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0)

<9화>

공작이 그 장면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사용인들의 시비에 아이가 어쩔 줄 모른다면 나서서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제 이름을 팔아가며 적절하게 상대를 짓눌렀다. 그래서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고자질을 하러 왔군.’

하긴, 제게 얘기만 하면 방해꾼이 없어질 텐데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

오브리 공작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한 낯으로 총총거리며 다가온 아이가 서류와 서류 사이로 쟁반을 슬쩍 올렸다.

곁에 온 집사, 페드로가 눈치껏 쟁반 뚜껑을 열어주었다.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에 오브리 공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요리가 나온 까닭이다.

뵈프 브루기뇽처럼 보이는 음식과, 그 옆으로 새콤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거뭇거뭇한 파이가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소고기 위로 달콤시큼한 향이 느껴졌다.

“소고기 스튜인가? 주방장이 웬일로 잘 만들지 않는 음식을 만들었군.”

오전부터 서류 작업을 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사이 꽤 허기가 졌던 탓에 오브리 공작은 수저를 들어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썰린 소고기를 입에 넣었다.

부들부들한 소고기가 순식간에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여태 먹은 소고기 스튜 중 가장 맛있다.

사실 이렇게까지 부드러운 소고기를 먹은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잡내도 전혀 없다.

소고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일이라, 소고기 스튜는 주방장이 쉽게 내놓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다.

먹고 싶다면 요청할 순 있겠지만, 오브리 공작은 그렇게까지 음식에 진심은 아니었다.

‘아이의 부탁이라고 꽤 열심히 한 모양이지.’

그래도 이걸 끓이려면 못해도 네 시간은 필요했을 텐데 그 성격에 대단한 일이다.

“이 옆에 건?”

“베리 파이예요! 블루베리랑 스트로베리, 그리고 라즈베리랑 블랙베리를 듬뿍 넣었어요.”

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베리는 오브리 공작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내인 로사나뿐이다.

‘그녀가 말을 해줬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이가 로사나에게 향했다면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다.

“이상한 음식을 가져오는구나.”

“싫어하세요…?”

아니샤가 책상을 손끝으로 붙잡고 조심스레 묻는 모습에 오브리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내 딸이 기껏 ‘날 위해’ 가져다줬으니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페드로, 음식에 어울리는 차를 내오도록 해.”

“네, 각하.”

오브리 공작이 쟁반을 들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샤가 멀뚱멀뚱 서 있자 그가 소파에 앉아 고개를 까딱였다.

“거기 서 있을 건가?”

“아, 아뇨!”

아니샤가 후다닥 달려가 오브리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못 들어줄 건 없지.’

물론 제 이름을 팔았던 건 다소 괘씸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사용인들에게 자신의 딸을 ‘성심껏 모시라’고 명령했다. 그걸 지키지 않은 게 더욱 괘씸하다.

‘어제 로사나에게 준 차에 대해서도 물어볼 것이 있었으니….’

제 딸이 된 이것이 제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특별히’, ‘직접’,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페드로가 홍차를 내왔다.

오브리 공작은 포크를 들어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한 자세로 파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의 눈이 확 커졌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새콤달콤한 맛이 부드럽게 녹아내려 입 안을 적셨다.

이 파이 또한 사실 주방장이 잘 내어주지 않는 음식이었다.

샤콜 오브리가 베리류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떠세요?”

아이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맛있다.’

그는 순간 그렇게 말할 뻔한 제 혀를 아득 깨물었다.

저것이 전부 연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진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사고회로가 멎는 기분이었다.

“뭐, 그냥저냥이구나.”

그는 포크를 내려놨다.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그것이 약점이 될 수도 있고 그 좋아하는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

샤콜 오브리는 그 사실을 유년 시절에 누구보다 빠르게 깨달았다.

좋아하는 걸 드러내선 안 된다. 그 명제를 깨뜨린 것은 오로지 온전히 그의 것이 되어준 로사나 오브리에게뿐이다.

“아….”

아니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주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주방장에게 직접 메뉴를 선정해서 부탁한 모양이지?’

아니면 저것조차 연기일 수도 있지.

“그래도 내 딸은 날 닮아 예의라는 걸 알아서 부탁하는 법을 모르진 않구나.”

샤콜 오브리가 팔짱을 끼곤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들어주지.”

“아…, 티가 났나요?”

아니샤가 민망하다는 듯 뺨을 붉혔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고 샤콜 오브리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사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역시.’

이 아이가 이런 당돌한 성격일 줄은 몰랐지만, 사실 오브리 공작은 그게 안 좋게 보이진 않았다.

보육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내숭을 떨 필요도 있었겠지. 도리어 사용인에게 당하고 있었다면 실망했을 거다.

샤콜 오브리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그…, 제가 사실 공부를 하다가 대단한 비밀을 발견했는데, 이걸 사업화할 순 없을까 해서요!”

아니샤가 눈을 질끈 감더니 그야말로 속사포로 소리쳤다.

“바로 해고하도록 하…, 뭐?”

“네? 해고요?”

“…사업?”

“네.”

“해고가 아니라?”

“해고요? 무슨 해고요?”

두 사람이 동시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샤콜 오브리였다.

“아니, 아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야. 해고할 놈들이 생각나서.”

“아하….”

아니샤가 의아한 표정을 하다가 금세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 만들어진 것만 같은 웃음에 오브리 공작의 얼굴에 얼핏 불쾌감이 서렸다.

“사업이라니…, 무슨 사업을 말하는 거지? 말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는 걸 아주 싫어한다.”

“네, 합성 마석이라고 들어본 적 있으세요?”

“합성 마석? 그게 뭐지?”

“한 개의 마석에 두 개의 상반된 힘을 담을 수 있는 거예요.”

오브리 공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한 개의 마석에 한 개의 속성. 그건 세 살짜리도 아는 당연한 명제다.

“불의 마석과 물의 마석을 적정한 온도에서 녹여서 섞은 후 다시 굳히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두 가지 속성을 담은 마석이 돼요.”

아니샤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듯 완벽하게 근거를 들어가며 그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사족이라곤 전혀 들어가지 않은, 오브리 공작이 지금껏 들었던 것 중에 가장 깔끔한 브리핑이었다.

처음엔 들어주는 시늉만 하던 오브리 공작도 중간엔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며 경청했을 정도였다.

“확실히, 그런 이론이라면 가능성은 있겠군. 하지만, 일단 실험이 먼저 병행되어야 한다.”

“네, 천천히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얘기를 듣던 오브리 공작이 제가 한껏 허리를 숙이고 있었음을 깨닫곤 흠칫 놀라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드디어 말하는군.’

이런 조건을 내걸면서까지 해고하고 싶었다니, 못 해줄 것도 없다.

‘아예 귀족가엔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앞길을 막아버려도 좋겠군.’

애초에 자신의 명령을 불이행한 것이니 그 정도 엄벌은 내려져도 충분했다.

“그, 만약 상품화되면 한 2할 정도만 제 앞으로 떼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래, 해고를… 뭐?”

“2할이 어려우면 1할이라도 좋은데….”

오브리 공작의 낯빛이 굳었다. 그 얼굴을 본 아니샤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좀, 주제넘었나요?”

“그건 차후에 조율할 일이다. 그리고 주제? 무슨 주제? 넌 내 하나뿐인 딸이다. 이 나라의 공녀라고. 그걸 잊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짜증스러움에 한 차례 일갈했더니 아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오브리 공작이 낮게 혀를 찼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이런 맛없는 걸 가져와서 죄송해요.”

슬쩍 쟁반을 챙기려고 하는 아이를 보며 오브리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됐다, 그냥 두고 가. 페드로에게 치우게 할 테니. 공녀가 체통 없이 그런 거 들고 다니는 거 아니다.”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냥 가볼게요.”

“간다고?”

오브리 공작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네, 실험해 보시고 확인되면 다시 불러주세요.”

“이대로 간다고? 너 나한테 더 할 말 없나?”

“네? 네….”

“정말 없나? 머릿속을 잘 뒤져보도록.”

오브리 공작이 고고하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아니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

아니샤의 탄성에 그가 그제야 생각났냐는 듯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어제 어머니께 멋대로 음료를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정중한 사과에 샤콜 오브리의 몸이 순간 기우뚱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