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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139/139)

139화

“세이룬……?”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부르자,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이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사흘 동안 깨어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으면서 그를 마주 안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빨리 깨고 싶었는데, 소중한 기억을 되찾느라 늦었어.”

“……기억?”

세이룬이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나는 천천히 세이룬을 품에서 떼어 내며 그와 눈을 맞췄다.

“나 14살 때, 여기에 와 본 적 있어. 꿈에서였지만.”

“…….”

“엄청 행복한 말도 많이 들었고, 하늘을 날기도 했어. 덕분에 트라우마도 많이 극복할 수 있었고. 내가 용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아.”

순간, 세이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꿈에서 깼을 때는 모두 잊어버렸는데, 용을 좋아하는 건 안 잊어버렸나 봐.”

“……그러셨습니까.”

세이룬이 작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상체를 일으킨 뒤 짓궂은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 17살 때, 어린 세이룬도 봤어.”

순간 세이룬이 흠칫 몸을 굳혔다.

나는 순진한 것처럼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한 4, 5살쯤 되어 보인 것 같았는데. 어머님과 아버님이 너 싫어한다고 착각해서 가출했었지?”

“그, 으…….”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세이룬이 천천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때의 일이 부끄러운 모양이지.

웃음을 꾹 참은 나는 다리를 상체 앞으로 끌어모은 다음 무릎 위에 뺨을 기댔다.

“그때 헤어지기 전에 네가 내 손목에 반려의 표식 남겼잖아.”

“…….”

“기억나?”

세이룬은 이제 목 끝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이 이상 놀리는 걸 그만두기로 하고 세이룬을 꼭 끌어안았다.

“나, 이제 다 기억났어.”

“……에리카.”

“네가 한 말, 다 이해할 수 있어.”

내 말에, 일순 멈칫한 세이룬이 천천히 내 어깨에 뺨을 기댔다. 그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느릿하게 뺨을 비볐다.

“많이,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응.”

“그렇게 헤어진 뒤로 그대를 그리고 그렸어요. 몇십 년을 그렇게 그리워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대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가 눈을 내리깔며 내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후에, 그대를 이곳으로 불러온다는 말을 들은 후에는 그대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오시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세이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속상해하지 마. 참, 그보다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됐어?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야?”

내 질문에, 세이룬이 상체를 곧게 세웠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은 쾌활한 성격이시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매우 무뚝뚝하고 차가우셨습니다.”

“으응……?”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말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세이룬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으로서는 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니 별다른 표현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셨다고 해요. 대신 제가 아직 후계자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도, 비슷하셨고.”

“…….”

“어렸던 저는 그에 상처받았던 거예요.”

세이룬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가출까지 감행했던 아이의 마음은 대체 어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콕콕 쑤시듯 아팠다.

‘게다가 그때 봤던 세이룬의 얼굴…… 엄청 어둑했잖아.’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보호자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지.

내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본 세이룬이 괜찮다는 듯 다시금 웃었다.

“그대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니 집이 발칵 뒤집혀 있었어요. 저는 놀라서 곧장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어머니께서 울고 계셨습니다.”

그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당신 탓이라며 자책하면서 울고 계셨어요. 당신도 그렇게 자라셔서…… 당신의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세이룬이 돌아온 그날, 세이룬과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세뤼아는 점차 달라졌다고 했다.

무뚝뚝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필요한 말만 하기보다는 소중한 이에게 최대한 애정을 주게 되었다고.

물론 가끔 뚝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때와 놀랄 만큼 달라졌다고.

“지금 어머니께서 성에 와 계시니, 이후 만나 뵈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빨리 뵐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자,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네. 그대가 걱정되어서 오셨습니다.”

“내가? 안 깨어날까 봐?”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세이룬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던 나는 “아 참”하고 손뼉을 치며 세이룬을 바라봤다.

“이 말 하는 걸 깜빡할 뻔했다.”

“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와락 껴안았다.

“나, 돌아왔어.”

세이룬의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이자, 그가 잠시 멈칫했다.

잠시 말이 없던 세이룬이 이내 천천히 나를 마주 안았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Epilogue. 선물

수도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하나는 바네사에게서 왔는데, 다음 달에 오페라 같이 보기로 한 거 잊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였고, 에스로타에게서 온 다른 하나는 다음 달에 개최하는 티파티에 꼭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달에 반드시 수도에 가라는 신의 계시잖아…….”

답장까지 모두 마친 내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리는데, 문득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온기에 등을 기댔다.

“세이룬, 왔어?”

“시간 있으십니까?”

세이룬이 내 귓가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돌아봤다.

“당연히 있지. 근데 왜?”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이룬이 눈웃음치며 내 손을 잡고 깍지 꼈다.

보여 주고 싶은 거? 의아한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내 머릿속으로 일순 오래된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내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볼래, 엄청 궁금해!”

의자에서 일어나며 눈을 빛내자, 세이룬도 귀여운 듯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세이룬이 향한 곳은 내 예상대로 대공성의 후원이었다.

후원은 늘 그랬듯 고즈넉하면서도 아늑했다. 작은 새들이 먼 곳에서 평화로이 지저귀고 있었고, 흐드러진 꽃 아래는 개울을 따라 맑은 물소리가 졸졸 들려왔다.

가는 길이 해수 시절 14살 때의 기억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왠지 묘하게 느껴졌다.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왔다. 한때 세뤼아와 함께 걸었던 길을, 이번에는 세이룬과 함께 걸었다.

세이룬은 과거 세뤼아가 멈춰 섰던 곳에서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세이룬이 앞에 있는 조그만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은 온실처럼 온통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밖에서는 거울처럼 겉모양이 그대로 비치기 때문에 안을 볼 수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억과 꼭 같은 내부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여러 책과 악보가 꽂혀 있는 책장, 단정하고 깔끔한 책상,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필기구. 한쪽에는 쉬기 좋은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고, 하얀 커튼으로 가려지지 않은 유리 벽 너머로는 후원의 풍경이 그대로 비쳤다.

모든 것이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내 가슴을 가장 뛰게 만든 것은 한 곳에 자리한 흑색의 그랜드 피아노였다.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나만을 위한 작곡실이었다.

“작곡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랜드 피아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내게 세이룬이 말했다.

돌아보자, 그가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래서 그대를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을 준비해 놓고 있었어요.”

“……그래?”

“원래는 결혼식을 올린 직후 곧바로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확보할 수 있는 피아노에 대한 정보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이트 바네사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피아노를 제작할 수 있었어요.”

내가 복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세이룬과 바네사는 나를 위해서 피아노를 제작하려 하고 있었구나.

왠지 가슴이 따뜻하게 울렁거려와서,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피아노, 갖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붉어진 눈가를 손끝으로 쓸며, 그가 속삭였다.

“그랜드 피아노로 들여놓았습니다.”

“…….”

“음색도,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영롱한 것으로.”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눈물이 눈동자 가득 차올라서 시야가 뿌옇게 이지러졌다.

“세이룬, 그거 알아?”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흉하게 갈라졌지만, 세이룬은 내 말에 오롯이 귀를 기울여 주었다.

나는 두 손을 뻗어 세이룬의 뺨을 감쌌다.

“나, 너 아니었으면 평생 피아노 건반 한 번 눌러 보는 일 없었을걸.”

14살 때, 세이룬의 이 깜짝 선물을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피아노 앞에 설 때마다 움츠러들고 주눅 들었을 테고, 나중에 피아노를 칠 기회가 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연히 음악은 평생 내 길이 아니라 단정 지어 버렸겠지.

신아가 내 꿈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존재였다면, 세이룬은 내 꿈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존재였다.

“네가 내 시작이야.”

내가 속삭이자, 예쁘게 눈을 휘어 웃은 세이룬도 내 귓가를 감싸며 마주 속삭였다.

“제 시작도 그대입니다.”

열린 창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커튼 자락을 흔들었다. 코끝으로 향긋한 꽃내음과 풀내음이 맴돌았고,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무심코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따뜻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행복할 거란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아주, 오래.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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