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30)

<14화>

“도착했군.”

마차가 멈추자 마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오브리 공작은 오만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살짝 허리를 숙이는 모습까지도 우아했다. 그가 에스코트하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오브리 공작이 나를 아래로 내려주었다.

여전히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 비뚜름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알아챌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남의 표정이나 감정 변화에 예민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무려 십몇 년 동안 예민한 미친 과학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던 인간이다.

그의 기분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가서 보거라.”

“네.”

마부가 장난감 가게의 문을 열어주었다. 화려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다양한 장난감이 가득했다.

‘여긴 귀족을 위한 장난감 가게인가 보네.’

무슨 장난감들이 이렇게 번쩍거리는지….

‘아무래도 하나쯤 고르는 게 낫겠지.’

내가 오자고 했는데 하나도 고르지 않으면 좀 그러니까 말이다.

“마음에 드는 게 있나?”

“네!”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적당히 인형 하나 사 달라고 하자.’

내 해사한 미소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오브리 공작의 입가에 순간 비웃음이 맺혔다.

“그래? 이봐, 주인장. 있나?”

“네, 나으리. 뭘 도와드릴까요?”

“이 가게 얼마지?”

“네?”

“이 가게 내가 인수하도록 하지. 얼마를 원하는지 적어.”

오브리 공작이 안주머니에서 흰색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사태 파악을 채 하지 못한 나만 멀뚱하게 서서 눈을 끔뻑이고 있을 뿐이다.

“그, 그게….”

“싫나?”

“아, 아닙니다!”

가게 주인이 급히 펜을 가지고 오더니 제 바짓자락에 손바닥을 벅벅 문질러 닦곤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았다.

“자, 잠깐만요.”

내가 당황해서 오브리 공작의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그는 나를 힐긋 내려다보곤 다시 장난감 가게 주인을 보았다.

“아버지!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그럼 이 내가, 네게 인형 하나만 사 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담이 너무 작구나, 딸아.”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사이 가게 주인이 쭈뼛거리며 종이를 내밀었다.

“이,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브리 공작은 내게 보란 듯이 그 위에 사인을 했다.

특수 염료로 된 펜이었던 듯 사인이 은은하게 녹색으로 빛났다.

“좋아, 이만 가지.”

오브리 공작이 몸을 휙 돌려 장난감 가게를 나섰다.

나는 가게에 오도카니 서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터라 그의 뒤를 쫓았다.

“다음은…, 옷 가게였나? 출발하도록.”

내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오브리 공작이 명령했다.

마차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쳤다.

“아버지, 장난감 가게는 왜 갑자기 사신 거예요?”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니.”

“그건 인형 하나가….”

“어떤 인형이었든 상관없었잖니.”

나는 눈을 끔뻑이며 오브리 공작을 멀뚱히 보았다.

“내 하나뿐인 딸이 이렇게나 담력이 약해서야. 돈은 이렇게 쓰는 거란다.”

그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화났네.’

대체 무엇에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것도 매애애애우.

도착한 부티크는 입구부터 장난감 가게보다 수배는 더 화려했다.

이 가게는 어린 귀족들을 위한 옷을 주로 파는지 아동용 드레스와 정장이 많았다.

“아, 아버지! 전 이 분홍색 드레스가 좋은 것 같아요!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천재인 저한테 딱 어울릴 것 같은데요…!”

혹시나 내가 제대로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아서 가게를 통째로 산 건가 싶어서 이번엔 제대로 이유까지 밝혔다.

“그래?”

오브리 공작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정말 기분 좋아서 웃는 거라기보단 가소롭지도 않다는 웃음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마담.”

“네, 공작 각하.”

미소를 지은 그는 마치 지옥에서 온 사자 같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아버지…!”

“내 딸의 치수로 제작하도록.”

그가 검지로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말했다.

“저, 저, 전부요?”

“그래, 가격은 공작가로 청구하도록 해.”

“네, 네. 알겠습니다! 공녀님,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치수를 재겠습니다.”

“아니, 전 이렇게 많이 필요가….”

“이쪽입니다!”

부티크의 직원 전부가 내게 달라붙어 하나하나 치수를 꼼꼼하게 재기 시작했다.

필요 없다고 말해도 들어먹는 인간이 없었다.

내가 기진맥진해서 나가자 팔짱을 끼고 있던 오브리 공작이 몸을 돌려 가게를 나서더니 마차에 오르려고 했다.

“다음은 보석 가게군.”

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닌 것 같아.

“아, 아버지!”

나는 급히 마차에 오르려는 오브리 공작의 다리에 덥석 매달렸다.

오브리 공작의 몸이 살짝 굳었다.

“왜?”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 저… 저…. 그냥 아버지랑 같이 걸으면서 수도 구경하고 싶어요. 처음이라서요.”

내가 바르르 떨리는 양손으로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말하자 오브리 공작의 삐딱했던 입가가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뭐, 내 딸이 그렇게 부탁한다면 어쩔 수 없군.”

그렇게까지 부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딴지를 걸었다간 분명히 보석 가게까지 갈 거다.

마차에 오르려던 그가 방향을 돌려 잘 뻗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근데 아까 수를 보니까 너무 많던데 취소하면… 안 될까요?”

“공작인 나보고, 지금, 그곳들을 다시 가서 취소하라는 건가?”

“아니면… 주변에 선물이나, 나눔이나 기부를 하는 건요? 특히 장난감 같은 건 보육원에서도….”

오브리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을 보고 나는 냉큼 입을 다물며 입가를 슬쩍 허물어뜨렸다.

“아까워서 그래요, 아버지.”

“뭐가?”

나는 오브리 공작에게 바짝 붙으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게, 전 5년 뒤에 여기 없을 텐데 너무 아깝잖아요.”

“…….”

“그리고 저는 한창 성장기인걸요. 같은 사이즈의 옷이 여러 개 있어도 곧 못 입게 될 거예요.”

오브리 공작이 나를 흘긋 보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 가져가든가.”

“제가 그걸 어떻게 다….”

“그럼 버려.”

이 인간, 진짜 말이 안 통한다.

나는 이 고집불통 인간과 대화하기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뿐이랴, 나도 조금 짜증이 나서 그냥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뒤를 따라 총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따라가기에 꽤 빠듯했던 속도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 느려져 있었다.

그제야 바닥만 보던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어느새 귀족 거리에서 벗어난 듯 사방이 소음과 각종 냄새로 가득했다.

내 걸음도 자연히 느려졌다.

‘신기하네.’

저건 뭘까?

불에서 옥수수 같은 걸 굽고 있는데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고소한 냄새에 눈이 멀 것 같았다. 걸음이 절로 느려져서 냄새를 한껏 만끽하며 가게를 지나쳤다.

다음은 처음 보는 과일들이 한가득 쌓인 과일 가게였다.

신기한 과일들이 많아 또 한참을 구경하며 가게를 지나쳤다.

“오….”

조금 더 가니 한쪽에서 과일을 갓 짜낸 음료를 죽통에 담아 팔고 있었다.

새콤달콤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잠시 멈춰서 과일이 쪼그라질 때까지 짜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지나쳤다.

‘아, 맞다.’

그러다 문득 여기에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급히 고개를 들자 한 손에 지갑을 엉거주춤하게 들고 있는 오브리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왜.”

“뭐 사시려는데 제가 너무 혼자 움직였나요? 죄송해요.”

“쯧, 됐다.”

그가 대번에 인상을 구기며 지갑을 콰득 움켜쥐더니 고개를 홱 돌리곤 또다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짜 모르겠다.’

저 솔직하지 못한 새침데기 인간은.

아니면 단지 감정 기복이 심한 인간일지도.

도통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오브리 공작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걷는 때였다.

쾅!

“이게 어딜 또 난동을 부려!”

어디선가 들리는 언성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뚝 멈췄다.

“저건….”

정확히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미친 과학자가 세상 어딘가에 버젓이 살아 있다는 증거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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