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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134/139)

134화

“연락?”

세이룬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끄덕인 세뤼아가 이전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아가, 그 친구 보려고 몽혼술을 썼다지?”

“……네.”

“하지만 에리카는 빙의자이기 때문에 몽혼술 자체가 독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에리카의 살고자 하는 본능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지 않도록 육체마저 이동한 듯해.”

“그렇습니까…….”

세이룬이 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적어도, 에리카가 죽을 위험이 낮아졌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세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시공간의 흐름이 뒤엉키면서 뭔가가 잘못됐나 봐. 육체가 사라진 빈공간을 메꾸기 위해서 14살의 해수가 영혼 상태로 오게 됐는데…….”

잠시 말을 끊은 세뤼아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뒷말을 이었다.

“……체사의 말로는, 그때 해수가 정신을 잃을 만큼 위험한 상태여서 가능했다더라.”

“위험한……?”

세이룬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일렁거렸다.

머릿속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아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그 아비라는 작자.”

세뤼아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아비라 부르기도 싫은 그 작자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은 까닭일 터였다.

벌떡 일어난 세이룬이 당장이라도 응접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세뤼아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상처라면 내가 해인으로 전부 치료했으니 괜찮아.”

“……그래도, 가 봐야겠습니다.”

“그 전에, 지금의 해수에 대해서 네가 더 들어야 할 말이 있어.”

“…….”

반쯤 나가 버렸던 세이룬의 이성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꽉 주먹을 쥔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세뤼아가 가라앉은 얼굴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해수는 그 작자 밑에서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왔어.”

“…….”

“그리고 그 남자는 해수보다 큰 체구의 성인 남성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을 크게 뜬 세이룬이 다급하게 세뤼아를 쳐다보았다.

충격과 경악으로 물든 아들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세뤼아가 말을 이었다.

“아까 해수가 질렀던 비명, 그거 너를 보고 지른 거야.”

겁에 질려서.

“…….”

제 존재 자체만으로도 해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세이룬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 * *

“깼니?”

천천히 눈을 뜨자, 머리맡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생긋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14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

어쩐지 멍해진 해수가 슬긋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이의 순수한 반응이 귀여웠던 세뤼아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몸은 좀 괜찮고?”

“몸……? 아…….”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모양인지, 발갛던 해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그마한 손으로 제 옷 위를 조심스럽게 더듬는 모양을 보건대, 맞은 흔적이 겉으로 보이지 않도록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을 중심으로 맞은 모양이었다.

세뤼아는 저절로 힘이 들어가려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면서 생긋 웃었다.

“아가, 우리 데이트 할까?”

“데이트……?”

맞은 부분이 아프지 않은지, 신기한 얼굴로 연신 제 몸을 더듬던 해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뤼아를 돌아봤다.

세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데이트. 예쁜 곳에서 맛있는 거 먹자.”

“하지만, 전…… 집에 가야 해요. 제가 사라진 걸 알면 아빠가…….”

해수가 주저하며 말했다.

해수의 입에서 나온 ‘아빠’란 단어에 세뤼아는 저도 모르게 꽉 주먹을 쥐었다.

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영문 모를 소리에 해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세뤼아는 괜찮다는 듯이 다시금 웃으며 해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다 설명해 줄게.”

“……정말, 괜찮아요?”

“응. 그 작자…… 아니, 네 아빠는 네가 사라진 줄도 모를 거야.”

세뤼아의 단언에, 해수가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그럼 해 줄 거지, 데이트?”

세뤼아가 상대방을 홀리듯 눈웃음치며 슬쩍 손을 내밀었다.

자네한이 봤다면 이제는 어린 아가에게도 미인계를 쓰냐며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이를 모를 해수는 그저 미인의 눈웃음에 홀린 채 멍하니 손을 맞잡았다.

세뤼아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가자.”

세뤼아가 안내한 곳은 해사원에 있는 하얀 돔이었다.

티 하나 없이 새하얀 돔 아래 자리한 고풍스러운 테이블은 장식인가 헷갈릴 정도로 예뻤고, 그 아래 깔린 하얀 대리석 바닥은 햇살에 비쳐 반짝반짝 빛났다.

“와, 예쁘다…….”

해수가 검은 눈을 빛내며 주위를 요리조리 둘러보았다.

해수가 자는 동안 세이룬이 명령으로 해수의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여성 사용인을 배치한 덕분인지, 해수는 처음 방 바깥으로 나갈 때보다 한층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단 거 좋아하니?”

해수의 맞은편에 앉은 세뤼아가 해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해수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세뤼아는 옆에 시립한 하인에게 홍차 한 잔과 코코아 한 잔 그리고 달달한 간식거리를 잔뜩 가져오라 일렀다.

명을 받은 하인이 사라졌다. 다시 해수에게로 시선을 돌린 세뤼아는 여전히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좋아?”

“네, 좋아요. 되게 예뻐요.”

해수가 세뤼아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런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세뤼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해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가, 너무 귀여워…….”

“네……?”

해수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세뤼아를 바라봤다.

흡사 안구에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오는 듯한 눈빛에, 세뤼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다는 말에 돌아오는 저 떨떠름한 반응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음료와 과자는 금방 준비되었다.

세팅을 마친 하인들이 물러간 후, 제 앞에 놓인 코코아를 홀짝이는 해수를 향해 세뤼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많이 혼란스럽지? 낯선 곳에 와 있어서.”

갑작스러운 질문에 해수가 움찔했다.

슬쩍 세뤼아의 눈치를 보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뤼아는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지어 보였다.

“낯설고 혼란스러운 게 당연한 거야. 겁먹지 않아도 돼. 내가 설명해 준다고 했지?”

“네…….”

“음, 뭐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아가, 뭐가 제일 궁금하니?”

코코아가 담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눈동자를 굴리던 해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긴 드레인 대공성이란다.”

“대공성……?”

현실감 없는 대답에 해수가 눈을 깜박거렸다.

세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미래의 집이지.”

“미래의 집이요?”

자신과 연관된다는 말에 해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뤼아가 웃었다.

“응, 네 미래의 집. 네가 나중에 살아갈 곳이야. 지금 잠깐 사정이 있어서, 미래의 네가 다른 곳에 가 있고 지금 네가 이곳에 와 있는 거거든.”

“미래의 나……?”

“그러니 당장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너는 지금 네 집에서 자고 있으니까.”

“자고 있다고요?”

이해가 가지 않은 해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 아, 혹시 저 죽은 건가요? 여기는 혹시 천국? 언니는 역시 천사셨구나?”

납득할 만한 결론을 끌어낸 아이가 말간 얼굴로 물어왔다.

잠시 말문이 막혀서 해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던 세뤼아는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는지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죽지는 않았어. 그냥 잠시 영혼이 미래로 넘어왔을 뿐이야.”

“영혼이……. 그럼 제 육신은 지금 혼수상태겠네요.”

해수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충격받지 않도록 돌려서 말하려 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와, 영혼 상태에서도 이런 거 먹을 수가 있구나.”

충격은커녕, 해수는 오히려 신기해하며 웃었다.

그만큼 아픔에 무뎌졌다고 생각하니, 세뤼아는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와야, 고작 14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제 상태를 알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어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한 해수가 이어 궁금한 점을 물어왔다.

“근데 여기가 제 미래의 집이라 하셨잖아요. 어떻게 제가 여기서 살게 되나요? 지금 주인은 언니이신 것 같은데.”

훅 들어오는 질문에 세뤼아가 난감하게 웃었다.

“음, 자세한 건 나중에 직접 겪으며 알게 될 테니 생략하도록 할게. 간단하게 알려 주자면, 네가 내 며느리가 됐어.”

“……며느리?”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해수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뤼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며느리. 너는 미래에 내 아들과 사랑에 빠지거든.”

“사랑……?”

“그래서 둘이 결혼했단다.”

그 말에, 해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결혼……? 내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해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찻잔을 쥔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얼마 마시지 않은 코코아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위태롭게 출렁거리다가, 결국 쏟아지고 말았다.

“아…….”

“아가, 괜찮니?”

깜짝 놀란 세뤼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해수를 살폈다.

뒤에 시립해 있던 포카와 레비나도 부리나케 달려와 쏟아진 코코아를 치우기 시작했다.

“전, 괜찮아요.”

해수가 웃었다.

그 기계적인 웃음을 보던 세뤼아는 한숨을 삼키고는 애써 입꼬리를 늘렸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네. 아가, 이만 방으로 돌아갈까?”

“네.”

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 * *

해수는 세뤼아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포카와 레비나의 도움을 받아 편안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자, 두려움으로 쿵쾅거리던 가슴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한 해수는 이내 결심을 끝낸 뒤 포카를 불렀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요.”

“네, 비전하! 뭐든지 말씀해 주세요!”

포카가 기뻐하며 눈을 빛냈다.

그것이 조금 부담스러워 슬쩍 시선을 피한 해수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 제 미래의 남편…… 이란 분을 데려와 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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