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30)

<13화>

「2016년 2월 17일

으아, 오늘 편 최고였다!

샤콜 오브리 공작 너무 멋있잖아. 자기 아들을 살리려고 걸어가는 자기 다리를 찌르다니.

이런 부모는 소설 속에나 있는 거겠지? 근데 이제 오브리 공작 안 나오는 건가? 그건 좀 슬프다.

원수 같은 내 가족들은 맨날 내 돈을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만 하는데.」

이게 뭐야?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림자를 보자 그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급히 몇 장 더 앞으로 넘겼다.

「2016년 1월 3일

<녹.눈> 오늘 연재분도 최고였어! 미쳤다, 미쳤어.

잃어버린 딸을 이렇게 입양하게 되는구나. 얘가 여주인공이겠지? 암튼 몰라! 키이 너무 귀엽다.

나도 키이가 되고 싶다.

순식간에 공작가를 휘어잡다니 최고야. 오브리 공작 너무 츤데레 아니냐고 ㅋㅋ 거의 팔불출 딸바보네.

거지 같은 하루에 <녹.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이게 뭐야?

앞으로 쭉 넘겨 보자 비슷한 얘기가 가득했다.

누군가가 소설을 보고 그 후기를 쓴 것 같은데, 거기에 왜 오브리 공작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파지직-!

앞으로 더 넘겨 보려는데 정전기가 거세게 흐르더니 책이 튕겨 나갔다.

- 아, 너무 많이 봐서 그래. 넌 아직 그렇게 보진 못하거든.

“…뭔데, 이게?”

- 지금 이건 네 삶이야. 정확히는 네 삶에서 강렬한 순간들이 적힌 네 일생.

“난 이런 거 모르는데….”

- 당연하지! 이건 네 전생이니까. 원래 자기 일생을 보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넌 여러 번의 삶을 사는 특이 케이스니까.

그림자가 여상하게 말하며 바닥에 나동그라진 책을 주워 들었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가 책을 가볍게 던졌다.

그러자 책이 책장에 쏙 꽂힌다.

-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네 수많은 전생이 여기에 기록된 거야.

“기록됐다고?

- 비록 너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네 영혼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림자가 입을 벌리며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 사실 기록실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데,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

순간 그림자의 웃음에 등줄기가 섬뜩했다.

- 예를 들어, 열쇠를 가지고 한 차례의 죽음을 겪은 자라거나.

“열쇠…?”

- 손목에 있는 그거, 금기된 술법이잖아.

그림자가 시꺼먼 손가락을 뻗어 내 왼팔에 적힌 ‘저주’를 가리켰다.

야금야금 내 목숨을 갉아먹고 있는 고대어를 한 차례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 그런 무서운 표정 하지 마~ 난 네 편이라고.

그 때였다.

새하얀 공간에 균열이 생기더니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 시간이 다 됐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우린 아주아주 오래 볼 테니까, 잘 지내보자, 파트너.

그림자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발밑이 무너졌다.

“악!”

단단하게 딛고 있던 바닥이 허물어지며 나는 아래로 추락했다.

물론 추락하는 것은 나뿐이다. 그림자는 여전히 무너진 공간 위에 덩그러니 서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첫 만남은 짧은 게 좋다잖아, 다음에 보자고.

능글맞은 목소리를 끝으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에 눈을 뜨자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화려한 천장이 보였다.

힐끗 눈을 돌려 본 하늘은 이미 새까매서 하루가 몽땅 통째로 날아갔음을 직감했다.

“아, 최악이네.”

날아간 시간과는 별개로 정신과 몸은 전혀 개운하지 않았지만.

***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응, 예쁘네.”

“이쪽의 살짝 차분한 남색 계열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응, 그것도 예쁜데?”

“제 생각엔 이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아가씨.”

“음, 이것도 좋아.”

눈앞에 쉬지 않고 들이밀어지는 드레스의 향연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옷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 옷들은 다 어디에서 난 거야? 굳이 옷을 살 필요가 있는 걸까?

메리와 골드가 신이 나서 수많은 장신구와 보석, 그리고 드레스를 늘어놓고 나를 꾸미기에 나섰다.

‘골드까지 이럴 줄이야.’

얌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쌍둥이는 쌍둥이구나 싶었다.

“세상에, 진짜 너무 잘 어울리세요….”

“특히 공작님을 닮은 이 녹음 같은 머리카락이 오늘 옷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엄청 열심히 찾으셨어요. 녹색 머리의 아이가 있다고만 하면 그게 어디라도 가셨거든요.”

아마도 대역을 찾기 위해서였겠지.

“마님께서도요….”

공작부인을 실망시키기 싫었을 테니까.

“…응, 그랬어?”

“네, 이렇게 사랑스러우신 분께서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사용인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답니다.”

메리의 말에 나는 대답하는 대신 활짝 웃어 보였다. 나도 사실 가짜라서 맞장구를 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골드가 드레스 위로 숄까지 걸쳐주었다.

거울을 보니 살이 조금 올라서 통통한 뺨에 머리에는 반짝거리는 핀을 꽂은 채 레이스가 치렁거리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낯설어하는 내가 비쳤다.

누구도 내가 얼마 전까지 고아였다는 걸 믿지 않겠지.

그만큼 고귀하게 보였다.

‘근데 키이라는 사람은 누굴까?’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느릿하게 생각했다.

그 그림자의 말이 틀림없다고 가정하고 이 세계가 정말로 내가 전생에 읽었던 소설 속이라면…….

일기장 같은 기록서에 잠시 언급됐던 그<녹.눈>이라는 소설 속이 분명했다.

‘키이, 라는 사람이 원래 딸이 될 예정이었던 사람인 건가?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쩐지 단번에 와닿지 않는 느낌에 어색해져 뺨을 가볍게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 대서특필까진 아니지만 오브리 공작이 딸을 입양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것도 같다.

“아…, 그러네.”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원래 이 자리에 오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던 거다.

누군가 뒤통수를 거세게 때린 느낌이었다.

“느리군, 날 기다리게 하다니….”

문득 들린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평소보다 어쩐지 한층 더 힘이 들어간 오브리 공작이 보였다.

‘뭔가 조금… 화려하네?’

오브리 공작은 언제나 장발을 하나로 땋아 내리고 장식이 거의 없는 옷만 입는 편이라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뭐가 달라졌는지 알겠다.

달라진 분위기가 의아해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있노라니 오브리 공작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보는 거야…?’

그것도 저런 찌푸려진 눈으로.

“오늘은 제법 볼만하구나. 옷이 날개라더니 개천에서 용이라도 난 듯하군.”

“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덕분이에요.”

언제나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가만히 서서 멀쩡한 제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옷깃을 터는 것이 어딘가 이상할 정도다.

‘아…, 설마….’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오브리 공작에 한해서는 ‘설마’의 확률이 너무 높았다. 나는 설마설마하면서도 미소를 띤 채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께서도 오늘따라 더 화려하고 멋있으신 것 같아요.”

실제로 오늘 그가 입은 옷에는 평소보다 장식이 좀 많았다.

내 말에 그가 흥, 코웃음을 쳤다.

“글쎄. 나는 평소와 같은데 아부는 잘하는구나. 뭐, 네 눈엔 내가 대단하게 보이기도 하겠지.”

그러면서 그는 그제야 제자리에 박힌 것처럼 굴던 발을 떼곤 몸을 돌렸다.

“가자.”

마차 앞에 선 오브리 공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엉겁결에 손을 마주 내밀자 그가 내 손을 단단하게 맞잡아 나를 마차 위로 올려주었다.

험한 일이라곤 전혀 안 했을 것 같은데 그의 손은 생각보다 제법 굳은살이 박여 단단했다.

마차에 타자마자 그는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마차에서까지 일을 볼 정도로 바쁜 거라면 굳이 같이 안 와도 됐는데.’

아마 퉁명스럽게 굴고 있는 오브리 공작 역시 긴 시간 딸이 그리웠던 거겠지.

그걸 내게서 충족하려고 하는 건 대충 알겠다.

‘그래 봐야 나는 가짜니까 귀찮게 굴면 쫓겨나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매달리지도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진짜 딸이 된 것처럼 굴면 된다.

오브리 공작도 그런 적당히 아빠 노릇을 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철든 딸을 원하겠지.

“어디 가보고 싶은 데라도 있나?”

“음….”

사실은 그냥 길거리를 구경하며 멍하니 걷고 싶었다. 손에 쥔 것이 자유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상황 보니 글러먹었지만.’

이맘때 애들은 뭘 좋아하더라.

나는 살짝 열린 창문에 턱을 괸 채 고민했다.

‘인형이나 장난감?’

아니다. 일단 귀족 영애니까, 인형이나 장난감은 좀 그렇겠구나. 나이도 열한 살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옷 가게나 보석이요? 아니면 간식 파는 곳이요.”

내 말을 들은 오브리 공작이 멈칫하더니 서류를 내려놓곤 나를 보았다.

그의 미간은 대차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게 네가 가고 싶은 곳인가?”

“네, 아버지.”

나는 선선히 빙긋 웃었다.

그러자 오브리 공작의 표정이 비뚜름하게 일그러졌다.

“아, 그래? 그럼 가든가.”

이내 그가 마부석으로 난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수도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보았다.

돈과 권력이 있는 어른이 어디까지 심술을 부릴 수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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