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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135/139)

135화

“네, 알겠습니다!”

비전하께서 대공 전하를 먼저 불러 주시다니!

포카는 활짝 웃으며 침실을 나섰다.

세이룬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해수가 부르자마자 당장 달려온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세이룬은 침실 앞에서 주춤거리며 들어오지 못했다.

해수는 방 안팎으로 포카와 레비나를 비롯한 많은 사용인이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세이룬에게 손짓했다.

“저…… 할 말이 있어서요.”

세이룬은 해수가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일부러 문은 닫지 않았다.

이윽고 해수의 맞은편에 앉은 세이룬이 조금은 기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란 게 무엇입니까?”

“저기, 제가 열심히 돈 벌게요.”

해수가 불쑥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세이룬이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래서, 원하시는 금액이 어떻게 되든, 제가 꼭 드릴게요. 그러니까.”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쉰 해수가 고개를 들고 세이룬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와 이혼해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이 꺼내진 순간, 사방에 정적이 가득 내려앉았다.

이혼을 입에 담는 검은 눈동자에서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 진심을 읽은 세이룬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위자료라는 걸 드리면 이혼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얼마든 상관없어요. 꼭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안 됩니다.”

굳게 다물린 입술에서 거절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혼만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세이룬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해수는 흠칫 놀라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위자료, 많이 줄게요. 후회하지 않을 만큼 많이 많이 줄게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네?”

“위자료는 필요 없습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세이룬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세상을 원하시면 그대의 발아래 세상을 바치고,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저의 모든 것을 그대의 뜻대로 바꾸겠습니다.”

“…….”

“하지만, 이혼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거절에, 해수의 눈동자가 파문이 일듯 흔들렸다.

“……왜요? 위자료 주겠다고 했잖아요.”

해수가 횡설수설하며 중얼거렸다.

“아빠가…… 아빠가 그랬는데. 엄마한테서 만족할 만큼 위자료를 받으면, 이혼해 주겠다고…… 아빠가 그랬는데.”

아이에게 있어 위자료는, ‘이혼’이란 행복에 다다를 수 있는 일종의 보물이었다.

위자료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위자료만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위자료로 할 수 없는 이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툭. 절망한 해수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해수가 알고 있는 ‘결혼’은 공포였다.

보아 온 결혼은 그것뿐이었고, 이미 트라우마가 깊게 각인되어 버렸다. 아빠가 입에 달고 살던 ‘위자료’만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는데, 막혀 버렸다.

“흑, 흐윽, 왜 이혼을 안 해 주는 거야…….”

해수가 울었다.

흠칫한 세이룬이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제게로 뻗치는 손을 본 해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자, 잘못했어요.”

“…….”

“울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때리지 마세요.”

아이가 벌벌 떨었다.

세이룬은 손을 뻗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어하듯 머리를 가린 두 팔과 최대한 덜 맞기 위해 잔뜩 웅크린 자세는 그동안 해수가 겪어 왔을 고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가슴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로 무너져 내렸다. 세이룬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제 손을 거둬들였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오히려 존재 자체만으로도 해수에게 트라우마를 줄 수 있다는 끔찍한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죄송합니다.”

울듯이 중얼거린 세이룬이 천천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해수가, 에리카가 고통받아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

그냥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체득하는 것은 너무나 달랐다.

* * *

- 해수야, 너 갑자기 왜 멍때리고 그래?

커다란 손바닥이 눈앞에서 마구 흔들렸다.

흠칫 정신을 차린 나는 신아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한참을 신나게 수다 떨다가 갑자기 넋을 놓은 내가 퍽 걱정스러웠는지, 신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 쉬듯 웃으면서 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달각거렸다.

- 아냐, 그냥……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 잊고 있었던 기억? 뭔데?

- 나 용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 그랬지?

뭘 당연한 걸 말하냐는 듯 신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왜 유독 용을 좋아하게 됐는지 알게 됐어.

- ……뭐어? 갑자기? 내가 저번에 물었을 때는 모른다고 했었잖아.

신아가 입을 쩍 벌렸다.

나는 떨떠름하게 볼을 긁적였다.

- 응, 이상하지? 그냥 너랑 얘기하다가 갑자기 떠올랐어.

- 정말 희한하네. 그래서, 왜 그렇게 용을 좋아한 건데?

혀를 내두른 신아가 이내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웃음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 내가 14살 때 말이야…….

* * *

세이룬이 나간 후, 해수는 침실의 테라스 의자에 앉아 해사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계속 머릿속에서 이혼은 안 된다며 눈물을 흘리던 세이룬의 얼굴이 맴돌았다.

그때는 ‘이혼할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는데, 감정이 모두 가신 후 찬찬히 되짚어 보니 그 눈물이 뭔가 이상했다.

“그 사람은…… 대체 왜 운 걸까?”

너무나도 아픈 것처럼, 그렇게나 서러운 얼굴로.

“이혼하자고…… 위자료를 주겠다고 한 말이 슬펐던 걸까?”

아니면, 아프거나 절망스럽기라도 했던 걸까?

해수는 의자 위에 두 다리를 모두 올리고는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이혼은 좋은 건데…….”

자신은 엄마처럼 살지 않아도 되고, 세이룬은 아빠처럼 쓰레기가 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미래의 자신은 왜 결혼이란 것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주위 사람들이 친절한 것을 보니 억지로 한 결혼은 아닌 것 같았다. 고민하던 해수의 머릿속에, 문득 예전 초등학생 때 수업 시간에 배웠던 게 떠올랐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미래의 자신과 세이룬은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한 걸까? 그래서 이혼하자는 말에 그렇게 아프게 운 걸까?

“……무섭다, 호르몬.”

해수는 소름이 돋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사랑이 뭐길래.

그때, 머리맡에서 세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나랑 좋은 거 보러 갈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해수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건지, 세뤼아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거요?”

“응, 좋은 거. 아가, 음악 좋아하지?”

“어, 어떻게…….”

아이의 눈동자가 움찔 떨렸다.

뭔가 잘못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에, 세뤼아는 해수의 아버지를 향해 울컥 치솟는 분노를 애써 다스리면서 생긋 웃었다.

“그럼 엄청 좋아할 텐데. 안 갈 거야?”

“……가도, 돼요?”

해수의 얼굴이 기대로 물들었다.

세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가. 너만을 위한 곳인걸.”

……나만을 위한 곳. 해수가 나직이 되뇌었다. 어감이 좋은지 배시시 웃는 해수를 흐뭇하게 바라본 세뤼아가 해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세뤼아가 가고 있는 곳은 성의 정문으로 이어진 해사원 방향이 아닌, 후문이었다.

후문을 나서자 이름 모를 하얀 꽃으로 가득한 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원은 해사원보다는 아담하고 풍경도 빼어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뭔가 심적으로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세뤼아는 후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박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고요한 자연이 주는 아늑함에 취해 멍하니 세뤼아를 따라가던 해수는, 이윽고 세뤼아가 걸음을 멈추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이곳이란다, 아가.”

세뤼아가 보랏빛 눈동자를 곱게 휘며 문을 열었다. 해수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이건…….”

아이의 작은 입이 도통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수의 반응이 귀여웠던 세뤼아가 키득키득 웃으며 해수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때, 너무 좋지? 앞으로 네가 쓰게 될 곳이란다.”

“네, 너무 좋아요……!”

서서히, 해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해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세뤼아가 입을 열었다.

“세이룬이 너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야.”

“……선물?”

문득, 해수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해수의 검은 눈동자가 세뤼아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세뤼아가 생긋 웃으며 검지로 입술을 가렸다.

“그러니까, 내가 아가한테 여길 보여 줬다는 건 비밀이야.”

“비밀…….”

해수가 혼란한 얼굴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모든 걸, 세이룬이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고?

―대체 왜?

“네 음악을 듣고 싶어 했거든.”

해수의 의문을 읽고 대답하기라도 하듯, 세뤼아가 말했다.

움찔한 해수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조금씩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눈가가 점차 뜨거워졌다.

“피아노? 미쳤냐?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별…….”

초등학생 때,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반 애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그래서 평소보다 집안일을 더 열심히 한 다음에, 아빠의 기분이 좋을 때를 노려서 조심스럽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진심으로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까짓 게 대체 뭘 할 수 있냐는,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눈빛.

그 뒤로, 해수는 아무에게도 자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음악이 듣고 싶다고?’

난생처음이었다.

그런 말을 들은 것은.

내 음악을, 누군가가 듣고 싶어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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