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39)

137화

* * *

해수가 이곳에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해수는 대공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상처를 조금씩 회복해 갔지만, 고작 며칠만으로 그동안의 모든 상처가 완전히 치유될 리는 만무했다.

해사원의 정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해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면서 지나갔다.

흐트러진 검은색 머리카락 위에 작은 나뭇잎이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웃은 세이룬이 나뭇잎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힉……!”

예고 없이 제게로 뻗어지는 커다란 손에 흠칫한 해수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제 실수를 깨달은 세이룬은 곧장 손을 내려 뒷짐 지고는 거리를 벌렸다.

“……때리지 않습니다.”

가슴이 미어져 오는 까닭에,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통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고 눈을 뜬 해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

세이룬은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결코, 그러지 않습니다.”

“…….”

“저는, 절대로, 부인님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이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는 듯 완전히 못을 박아 버리는 말에, 해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마운 말인데, 대체 왜 투정을 부리고 어리광 부리고 싶은지 모르겠다. 해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제가…… 잘못됐어도?”

해수가 눈을 들어 세이룬의 눈동자를 오롯이 마주 봤다.

세이룬은 그 말간 시선에 문득 숨이 막혔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윽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언젠가, 마음을 다해 좋아하게 된 상대가 제게 해 준 말이었다.

“해수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

“절대로,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세이룬은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모를 정도로 쉼 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해수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다. 듣고, 듣고, 듣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말이…….”

감정이 깃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해수가 말하는 것을 알아차린 세이룬이 입을 다물었다.

눈을 뜬 해수가 빙긋 웃었다.

무척이나 평온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말이, 얼마나 사람을 평온하게 하는지 모를 거예요.”

“…….”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그 말, 너무 좋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해수가 눈을 들어 세이룬을 마주 봤다.

“그거 알아요? 그렇게 말해 준 사람도 당신이 처음이에요.”

“처음…….”

멍하니 중얼거리던 세이룬은 이내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해수의 처음이 자신이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처음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나 화환은 처음 써 봐.”

“제가 에리카에게 처음으로 화환을 씌워 드렸습니까?”

“응, 처음이야.”

단지 이런 처음을 원했다.

“그러니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이 처음인 것은, 나만으로 족했는데.

순간, 세이룬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해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저기, 울어요?”

“아, 아닙…… 아닙니다.”

세이룬은 황급히 손등으로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손등이 스쳐 간 뺨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수가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가리켰다.

“거기, 뺨에. 눈물 자국 덜 닦였는데.”

“…….”

당황한 세이룬이 허둥지둥 손으로 재차 뺨을 문질러 닦았다.

뺨이 발갛게 물들 때까지 문지르는 손짓에, 한숨을 내쉰 해수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제지했다.

“그만해요. 그러다 상처 나요.”

세이룬의 손짓이 점점 느려졌다. 그의 눈동자가 울 것처럼 흐려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에, 당황한 해수가 그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울지 마요. 안 울어도 돼.”

“…….”

“어린 나도 안 우는데, 다 큰 어른이 울면 어떡해요.”

“죄송, 합니다…….”

세이룬이 눈동자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침울한 기색에, 해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타박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어린이인 내가 안 울고 버틸 수 있으니까, 어른인 당신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 그러니까 울지 않아도 된다고.”

세이룬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해수를 바라봤다.

해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발갛게 물든 세이룬의 눈가를 두어 번 매만지다가 손을 거뒀다.

검은색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당신이라면…… 가족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아요.”

미래의 자신이 왜 이 사람과 결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신 울어 주고, 곁에서 지지해 주고, 진심으로 아껴 준다.

정말, 좋은 사람.

“아…….”

세이룬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귓가를 붉히며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인정, 받았다.

“하늘을 난 거……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해수가 꿈꾸듯이 속삭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쾌감이 얼마나 황홀한지,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다음 날, 대공비의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해수가 아닌 에리카였다.

* * *

먼동이 터올 무렵, 나는 신아와 작별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

내가 신아의 꿈에 찾아가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신아를 찾아갈 수 있을 테니 돌아가는 발걸음이 마냥 무겁지는 않았다.

이지러지는 카페를 벗어나 다시 그 온통 새카만 곳에 발을 디뎠다.

다시금 묘한 기시감이 온몸을 감쌌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앞을 향해 쭉 걸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 ……어?

문득 어떠한 인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깨 아래쯤 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낡아빠진 티셔츠와 바지.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뭔가가 떠오를 것 같았지만, 인영은 빠른 속도로 곁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그 인영을 뒤쫓아갔다.

‘미친, 미친!’

인영, 그러니까 16,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앞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대체 뭘 보고 저리 다급하게 뛰어가는 건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여자를 뒤쫓아 갔다.

얼마간 더 뒤쫓아 갔을 때쯤, 돌연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던 나는 지금 좁고 다소 을씨년스러운 골목에 들어서 있었다.

- ……뭐야?

흠칫해서 걸음이 주춤거렸다.

당황한 나와 달리 여자는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익숙하게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 앗, 잠깐……!

나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쫓아 달렸다.

다행히 여자는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 있었다.

‘다 큰 애들이 말이야, 엉? 조그만 애 하나를 괴롭히고!’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여자가 사납게 호통쳤다.

주변을 살피니, 골목 구석에서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아이 하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 서 있었다.

아이들은 입술을 삐죽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여자가 걸음을 옮겨서 아이들 가운데에 엎어져 있던 조그만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제 막 4,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괴롭힘당한 건지 여기저기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심지어는 몸 곳곳에는 푸른 멍까지 들어 있었다. 여자는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뛰어온 듯했다.

순간, 머리가 욱신거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뭔가, 뭔가 기시감이―

‘흥, 메롱이다 뭐!’

어디선가 큼지막한 돌멩이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에게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내가 서둘러 달려가기도 전에, 여자가 반사적으로 한 손을 휘둘러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돌멩이를 쳐냈다.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여자가 윽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어, 어……?’

장난으로 던진 돌멩이에 사람이 쓰러지자, 아이들은 당황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아씨…… 더럽게 아프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여자는 아예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아까 맞은 손을 살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손은 군데군데 이미 멍이 들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멍 중 하나에 정확히 돌멩이를 맞아서 혈관이 터진 것처럼 피부가 검붉게 부어 있었다.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손등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도 돌멩이에 맞은 건가 싶어 놀라서 손등을 살폈지만, 당연히 상처나 멍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등에서 느껴지던 통증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내가 저 고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 괜찮니? 정신을 잃었나?’

손에서 관심을 거둔 여자가 제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꽤 익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옷도, 뭔가 익숙한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여자가 옆으로 흘러내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나는 숨을 멈췄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내 눈앞에 있었다.

- ……김…… 해수?

‘나’였다.

* * *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내 기억 속에는 없는 광경이었다.

‘이렇게 조그만 앤데 때릴 데가 어딨다고.’

해수는 툴툴거리면서 낡은 옷소매로 아이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 냈다.

나는 멍하니 서서 해수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대체 무엇인지.

환영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있었던 일인 건지.

아니면, 누가 내 모습을 흉내 내고 있다거나…….

되는 대로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이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정말로 있었던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어떡하지……. 숨은 쉬고 있는데. 병원이라도 데려가야 하나?’

해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의 코에 손을 대 보다가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꿈속이어서인지, 풍경이 낯설다는 것에 의구심이 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해수에게만 붙박여 있던 시선을 옮겨서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깨 아래로 길게 자라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는 앳된 얼굴.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눈가를 조프리며 아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나는, 이내 저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다 왔습니다, 비전하. 이 그림이 제가 비전하께 보여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레인 대공성, 지하실의 초상화.

그걸 인지한 순간, 미칠 듯한 두통이 머릿속을 엄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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