인이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카펠이 나보다 살짝 더 체구가 작은 탓에 그가 내 품에 파묻힌 꼴이 되었다.
“어린것들이 벌써부터…!”
뒤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순식간에 나를 덥석 잡아 자신의 품에 안아 들었다. 졸지에 몸이 허공에 덜렁거렸다.
샤콜 오브리였다.
“아네!”
“내 아들이, 카펠이 말을….”
그나마 도와줄 수 있는 알프 아르고도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카펠은 나를 빼앗긴 게 충격적인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허공에서 몸이 흔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총체적 난국이네.’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다.
“크르르….”
얌전했던 카펠의 목울대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디서 났는지 작은 편지 칼을 작다란 손에 쥔 카펠이 그대로 샤콜 오브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를 한쪽 팔로 품에 안은 샤콜 오브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코웃음을 치는 것이 이 상황이 퍽 가소로운 모양이었다.
“카펠, 안 돼!”
내가 소리치자 달려오던 카펠이 끼이익-!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급히 멈췄다.
나였으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을 것 같은데, 운동신경도 다리 힘도 좋은지 카펠은 멀쩡했다.
“우…?”
카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돼.”
나와 편지 칼과 샤콜 오브리를 번갈아 보던 카펠이 손에 쥐고 있던 편지 칼을 놓았다.
다시 한번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네트.”
“네?”
“다음에 또 놀러 와줄 수 있겠니?”
커다란 덩치의 알프 아르고가 내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카펠과 그가 정말로 한 핏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요.”
샤콜 오브리가 허락해 줄 때나 올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저희도 슬슬 가야겠습니다, 형님.”
“딸이 생겼다고 이 형에게 쌀쌀맞구나, 샤콜.”
알프 아르고가 입술을 툭 내밀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다행히 샤콜 오브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네!”
카펠의 부름에 나는 샤콜 오브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순순히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또 놀러 올게. 공부 더 해서 다음엔 더 많이 대화하자.”
“아네?”
외운 건 이름뿐인 모양이다.
모든 대화를 아네로 해결하려고 하다니.
“공부!”
나는 한쪽에 꽂혀 있는 책장의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펠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샤콜 오브리를 보아하니 슬슬 돌아갈 때였다.
“나중에 또 보자.”
손을 가볍게 흔들자 카펠도 나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동 마법진이 발동됨과 동시에 비명 같은 우짖음이 들려왔다.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속이고 외출하는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
인생에는 몇 번의 위기의 순간이 있다고 한다.
나에겐 아마 오늘이 그런 위기의 순간이 아닐까?
“…너, 미쳤나?”
얼굴을 일그러뜨린 샤콜 오브리를 보며 나는 오늘도 내 선택이 어딘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역시 머리카락은 좀 너무 티가 났지.’
철창에 갇힌 키메라를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다.
녹색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희소성이 있었는지 값을 넉넉하게 받았다. 그걸로 키메라를 데려왔다.
그리고 오는 길에 경비대에 그 가게를 신고했다.
‘지금쯤 경비대나 감찰관이 들이닥쳐서 탈탈 털리고 있겠지만….’
사실 거기까진 문제가 없다.
지금 문제는 나도 털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르고 공작가에 다녀온 뒤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키메라를 사면, 그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이야 희귀 동물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겠지만,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다르다.
키메라가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금세 눈치챌 것이다.
“어떤 새끼가 너 괴롭혔어?”
성큼 다가온 이노스 오브리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그냥 긴 머리가 답답해서….”
“…답답해서?”
“…그, 잘랐어.”
내가 웃으며 뺨을 긁적이자 이노스 오브리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사람을 쓰지 않고 왜 네가 잘라?”
동물 한 마리 사려고 머리카락을 팔았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
“그냥 기분 전환이야.”
나는 이노스 오브리의 잔소리에 대충 대꾸해 주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없는 샤콜 오브리를 흘긋 봤다.
‘엄청 화났다.’
망했다.
“이노스, 너 곧 수업 아니었나?”
샤콜 오브리는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노스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하루 미뤄도 되는 수업이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네, 아버지.”
이노스 오브리가 나를 힐끔거리더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쟤는 뭔가 한층 귀찮아졌어.’
분명히 이노스 오브리를 떨구기 위해 그 위험한 도박까지 했는데, 결론적으로 이노스 오브리는 한층 귀찮은 인간이 되었다.
아침마다 일어나라고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건 기본이고, 식사 시간은 물론 간식 시간까지 꼬박꼬박 찾아오곤 했다.
“너, 앉아봐.”
샤콜 오브리가 사나운 기색으로 내게 턱짓했다.
나는 쭈뼛거리며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소파는 푹신한데, 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지?
“너는 내가 네가 뭘 하는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버지는 아무래도 천재시니까 알지 않을까요….”
나는 적당히 아부의 말을 떠올리곤 눈동자를 느리게 굴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샤콜 오브리의 뺨이 한 차례 움찔했다.
“네가 네 나름대로 선을 긋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네게도 너만의 생각이 있으니 웬만해선 눈감고 넘어가 주려고 했지.”
너무 심각해졌잖아.
“하지만, 그게 너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라면 난 널 통제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게.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요.”
키메라를 키우겠다고 어떻게 말하냐고! 단순한 동물도 아니고 키메라다.
샤콜 오브리가 안 된다고 말하면, 그 순간 아예 가능성조차 막혀버리지 않겠는가.
“그냥 제가 번 돈으로 뭔가 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라….”
안 되겠다.
애교 작전이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 난감한 듯 웃었다. 눈꼬리를 둥글게 휘자 샤콜 오브리의 눈썹이 쓱 휘었다.
“힝,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
내 말에 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