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발목을 제대로 삔 모양이다.
한 차례 삐끗한 발목에 무거운 책들이 우수수 쏟아졌으니 멀쩡한 쪽이 도리어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후우….”
긴 숨을 내쉬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괜찮아, 괜찮아. 아프지 않아.’
이런 건 익숙하잖아.
아니, 익숙한 통증에 비하면 이건 정말 가볍고 우스운 아픔이다.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자기 세뇌를 한 뒤에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오른발에 힘이 많이 들어가기 전에 왼발을 딛자 그렇게 통증이 심하진 않았다.
‘빨리 방에 가서 쉴 수 있는 대로 쉬어두자.’
오늘 돌아갈지 내일 돌아갈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면….
바닥을 보며 느릿느릿 걸어가는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아버지?”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온 듯 화가 난 모양새의 샤콜 오브리가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는…!”
늘 미미하게 찡그려져 있는 미간에 오늘따라 왜 그렇게 선명하게 골이 팼는지 모를 일이다.
일그러진 눈동자 안으로 분노가 비쳤다.
“이게 괜찮은 거냐?”
“아….”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멍청하게 조금 실수해서요. 그래도 하루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 같아서….”
구겨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아버지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내가 너한테 사과나 듣자고 이러는 걸로 보이나?”
“아니었다면 죄송해요.”
다시금 사과를 덧붙이자 오브리 공작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나와 말을 더 섞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주저앉았다.
무릎 따위는 설령 세상이 두 쪽 나도 절대로 꿇을 것 같지 않은 남자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내 한쪽 발을 부드럽게 손에 쥔 채 살피고 있다.
“우왓!”
한쪽 발이 들려진 터라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몸이 결국 뒤로 기우뚱 넘어갈 때였다.
탁, 오브리 공작이 내 손을 붙잡더니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뭐 이런 한심한 놈이 다 있느냐는 눈이었지만, 조금 놀랐다.
내가 넘어질 것 같으면 그냥 넘어지게 둘 줄 알았는데. 왜냐면 오브리 공작은, 더러운 걸 싫어하니까.
“쯧, 이런 미련곰탱이 같으니라고.”
“…네?”
오브리 공작의 손끝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와 삐끗한 발목을 천천히 감쌌다.
“이런 발로 용케도 걸었군.”
“그게… 괜히 말씀드리면 걱정하실까 봐…. 저는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익숙하면 아픔이 좀 덜한가?”
오브리 공작이 내 발목을 느리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눈높이를 맞춘 채 대화하는 건 처음이어서 그런지 조금 긴장이 됐다.
“네, 익숙해지면… 좀 덜 아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어떤 고통이 어떻게 찾아올지를 알고 있으니 모르는 때보단 낫다.
같은 통증을 계속 느끼다 보면 아픔도 조금 무뎌지는 느낌이었고.
“그건 아픔이 덜한 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다.”
“네?”
“익숙함은 아픔이 덜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네가 체념하는 시간이다. 아픔을 감내하는 인내심이 늘어나는 것뿐이지.”
샤콜 오브리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멈칫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귀족 예법 같은 게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요구할 게 있으면 들어달라고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굳이요?”
“오브리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가 요구할 줄도 몰라서 어떡하려고?”
“하라고 하시면 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시면 평생을 고귀하게 자라온 콧대 높은 공녀님부터, 안하무인의 어리광쟁이 말괄량이까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그걸로 하든가.”
인상을 찌푸린 오브리 공작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게 뭔데, 인간아.
이 사람은 주어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단 말이지.
“어리광쟁이, 떼쟁이. 그거로 하라고.”
“언제는 밝고 사랑스러운 천재라면서요.”
“됐어, 자라면서 바뀌었을 수도 있지. 떼쓰고 어리광 부려.”
떼를 쓸 필요도 없고 어리광을 부릴 필요도 없는데 순 억지다.
“밖에선 그렇게 할게요.”
“지금부터 해.”
“왜요?”
“밖이잖아.”
“갑자기 성격이 바뀌면 제가 미친 사람밖에 더 되겠어요…?”
“뭐 어때, 감히 누가 뭐라고 하겠어.”
어휴, 말이 안 통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이름은 을니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심지어 거꾸로 봐도 을인 것을.
“가지고 싶은 건 참지 말고 말하도록.”
“가지고 싶은 게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럽게 이게 뭔가 싶어 멀뚱하게 바라보자 오브리 공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그거다.”
“그거요?”
“네가 멍청하게 넘어져서 또 발목을 삐끗하면 내가 귀찮아지니 특별히 잡아주는 거다.”
“방금 치료했잖아요.”
“치료가 만능인 줄 아나? 치료해도 한동안은 조심하지 않으면 다시 재발한다. 그러니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 아닙니다, 만능입니다.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응? 내 목소리와 머릿속 목소리가 순간 겹쳤다. 고개를 들다 말고 엉거주춤 굳었다.
- 딴따라란~ 알립니다.
진짜,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미리 알림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된다고.
- 녹의 힘을 물려받은 가주의 치유 능력은 외상과 내상에 한해서는 죽기 직전의 사람까지 단숨에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그런 거야?
- 다만 ‘자연적인 병’을 막진 못합니다. 하지만, 병에 의해 괴사한 피부를 치료하거나 내장 등을 치료해 생명을 늘릴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만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한 차례 눈을 깜빡이며 아직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오브리 공작의 손바닥 위로 내 손을 올렸다.
“녹의 힘이 만능이기만 했어도 이런 귀찮은 짓 따윈 안 했을 텐데….”
- 거의 만능입니다.
진짜 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결국 그거잖아.’
날 걱정했다는 거잖아.
“듣고 있나? 그러니까 앞으론 다치지 말라는 거다. 귀찮으니까.”
“네, 아버지.”
숨기려고 해도 입가가 자꾸만 풀어졌다. 이 서툰 남자의 진심이 느껴진 탓이다.
“아버지.”
“왜?”
“요컨대, 혹시 저 걱정했어요?”
반쯤은 놀리려고 내뱉은 말이었다. 분명히 “걱정은 무슨!”이라는 말 따위를 내뱉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난 누군가를 치료해 주는 일 따윈 질색이다.”
샤콜 오브리가 갑자기 다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내 눈앞에서 누군가 죽어가도, 내가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어도, 나는 이 세상의 99%의 사람을 살리지 않을 거다.”
“아…, 네.”
“남은 1%의 사람 중 0.5%는 이해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살리는 것일 테고.”
그제야 나는 샤콜 오브리가 지금껏 하지 않았던,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쭙잖게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샤콜 오브리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렇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인간적이지 않으니까.”
“네.”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힘 있게 대답했다.
“…….”
샤콜 오브리의 매서운 시선이 내게 닿았다.
슬쩍 눈을 피하자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내 보폭에 맞춰 걸음을 걸었다.
“너는.”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내가 살릴 0.5%의 인간이 되겠지.”
“…이해관계에 의해서요?”
“아니. 나머지 0.5%.”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였다.
“5년짜리든, 계약관계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러니 가지고 싶은 거든 원하는 거든 편하게 얘기해. 난 돈도 권력도 명예도, 심지어 외모까지 완벽하니까.”
감동이 마지막에 와장창 깨졌다.
그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옆을 쫓아가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없어요.”
“없으면 만들어.”
“순 억지.”
정말 가지고 싶은 건 없다.
그는 모르겠지만, 이미 바라는 건 그가 줬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아, 곤란하네.’
정말 난감했다.
오브리 공작가의 일은 오브리 공작가의 일로 남겨두고자 했다. 내가 끼어들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에휴.”
“왜, 아직 아픈가?”
“아뇨, 아버지 덕분에 아픈 곳은 하나도 없어요.”
하는 수 없다.
“5년짜리든, 계약관계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라는 거야.”
이런 말을 들었으니까, 나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잖아.
공작부인이 앓고 있는 병의 치료제를 만들었던 여자 연구원.
그 연구원을 찾을 수밖에.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네.’
무거운 마음과는 다르게 어쩐지 발걸음은 조금 가벼운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