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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138/139)

138화

머리가 흡사 쪼개지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하게 아팠다. 나는 자리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으면서도,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세이룬.

세이룬이었다.

저 아이는 분명, 어렸을 때의 세이룬이야.

‘으응…….’

그때, 해수의 품에 안겨 있던 세이룬이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선명한 금색 은색 눈동자가 해수를 향했다. 해수가 반색하며 아이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얘, 정신이 드니? 나 보여?’

‘…….’

해수의 질문에 세이룬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얼떨떨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나는 또 네가 어디 잘못된 줄 알고 엄청 걱정했거든. 무슨 꼬마들 발길질이 그렇게 잔인한지.’

하르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해수가 이내 세모꼴 눈을 하고 세이룬을 노려봤다.

‘그렇게 가만히 맞고만 있으면 어떡해. 도망치려고 했으면 적어도 몇 대는 덜 맞았을 거 아냐.’

‘…….’

세이룬은 그저 대답 없이 꼬물꼬물 자리에서 일어나 해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았다.

뭔가 벽을 세우려는 듯한 모양새에, 해수는 한쪽 눈썹을 스윽 치켜올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해수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안 아파?’

‘…….’

‘왜 여기 혼자 있어? 집은 어디야? 부모님은? 꼬마가 여기 혼자 있으면 위험해.’

‘…….’

해수가 옆에서 끊임없이 물었지만, 세이룬은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해수는 잠시 세이룬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김해수라고 해.’

‘…….’

‘17살이고 고등학생이야. 채화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나 수상한 사람 아니야.’

해수의 말에도 아이에게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해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세운 무릎 위에 뺨을 기댔다.

‘내가 그렇게 수상해 보이나…….’

시무룩한 목소리에 세이룬이 흘끔 해수를 쳐다보았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이룬…… 이라고 해요.’

‘세이룬? 이름 예쁘다.’

금세 활짝 웃음 지은 해수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아이는 이내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 해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은 어디야? 멀면 누나가 데려다줄게.’

‘……집, 가지 않아요.’

세이룬이 무릎을 조금 더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해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무슨 일 있어?’

‘부모님께서 저를 싫어하시거든요…….’

세이룬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상상치 못한 말에 나는 경악에 차서 세이룬을 바라봤다. 다시 보니 세이룬의 얼굴에 유독 그늘이 져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세이룬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수가 나직이 물었다.

‘부모님이 널 때렸어?’

세이룬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너한테 쓸모없다고 그랬어?’

순간 세이룬이 움찔하더니,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다가 푹 고개를 수그렸다.

‘……부모님 잘못이 아니에요.’

‘응?’

‘다 제 탓이에요. 제가 멍청하고 미숙해서…… 항상 저를 못마땅하게 보시고, 저와 말하는 것조차 싫어하시고…… 그래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게 뜻대로 잘되지 않아서…….’

숨이 막혀서 나왔어요. 아이가 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빛 은빛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 어, 어머님과 아버님이 세이룬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어린 세이룬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내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는 사이, 해수가 짐짓 엄하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네가 미숙한 건 당연한 거야. 네 나이 때는 누구나 다 그래.’

‘하지만…….’

‘그러니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해수가 세이룬과 시선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얼떨떨한 듯한 그 시선에, 해수는 멋쩍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그냥…… 자책하지 말라고.’

‘…….’

‘이거 내가 14살 때 누가 들려준 말인데, 뭐랄까…… 이 말 들었을 때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거든. 그래서 너한테도 들려주고 싶었어.’

아이가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쩐지 귓가가 발갛게 물든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세이룬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피식 웃은 해수가 흙먼지 묻은 흑발을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네가 미숙하고 멍청하다고 부모님이 뭐라고 해?’

‘……뭐라고 하지는 않으세요. 그냥, 항상 절 못마땅하게 보시고, 항상 더 잘해야 한다고 하시고, 또 스스로 느끼기에도 제가 너무 미숙해서…….’

세이룬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의 말을 유심히 듣던 해수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내가 제삼자라 뭐라 말 얹는 건 좀 뭐하긴 한데. 너, 부모한테 진짜 경멸 어린 시선 받아 본 적 있어?’

‘……네?’

‘부모가 진짜 자기 자식을 싫어하면, 아무런 기대도 없거든. 되게 벌레 같이 바라본다? 네깟 게 대체 뭘 할 수 있냐는 것처럼.’

마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는 듯, 세이룬의 눈동자가 잔뜩 커졌다.

해수는 피식 웃으며 계속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근데 네 부모님은 적어도 너에게 기대를 하시잖아. 꼬마한테 너무 과하게 기대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누군가가 너에게 기대를 한다는 건 좋은 거거든.’

‘좋은 거……?’

‘네가 그게 너무 힘들면, 부모님께 가서 솔직하게 얘기해 봐. 나 너무 힘들다고. 가출은 솔직하게 말해 봤는데 통하지 않을 때 해도 충분하잖아.’

대화를 나눠 보지도 않고 가출하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해수가 덧붙였다.

해수의 말은 어린아이에게 가출은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보다 조금 솔깃하게 들려왔다. 슬쩍 시선을 피한 세이룬이 느릿하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제 말을…… 들어주실까요? 나약하게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경멸하시는 건 아닐까요?’

아이의 눈동자에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해수는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거뒀다.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아. 어쩌면 네 부모님…… 널 엄청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세이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해수를 올려다봤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엄청나서 자식이 특출나기를 강요하는 부모도 있다고 들었어. 좋아하는 걸 표현 못 하는 사람들도 꽤 많고.’

- 내 경우에는 전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뒷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같은 생각을 속 안으로 삼킨 게 분명한 해수가 애써 웃어 보였다.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해수는 아직 17살 미성년자였다.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하지만 지금 그녀는 저보다 더 어린아이를 위해서 어른스러움을 가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너보고 이해하라는 게 아니야. 다만 네 부모님은 네가 힘든 걸 모를지도 모르니까, 네가 느끼는 걸 솔직하게 말해 보라는 거지.’

‘…….’

‘그러니까 약속하는 거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대화 나눠 보는 걸로. 알았지?’

‘……네.’

아이가 결심한 듯 비장하게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금 세이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네.’

세이룬의 얼굴이 다시금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가 이내 소심하게 손을 뻗어 해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저, 누나를 다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가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해수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왠지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던 조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게로 곧게 향하는 아이의 시선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해수는 이내 생긋 웃으며 세이룬의 손을 토닥였다.

‘보고 싶으면 또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누나는 곧 여기를 떠날 거잖아요.’

5살의 것이라 하기에는 꽤나 진지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지만, 해수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나도 집에 가야지.’

‘……그럼 누나, 손 잠깐만 빌려줄 수 있어요?’

해수는 흔쾌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세이룬은 조심스럽게 해수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았다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이가 놓은 손목 안쪽에는 방금까지는 없었던 은백색 꽃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 내 몸에도 그려져 있을 그 꽃문양이었다.

‘와, 꽃 예쁘다. 이거 뭐야? 네가 그린 거야?’

‘……소중한 사람에게 남기는 표식이래요.’

세이룬은 얼굴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부끄러워하면서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해수가 풋 소리 내어 웃으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내가 소중한 사람이야?’

‘……저를 살려 주셨으니까요…….’

세이룬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 말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릴 법했지만, 해수는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세이룬의 검은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기쁘다.’

‘정말…… 기쁘세요?’

‘응, 정말.’

세이룬이 행복한 듯 눈을 휘어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나중에―…’

그때, 어디선가 희미한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가를 직감한 듯한 세이룬이 다급하게 해수를 붙들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 꼭 찾아갈 테니까……!’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새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려오면서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머릿속으로 잊혔던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내가 해수였던 시절,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꿈에서 한 아이를 만났던 기억이.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떠오른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에리카……?! 정신이 드십니까?”

천천히 기억을 가다듬는데, 옆에서 세이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눈가를 붉게 물들인 세이룬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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