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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136/139)

136화

“흑, 흐윽…….”

울렁거림은 파도가 되어 깊은 곳에 잠가 둔 감정을 건드렸다.

기쁨과 설렘, 그리고 기이한 서러움 같은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세뤼아는 어깨를 떨며 울음을 터뜨리는 해수를 꼭 끌어안았다.

“……아가.”

해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세뤼아가 속삭였다.

“네가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흐윽, 흐어엉…….”

“네 음악은 정말 예뻐.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그러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말렴. 넌 가능성이 충분한 아이니까.”

해수의 울음이 더욱 거세졌다.

인정받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박혀 있던 말과 눈빛이 서서히 씻겨 내려갔다.

해수가 아이처럼 울면서 세뤼아의 품에 매달렸다. 피식 웃은 세뤼아는 해수를 더욱 꼭 감싸 안아 주었다.

넌 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말해 주면서.

* * *

세뤼아와 헤어진 후, 해수는 포카, 레비나와 함께 해사원으로 향했다.

마음이 너무나 술렁거려서, 도저히 침실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들떠서 걸음이 빨라진 까닭인지, 해수는 얼마 걷지 못하고 그만 발이 삐고 말았다.

“아……!”

“비전하! 괜찮으세요?”

“제가 얼음주머니 가져올게요……!”

뒤에서 따라오던 포카가 화들짝 놀라서 넘어지려는 해수를 사뿐히 안아 들었고, 레비나는 혼비백산해서 서둘러 주치의를 부르러 성 안으로 달려갔다.

“전 괜찮은데…….”

포카의 손길에 따라 벤치에 앉은 해수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포카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기는요! 세상에, 발목이 이렇게나……!”

“멀쩡하죠? 가볍게 삔 거라 괜찮아요.”

“하지만, 하지만…….”

포카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해수는 처음 받아 보는 과도한 걱정이 낯설면서도 낯간지러워서 서둘러 두 손을 내저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포카 씨. 음, 저 지금 혼자 있고 싶은데, 잠깐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있나요? 레비나 씨도 오시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근처에 있을 테니,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불러 주셔야 해요?”

“네, 포카 씨.”

포카는 여전히 걱정이 되는지 자리를 뜨면서도 계속 해수를 돌아보았다.

포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해수는 숨을 깊이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냥 발목이 조금 욱신거리는 것뿐인데.”

대체 걱정할 데가 어디 있다고. 간질거리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면서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창문으로 이쪽을 흘끔거리며 바라보고 있던 세이룬과 눈이 마주쳤다.

“……!”

흠칫 놀란 세이룬이 창문 아래로 쏙 사라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덩달아 놀란 해수가 그대로 굳어서 눈을 깜박거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해수가 갔을 거라고 생각한 세이룬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봤다가, 다시금 해수와 시선이 부딪쳤다.

세이룬이 다시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웃겼던 해수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소리를 들은 세이룬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세 번째로 눈이 마주쳤다.

해수가 세이룬을 향해 작게 손짓했다. 자신을 위해 그런 선물을 준비해 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해수의 손짓을 알아챈 세이룬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허둥지둥 창문을 열었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창문 아래로 뛰어내린 세이룬이 곧장 해수의 앞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정돈할 새 없이 그가 물어왔다.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해수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이룬의 눈동자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자신에게로 오롯이 향해 있는 금빛 은빛 눈동자에는, 이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상냥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해수……?”

해수가 말이 없자, 세이룬이 불안한 목소리로 해수를 불렀다. 아까 침실에서처럼 겁먹은 걸까 움츠러드는 기색에, 해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아, 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여기 앉을래요?”

해수가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안도한 듯 작게 웃은 세이룬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면……?”

세이룬이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어조와 눈빛이 어쩐지 익숙해서 기억을 되짚어 보던 해수는, 불과 얼마 전 자신이 이혼 얘기를 꺼내기 위해 그를 불렀을 때 그가 처음에 보였던 눈빛과 어조와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 같은 사람.’

이미 한 번 울었는데도, 어떻게 다시 기대할 수 있는 건지.

“해수.”

세이룬이 다시금 해수를 불렀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해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불러 놓고 멍이나 때리다니, 이 무슨 예의란 말인가!

“아, 죄송……”

“혹시, 하늘을 나는 걸 좋아하십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해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라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해수가 곤란한 듯이 눈치를 보자, 멈칫한 세이룬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죄송할 일이 아니니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모르신다면 한번 날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돼요?”

해수가 조금은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왔다.

그 조심스러운 어조에, 세이룬은 가슴이 싸하게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애써 웃었다.

“이곳에서 그대가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그 말.”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은 해수가 덧붙였다.

“그래서, 하늘은 어떻게 날 수 있어요?”

* * *

“우와…….”

해수는 멍하니 감탄하며 제 앞에 선 존재를 바라봤다.

길게 뻗은 몸체는 햇빛에 닿아 희게 반짝이는 검은색 비늘로 덮여 있었고, 머리 위에는 두 개의 뿔이 곧게 자라나 있었다.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곤, 여전히 애정이 어려 있는 금빛 은빛 눈동자였다.

“……용?”

아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작은 손가락이 세이룬의 커다란 얼굴에 닿았다.

그 작은 온기가 제 전부인 것처럼, 세이룬이 뺨을 기대 왔다.

“네, 해수.”

“용…….”

이 사람은 아빠와 다르다.

그 사실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해수가 웃자, 같이 웃은 세이룬이 천천히 몸을 낮췄다.

“뒤에 타시면 됩니다.”

“그냥 타면 돼요? 떨어지면 어떡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해인으로 떨어지지 않게 잘 잡고 있을 테니까요.”

“……네.”

고개를 끄덕인 해수가 조심스럽게 세이룬의 위로 올라탔다.

해수가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한 세이룬이 천천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멍한 부유감과 함께 땅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뺨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부딪쳐 왔지만, 어째서인지 하나도 차갑지 않았다.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해와 구름이 한층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와…….”

해수는 홀린 듯한 얼굴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푸르른 하늘에는 솜털을 흩트려 놓은 듯 조각구름이 흩어져 있었고, 커다란 해님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강렬한 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해수는 세이룬을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들어서 태양을 향해 뻗었다.

작은 손이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날고 있어…….”

자신은 지금, 용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정말로, 멋지고 환상적이면서도 머리가 아득할 정도로 행복해졌다. 하늘을 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가슴 가득 휘몰아치는 흥분감에 세이룬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사로운 공기를 가르며 부유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자그맣게 변한 대공성이 저 멀리 보였다.

그 옆으로는 번화한 광장과 여러 주택이 있었고, 또 그 옆으로는 다소 아담한 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다시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구름에 싸여 있는 거대한 산맥이 보인다. 생전 처음 보는 방대한 풍경에 해수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 좋아요…….”

해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늘을 나는 건, 정말 좋은 거였어.”

방학 때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종종 자랑하듯 비행기 탄 경험을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구름 바로 옆까지 올라갔다가, 조금 더 지나서는 구름 위로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갈 때는 귀가 먹먹해지고, 가끔 바람에 비행기가 휘청거리면 붕 뜬 느낌이 들 때도 있다고.

그때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서 맞지만 않으면 다행일 때였고, 비행기 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신경을 쏟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으니까.

‘근데, 정말 좋아…….’

해수는 세이룬의 목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좋아하는 걸 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잠시 그렇게 행복감에 젖어 있던 해수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당신이 내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고 세뤼아 님께 들었어요.”

세이룬이 잠시 움찔했지만, 곧 다시금 유유히 공기 속을 헤엄치듯 날았다.

해수는 세이룬의 몸통을 꼭 껴안으며 덧붙였다.

“제 음악을 들어 보고 싶다고 해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해수가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세이룬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침묵 속에서,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래에는, 해수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울 듯이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해수는 키득키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울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돼요.”

“……울지 않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용이 잘 운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울지 않습니다…….”

세이룬이 서러운 목소리로 꿋꿋이 주장했다.

조금 더 놀리면 당장이라도 정말 울 것 같았기에, 해수는 웃음을 삼키며 말없이 세이룬의 몸통에 뺨을 기댔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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