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 솔직하지 못한 인간은 언제쯤 철이 드는 걸까?’
어쩌면 이게 철이 다 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와,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저 해사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안에 든 씨앗이 신기해서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자 그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원래 직계가 아니면 주지 않는 건데 내가 특별히 챙겨 주는 거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이게 뭔가요?”
“녹의 힘이 담긴 씨앗이다. 지니고 있으면 널 보호해 줄 거다.”
“녹의 힘….”
내가 작게 읊조리자 팔짱을 낀 오브리 공작이 작은 탄성을 흘리더니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고 보니 넌 모르겠군. 설명해 줄 테니 저기 앉아봐라.”
그가 가리킨 곳은 침대였다.
보석을 두 손으로 쥔 채 살짝 걸터앉자 그가 책상 의자를 가져와 내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제국엔 네 개의 개국공신 가문이 있다.”
“네.”
“그 가문엔 나라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수호하는 힘이 있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문은 녹(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다룰 수 있으며 웬만한 외상과 내상의 치유가 가능하지.”
언뜻 알고 있던 것 같기도 한 신기한 이야기에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아르고 가문은 청(靑)이다. 물이 조금이라도 섞인 것이라면 뭐든 그들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보면 된다. 정화의 힘이 있다.”
“정화라면 어떤 거예요?”
“오염되고 더러운 물을 당장 마셔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청량한 것으로 정화할 수 있다.”
정화라니 굉장히 좋은 능력이구나 싶었다. 어디 고립되어도 죽을 위험이 현저히 낮아지니까.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동부의 이그나 가문은 적(赤)의 힘을 가졌지. 불을 다루는 놈들이고,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한마디로 야만인들이니 혹시나 엮일 것 같으면 그냥 무시해라. 소멸의 힘이 있거든.”
“네에….”
아무래도 그는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다. 말하는 내내 표정이 전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마지막은 흑(黑)의 아데우스 가문.”
샤콜 오브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놈들은…, 그다지 사교성 있는 놈들이 아니라 아마 볼 일이 없을 거다. 어둠을 다루는 놈들이라 성격들도 음침하기 짝이 없지. 혹여나 만난다면 상종도 하지 마라.”
문득 듣다 보니 한 가지 깨닫는 게 있었다.
아, 그냥 이 사람은 아르고 공작가의 알프 아르고 빼면 다 마음에 안 드는 거구나.
사람의 편애가 이렇게까지 치우쳐져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네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번에 제가 물에 빠졌을 때 물려주셨던 것도….”
“물비늘 나무의 씨앗이다. 씨앗 자체가 산소를 머금고 있어서 물속에서도 한동안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지.”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걸 바로 떠올려 사용했다는 건가?
그냥 돈 많고 성격 더러운 새침데기인 줄 알았는데 공작이 될 능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식물의 효능이나 효과를 전부 외우신 거예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능력이 있어도 알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와…, 아버지 정말 대단한 분이시구나.”
내 말에 오브리 공작의 입술 끝이 움찔 떨렸다.
“역시 아버지는 천재신가 봐요, 저는 그런 거 잘하지 못하거든요.”
외우고 있는 거라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약초나 혹은 미친 과학자에게 도움이 되는 독초뿐이다.
“아버지는 천재예요!”
오브리 공작의 뺨이 움찔거렸다.
“아버지 같은 천재는 흔치 않을걸요!”
“당연한 소리.”
“아버지가 제 아버지라 너무 좋아요!”
“크흠.”
“아버지가 저 구해 주실 때 용사님 같았어요!”
몇 마디 더 덧붙이자 오브리 공작은 어느새 움찔거리는 뺨을 숨기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서비스는 이 정도면 됐나?’
귀한 걸 나눠줬으니 열심히 입으로라도 딸랑거려야지.
다행히 고객님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뭐, 고마운 건 사실이지.’
사실 오브리 공작이 아니었으면 나는 미친 과학자에게 다시 팔려 갔겠지.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상인 가문에 입양 갔거나.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대접받으며 편하게 살지는 못했을 거다.
그러니까 사실 귀찮긴 해도 오브리 공작에겐 감사하고 있다.
“그래, 뭐….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자기애가 뛰어난 사람은 겸손이라곤 없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네가 해 준 음식.”
“아…, 너무 수준 낮은 걸 드려서 죄송해요. 괜히 제 욕심에 100데르크짜리 고기로 만든 스튜 따위를 드려서….”
“얼마?”
“100데르크요.”
“그게 100데르크였다고?”
고기의 누린내도 잡내도 없고, 심지어는 부들부들하기까지 했던 그 소고기 스튜가?
겨우 길거리에서 싸구려 좌판 음식 사 먹을 돈보다 더 저렴한 고기로 만들었던 거라고?
“네, 다시는 안 할게요.”
“누가!”
그가 반사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오브리 공작은 제가 낸 소리에 조금 당황했는지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가 하지 말라고 했느냐?”
“하지만….”
“뭐, 생각해 보니 그거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아, 네. 그래도 다음부턴 안 할게요.”
그래도 뭐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내 말에 그가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인상을 확 구기곤 짓씹듯 말을 덧붙였다.
“뭐…, 그렇다는 거다. 그럼 바빠서 이만 가도록 하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그가 흘긋 나를 보곤 몸을 홱 돌렸다.
성큼성큼 나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굉장히 성이 난 듯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었길 바란다.
***
“여기가 북부다.”
“저택, 이네요…?”
이틀째가 되자마자 아침부터 성화를 부리는 오브리 공작 덕에 이른 시간부터 북부행 이동 마법진에 오른 나는 덜 깬 눈을 비비며 말했다.
마법진에 올라가서 겨우 1~2분이 지났나 싶었는데 벌써 도착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다른 가문에 오면서 겨우 둘이서만 오다니….’
샤콜 오브리가 얼마나 알프 아르고를 믿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긴 지하실인가?’
오로지 이동을 위한 공간인 듯 사방엔 아무것도 없이 꽤 삭막했다.
벌컥-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며 여러 명의 사용인과 제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샤콜!”
은회색 머리카락에 색이 아주 짙은 푸른색 눈동자다. 심해를 보듯 남빛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딜 봐도 육체 강화형은 아닌 오브리 공작보다 두 배는 큰 덩치에 보기 좋은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남자는 중년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외모였다.
‘이 사람이 알프 아르고.’
마물이 들끓는 혹한의 북부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청의 지배자인 북부의 주인.
그가 휘두르는 대검은 집채만 한 바위도 산산조각을 낼 정도로 강력하다고 했다.
“형님.”
“어서 오거라.”
알프 아고르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오브리 공작을 힘껏 끌어안아 반겼다.
오브리 공작의 뺨이 살짝 상기된 것을 보아하니 퍽 기쁘고 즐거운 모양이다.
‘와, 이 사람 이런 표정도 하는구나.’
맨날 삐딱하니 팔짱이나 끼고 세상만사가 심드렁하다는 것 외에 다른 표정은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람은 사람이었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긴, 샤콜 오브리는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것에 한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으니까 말이다.
그 울타리가 본인이 두 팔 벌려 끌어안을 수 있는 정도라는 게 문제지만.
사람 두셋을 넘으면 정원 초과라는 얘기다.
“어서 오렴. 딸을 찾았다고!”
“네, 다행히 고아원 중 한 곳에 있었습니다. 형님의 말대로 포기하지 않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이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 솔직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웃으며 뺨을 붉히고 있으니 뭔가 이상하다.
‘좋아하는 건 드러내지 않는 거 아니었나?’
아, 알프 아르고에 한해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샤콜 오브리가 좋아하는 걸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며 또 상대를 지키기 위함이다.
알프 아르고는 제국에서 무력만으로 따지자면 가장 강하다.
오브리 공작이 솔직한 애정을 드러내도 누구도 알프 아르고를 꺾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아이구나.”
알프 아르고가 나를 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아네트 오브리라고 해요!”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예법이 아주 능숙하구나.”
“아버지를 닮아서 천재라 그런가 봐요!”
내가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알프 아르고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아버지가 천재이긴 천재지. 만나서 반갑다. 알프 아르고라고 한단다.”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주아주 멋진 분이시라고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덧붙인 말에 알프 아르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른 아침부터 왔으니 아직 졸리겠구나. 방을 마련할 테니 아침 식사하고 낮잠을 좀 더 자렴.”
알프 아르고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호쾌하게 쓰다듬었다. 슥슥 문지르는 손길엔 애정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되겠구나. 피곤하면 그렇게 하렴.”
“네, 아버지.”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알프 아르고가 우리를 곧장 식당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식당은 아주 크고 넓었으며, 커다란 둥근 테이블 위에는 아침 식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배불러.’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앉거라.”
“네, 형님.”
샤콜 오브리가 알프 아르고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알프 아르고의 맞은편이자 샤콜 오브리의 옆자리에 앉았고.
내 오른쪽으론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는데 식기는 놓여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또 올 예정인 듯했다.
“카펠은?”
“그게….”
알프 아르고의 질문에 곁에 있던 집사로 보이는 이가 난색을 표했다.
“지금 모셔 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네트, 내 아들이 아직 제대로 된 예법을 배우지 못했단다. 이해를 좀 해줄 수 있겠니?”
“네, 아르고 공작님.”
“우리 사이에 공작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하구나.”
선생님이랑 제가 무슨 사이인데요….
우리 오늘 초면인데.
“나는 그냥 삼촌이면 된단다.”
“네, 알프 삼촌.”
알프 아르고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크르르르! 크아악!”
그 순간이었다.
밖에서 웬 짐승의 우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