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쯧, 그렇게 갖고 싶었으면 그때 말했으면 됐지.”
“아무래도 눈치를 많이 보시니까 생각이 필요하셨을 겁니다. 곧 각하께 말씀하러 오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그렇겠지.”
골드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샤콜 오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말을 할 곳이 없을 테니.’
샤콜 오브리가 생각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다. 잘 돌보도록 해. ‘녹풍(綠風)’인 너희에게 맡긴 건 그 때문이니.”
“네, 각하.”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가 보도록. 그리고 주방장인 샤트란을 불러와.”
“네, 명 받들고 물러나겠습니다.”
녹풍은 오브리 가문을 지키는 정예 기사단이었다.
한 사람이 일반 기사 열 명에서 스무 명을 단번에 압도할 힘을 가진 막강한 존재들.
그런 기사를 아이의 호위 겸 시중을 들 시녀로 붙인 것은 어디까지나 반쯤은 충동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뭐, 조만간 쭈뼛거리며 주방장이 만든 음식 같은 하찮은 뇌물을 들고 자신을 찾아올 아이의 모습이 퍽 궁금하기도 했다.
“각하, 들어가도 됩니까?”
“들어와라.”
샤콜 오브리의 허락에 문이 벌컥 열리며 활활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조리복을 입은 여자의 눈매는 상당히 매서웠고 걸음걸이는 건들거렸으며, 허리춤에는 사각 식칼이 달랑거리면서 매달려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는데요?”
“샤트란, 내가 걸음걸이에는 신경을 쓰라고 했을 텐데.”
“예예.”
샤트란이 짝다리를 짚고 선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샤콜 오브리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요즘 음식 맛이 꽤 좋아졌던데. 특히 고기 요리의 수준이 올랐더군.”
“아, 네. 뭐 덕분에요.”
샤트란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미식가이신 각하께서 음식 품평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뭐 때문에 불렀어요?”
그러곤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허스키하고 껄렁한 목소리와 자세까지 합쳐져 뒷골목 불량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 딸이 돌아온 건 알고 있나?”
“네, 뭐….”
모를 리가 없었다.
얼마 전, 그 아이가 주방을 한 차례 뒤집어엎고 간 덕분에 한동안 요리사들이 시끌시끌했으니까.
“그 애가 저번처럼 찾아가서 부탁할 수도 있다.”
“그래요? 언제쯤 온답니까?”
시종일관 피곤함이 들어차 흥미 없어 보이던 샤트란의 눈이 살짝 빛났다.
그날, 하필이면 낮잠을 자러 가느라 만나지 못했던 그 획기적인 조리법을 알려준 아이를 그녀도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모르는 조리법을 잔뜩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조만간 갈 거다. 그땐 너무 무겁지 않은 음식으로 만들어 주도록.”
“만들어 주다뇨?”
샤트란이 의아한 낯으로 반문했다.
“일전에 아이가 부탁해서 소고기 스튜와 베리 파이를 만들어서 내게 보냈지 않나?”
“제가요? 아뇨, 전 그때 자고 있었습니다.”
“뭐? 그럼 부주방장이 했나?”
오브리 공작의 말에 샤트란이 눈을 끔뻑거리며 얼굴을 대번에 구겼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뭔 소릴 하십니까? 그거 아가씨가 직접 만드신 거잖아요.”
“…뭐?”
다소 날카로운 샤트란의 말에 샤콜 오브리가 굳었다.
“디노에게 듣자 하니 주방은 빌려줄 수 없다고 하니까 아가씨께서 애들한테 새로운 조리법까지 알려주면서 요리해 갔다고 들었는데요.”
“…새로운 조리법?”
“네, 그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풍미가 깊어진 거. 다 아가씨께서 알려주신 조리법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샤트란도 긴가민가했다.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돌아온 귀족 아가씨가 새로운 조리법을 안다고?
그러나 음식을 먹어본 순간 믿을 수밖에 없었다.
100데르크짜리라곤 믿을 수 없는 고기의 맛이었다. 입에서 말 그대로 고기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뿐이랴, 음식 솜씨도 뛰어났다.
오죽하면 부주방장, 디노의 멱살을 잡고 정말이냐고 캐물었을 정도였다.
“…….”
“설마 제가 만든 줄 아신 겁니까?”
샤콜 오브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
“혹시 그 틱틱거리는 거 아가씨가 만든 음식을 보고도 그랬어요?”
심드렁하던 샤트란의 얼굴이 퍽 즐거움에 젖어들었다. 키득키득 웃는 것이 이 상황이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가라고 했다. 잘리고 싶나?”
“잘라보시든가요. 그 까다로운 혀 만족시킬 요리사가 어디 흔한가.”
샤콜 오브리가 샤트란을 노려보자 그제야 샤트란이 뭉그적거리며 슬쩍 방을 나섰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샤콜 오브리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이상한 음식을 가져오는구나.”
“싫어하세요…?”
“글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내 딸이 기껏 ‘날 위해’ 가져다줬으니 어쩔 수 없지.”
그날, 그 대화가 선명하게, 잡음 하나 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떠세요?”
“뭐, 그냥저냥이구나.”
그것도 토씨 하나 빠짐없이.
“이런 맛없는 걸 가져와서 죄송해요.”
“됐다, 그냥 두고 가. 페드로에게 치우게 할 테니. 공녀가 체통 없이 그런 거 들고 다니는 거 아니다.”
아주 선명하게도 말이다.
모든 장면이 후루룩 떠오른 샤콜 오브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
그는 일생에 있어 딱히 후회하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그가 결정하는 것들은 충분히 심사숙고가 이루어진 후에 진행되었으며, 설령 심사숙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대개는 그의 뻔뻔한 성정으로 해결되곤 했다.
샤콜 오브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앉았다.
그러다 다시 벌떡 일어나고 또다시 앉았다.
누군가 보면 저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오브리 공작을 보는 건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를지도 몰랐다.
한참을 서성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결국 방을 나섰다.
***
“팔 게 뭐가 있지?”
나는 거울 앞에 선 채 내 몸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사지는 멀쩡해야 하니 그냥 두자.
그렇다고 피를 뽑아 팔기엔, 뒷세계 루트까지 뚫어야 하니 귀찮아질 거다.
“남는 건….”
나는 손가락 끝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슬쩍 훑었다.
이쪽으로 와서 그거 며칠 좋은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고 머리카락이 꽤 부들부들했다.
‘이거면 되려나?’
수집가 중에는 다양한 색의 머리카락을 꽤 비싼 값에 사 가는 특이 취향의 인간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요 며칠 관리받았다고 머리카락 질은 좋다.
가발을 만들거나 각종 의료 행위를 하는 데도 사용한다고 들었으니까.
거울 앞에 오도카니 선 채 머리카락의 값어치를 매기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들어와.”
메리나 골드라고 생각했는데 들어온 것은 의외로 오브리 공작이었다.
“아버지?”
“뭐 하고 있었지?”
그가 뒷짐을 진 채 들어와 두어 차례 헛기침을 하곤 물었다.
“아, 그냥요. 어쩐 일이세요?”
“큼, 북부로 간다고 한 거 이틀 뒤에 가려고 한다.”
“아, 네.”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
아무리 여기가 수도라고 한들, 북쪽까지 가려면 말로 쉬지 않고 달려도 최소 열흘이다.
“오래 걸리나요?”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테니 오래 걸리진 않겠지.”
“이동 마법진이요?”
“그래, 형님네와 나는 마법진을 서로 연결해 뒀거든.”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방긋 웃었다.
“잘 채비할게요.”
“그래, 그리고 거기 가면 너보다 두 살 많은 남자애가 하나 있다. 형님의 아들이야.”
“네.”
누군지 알 것 같다.
아마 그가 이 세계의 진짜 남자 주인공이겠지.
카펠 아르고.
그는 아르고 가문의 외동으로 어린 시절 납치당해 마물의 숲에 버려졌다가 마물에게 마물처럼 길러졌다.
짐승보다 더 짐승 같게.
그러다가 한 암살 조직이 임무 도중 카펠을 키워준 어미 마물을 죽여버리고 그를 줍는다.
카펠 아르고의 재능을 알아본 암살 조직은 그를 어린 나이에 살수로 키워낸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윤리도 도덕도 없는, 오로지 본능과 명령만을 지키는 괴물로.
그렇게 그가 열둘이 되던 해, 아르고 가문이 암살 조직의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가 카펠을 발견한다.
“넌 가서 형님을 안심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아이를 찾았는데 내가 딸을 찾지 못한 걸 꽤 걱정하셨거든.”
“네, 아버지.”
“형님의 아이와도 적당히 어울려줘. 그 애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사나운 편이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니까.”
내가 예의 바르게 대답하자 오브리 공작이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너는 나랑 둘이 있을 땐 분위기가 다르군.”
“싫으세요?”
그럼 웃으면 되지.
“걱정하지 마세요, 시키신 일은 실수 없이 잘할게요.”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아 방긋 웃으며 말하자 오브리 공작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
그가 계속해서 뒷짐을 지고 있던 등 뒤에서 뭔가를 꺼냈다.
녹색 보석 하나가 체인에 덩그러니 달린 다소 투박하고 심플한 목걸이였다.
오묘한 빛을 내뿜는 보석 안에는 무언가가 화석처럼 들어 있었는데 언뜻 씨앗처럼 보였다.
“이게 뭔가요?”
“몰라, 오다 주웠다.”
너는 보석을 오다 줍냐?
퉁명스러운 말에 따져 묻고 싶은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