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0)

<22화>

‘팔 아파….’

스테이크만 몇 덩어리를 썰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샤콜 오브리를 비롯해 사용인들 모두가 카펠이 스스로 의자에 앉았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버렸다.

알프 아르고마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면서 고개를 숙여 부탁하니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사사삭-

사사삭-

뒤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타박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천이 스치는 소리였다.

걸음을 뚝 멈추자, 따라오던 소리도 뚝 멈췄다.

나는 식사 후에 짧은 낮잠을 잔 뒤 아르고 공작저의 서고를 구경하러 가는 도중이었다.

그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혹이 하나 따라붙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니 모퉁이 사이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카펠 아르고가 보였다.

덥수룩한 머리 때문에 무슨 눈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휴….”

아르고 가문인데 아르고 가문의 후계자가 저렇게 따라다니는 걸 보기도 좀 그랬다.

‘호위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잘도 따돌렸다 싶다.

결정을 내리니 행동하기는 쉬웠다. 나는 몸을 돌려 카펠 아르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같이 가자.”

카펠 아르고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

내가 내 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양손을 서로 맞잡고 걸어가는 시늉을 하자 카펠 아르고가 어린아이처럼 내게 후다닥 뛰어나왔다.

얼굴은 무표정한데 행동으로 감정이 다 드러났다.

- 딴따라란~ 알립니다.

머릿속으로 끼어든 뜬금없는 생각에 순간 몸이 기우뚱했다.

국어책을 읽는 듯한 딱딱한 말투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당황스러웠던 탓이다.

- ‘카펠 아르고’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받아 무표정합니다.

대체 딴따라란이 뭐야….

다른 의미로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아, 설마….’

내가 예고 좀 하라고 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 ‘주인님’의 생각이 옳습니다. 아니라곤 말하지 않겠습니다.

얘가 사람 맥이네.

내가 오도카니 서서 머릿속의 ‘기록서’와 기 싸움을 하고 있는데 내밀고 있던 손 위로 따뜻하고 거친 것이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어린아이의 손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에 굳은살이 가득한,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친 손이었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카펠 아르고가 내 손바닥에 제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냥 손을 내밀면 강아지가 손을 올리는 것처럼 올리기만 한 것뿐이었지만.

“…가자.”

나는 카펠의 손을 살짝 맞잡으며 마저 서고로 향했다.

서고로 가니 책이 정말 빼곡했다.

나는 개중에서 저주나 고대어, 주술이나 그게 아니면 오컬트적인 현상이 적힌 책들 몇 권을 꺼내 책상에 앉았다.

그러자 카펠 아르고가 나를 유심히 보더니 아무 책이나 뽑아 내 옆에 앉아 책을 펼쳤다.

책의 위아래가 반대로 뒤집혀 말 그대로 내 모양새만 따라 한 꼴이 되었다.

‘뭐가 보이긴 보이나?’

머리카락을 들춰보려고 손을 뻗자 카펠 아르고가 이를 드러냈다.

‘음, 자극하는 건 관두자.’

나는 근처에 있던 그림책 두어 권을 뽑아 카펠 아르고에게 내밀었다.

글씨만 빼곡한 것보단 그림이 가득한 게 낫겠지 싶어서였다.

내가 안을 보여주자 카펠 아르고가 제 책을 내동댕이치더니 내가 내민 그림책을 가져가 펼쳤다.

나도 그제야 안심하고 책을 펼쳤다.

‘팔에 있는 고대어를 없앨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한부 인생이라고 한들, 그것이 내가 삶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잘만 이겨내면….’

평생 오브리 공작가의 지원을 받아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 딴따라란~ 알립니다.

아, 진짜… 깬다, 깨.

- 오브리 공작가는 멸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로사나 오브리’의 죽음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아, 그러네.

공작부인이 죽는구나. 그 오만했던 샤콜 오브리도 무너지겠지. 이노스 오브리는 길거리로 내쫓기고 거길 차지하는 것은….

- 바로 이 세계의 여주인공, ‘셰키나 오브리’입니다.

머릿속을 스치는 말에 나는 움직임을 뚝 멈췄다.

‘셰키나, 오브리?’

그게 누구더라.

낯설면서도 그렇게까지 낯설지 않은 미묘한 이름이다.

「2016년 1월 3일

<녹.눈> 오늘 연재분도 최고였어! 미쳤다, 미쳤어.

잃어버린 딸을 이렇게 입양하게 되는구나. 얘가 여주인공이겠지? 암튼 몰라, 키이 너무 귀엽다.

나도 키이가 되고 싶다.

순식간에 공작가를 휘어잡다니 최고야. 오브리 공작 너무 츤데레 아니냐고 ㅋㅋ 거의 팔불출 딸바보네.」

그 순간, 문득‘기록실’에 가서 보았던 ‘기록서’의 일기 같은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키이….’

아, 저게 원래 내 자리에 입양될 예정이었던 아이의 이름이구나.

어쩐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불쾌함이 배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에 나는 손을 내려 배를 감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가족도 아닌데, 진짜가 돌아온다고 해서 내가 불쾌할 게 뭐야?

나는 머리를 휘휘 젓곤 책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고대어’가 몸에 새겨지는 저주나 주술에 대해선 나와 있지 않았다.

‘하긴….’

미친 과학자는 금기된 주술이나 저주 따위를 연구하곤 했다.

그런 금기된 내용이 적힌 책이 누구에게나 공개된 이런 공작가 서고에 넉살 좋게 놓여 있을 리가 없지.

“이만 갈까.”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끼이익-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짙게 졌다.

고개를 돌리자 카펠 아르고가 책을 꺼내기 위해 책장을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책장 하나가 그대로 기우뚱했다.

“야, 야!”

저대로 쏟아지면 카펠 아르고가 크게 다칠 것이다.

“안 돼!”

나는 급히 달려가 몸을 날렸다.

내 비명 같은 외침에 카펠 아르고가 책장에서 손을 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지만, 책장은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나는 그대로 카펠을 끌어안고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콰앙-!

굉음과 함께 발목에 아찔한 통증이 덮쳤다.

나는 카펠 아르고를 조금 더 끌어안아 보호했다.

책장에서 후두두 떨어진 책이 등을 몇 번 때리고 갔지만, 발목에 비하면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아…?”

내 아래에 있는 카펠 아르고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친 곳은?”

“우으…?”

아, 말을 못 알아듣지.

그래도 눈으로 살피기엔 다행히 멀쩡했다.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는 걸 보니 괜찮은 듯했다.

‘어휴, 쫓겨날 뻔했네….’

카펠 아르고가 다쳤으면 샤펠 오브리가 얼마나 눈치를 줬을지 생각만 해도 위가 쓰렸다.

게다가 카펠을 서고까지 데리고 온 건 말할 것도 없이 나였으니까.

벌컥-!

문이 열렸다.

“꺄아아악!”

“세상에, 도련님!”

안으로 들어온 하녀가 비명을 지르고 사복을 입은 기사로 보이는 이가 기함을 토했다.

책장 하나가 다른 하나에 어중간하게 걸쳐진 탓에 나와 카펠은 여전히 넘어진 책장 틈에 납작 엎드려 있는 채였다.

사용인들이 몰려 들어와 급히 책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얘는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무너뜨린 거야.’

역시 남자 주인공이라면 남자 주인공이다.

“카펠!!”

경악에 찬 음성에 고개를 들자 서고로 달려들어 오는 알프 아르고와 그 뒤를 따라온 샤콜 오브리가 보였다.

나는 카펠을 먼저 내보내고 그 뒤를 따라 기어 나갔다.

“카펠! 다친 곳은 없느냐?”

알프 아르고가 일그러진 얼굴로 제 아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카펠은 끌어안긴 것이 불편한지 버둥거리느라 바빠 보였지만 말이다.

‘다행이다….’

카펠은 정말로 멀쩡한 듯했다.

안도하고 있는 내게 샤콜 오브리가 다가왔다.

“아네트.”

“네, 아버지. 다행히 카펠은 무사해요!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아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넌, 내가….”

샤콜 오브리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뭐라고 말하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왜 화가 난 거지?’

굳은 얼굴의 샤콜 오브리를 보아하니 영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알프 아르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프 아르고는 안도한 표정으로 연신 카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분명 저런 게 진짜 부모라는 거겠지. 나는 태어나 평생 느낀 적이 없는 것이지만.

딱히 이제 와서 부럽거나 하진 않았다.

노력해도 주어지지 않을 무언가를 갈망하는 건 비참함을 넘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그, 아버지. 멋대로 카펠을 서고에 데리고 와서 죄송해요. 절 쫓아오기에 그냥….”

“…….”

내가 옆에서 중얼거리며 사과를 건네도 그는 굳은 낯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아직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 또….”

뭘 잘못했더라?

“그, 카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죄송하고요…. 제가 제대로 살폈으면….”

“그만.”

샤콜 오브리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닫았다.

“너.”

“네.”

“넌 괜찮나?”

“네? 아, 네.”

“그래, 그럼 됐다.”

그가 몸을 홱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샤콜 오브리의 등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왜 저렇게 퉁명스러운 건지 모르겠네.’

내가 멀뚱멀뚱 서 있자 샤콜 오브리가 서고를 나서려다 말고 걸음을 뚝 멈췄다.

“안 갈 건가?”

“아….”

나는 방긋 웃었다.

“그게, 재밌게 읽던 책을 잃어버려서요. 찾아서 금방 따라갈게요.”

“그러든가.”

샤콜 오브리가 퉁명스럽게 말하곤 휙 서고를 나가 버렸다.

알프 아르고도 아마 정신없이 나간 모양이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용인들 사이로 나도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욱신-!

한 발자국 걷기도 전에 발목에서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나는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큰일 났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오브리 공작이 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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