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대체 무슨 기억일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세이룬을 구해 줬다는 걸까.
나는 가라앉은 얼굴로 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달각거렸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신아가 문득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나 ‘신.로.줄’ 설정 짠 거 있잖아.
- 응?
- 너한테는 말 안 했는데 여주 절친으로 등장시키려 한 인물이 있었거든. 키, 외모, 체형 모두 네가 원하는 대로 반영해 놓은 사람인데, 원래 너는 그 사람에 빙의될 예정이었어.
- ……뭐?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아를 쳐다봤다.
천천히, 웃고 있던 신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 그런데…… 네가 그렇게나 빨리 가 버리는 바람에, 뭔가가 잘못됐나 봐.
- …….
- 네가 에리카의 몸에 빙의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에리카를 최고 행복한 사람으로 조정할 걸 그랬어. 세계를 너무 바꾸는 건 좋지 않다는 말도 듣지 말걸 그랬어. 바네사와도 친하게…… 그렇게 조정했으면…….
불현듯, 신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신아가 손을 뻗어서 내 뺨을 매만졌다.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한 온기가 뺨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 그럼 네가……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
신아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 뺨에 닿은 신아의 손을 붙잡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나 지금 엄청 행복해. 네가 설정 세세하게 알려 준 덕분에 위기도 전부 넘길 수 있었는걸.
- …….
- 진짜야. 에리카가 셀루리아 후작 가문에서 구박받았었지? 네가 알려 준 설정 덕분에 나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 됐어. 세이룬이랑 결혼해서 대공비도 됐고, 가문에 복수하려다가 나라도 뒤집었고.
- 나라를 뒤집었다고?
내내 침울해하던 신아가 그 말에 반응했다.
내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자, 신아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떠올랐다.
- 반란 좋지. 아니, 성공했으니 혁명인가? 뭐가 됐든 좋아.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참지 말고 그렇게 다 쳐부숴 버려. 알았지?
- 으, 으응…….
부자가 된 것보다도 나라 뒤집은 걸 칭찬받았다.
얼떨떨한 마음에 볼을 긁적이자, 신아가 피식 웃었다.
- 억울하게 참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아.
- 으응. 그, 그러니까, 나 엄청 잘 살고 있다고. 지금 무척 행복해!
- 그래……. 다행이네.
신아가 곱게 웃으며 내 볼을 매만졌던 손을 거둬 갔다.
나는 그런 신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너도 자책 같은 거 하지 마.
- …….
신아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말없이 제 손끝만 바라보고 있는 신아에게 내가 다시 한번 더 말했다.
- 자책할 필요 없어. 그게 뭐가 되었든 간에. 네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문득, 신아가 자조하듯 웃었다.
- ……계속,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했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깃든 웃음이었다.
- 그날 내가 너를 따라갔더라면…… 너는 지금 김해수로서 행복한 30대를 즐기고 있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신아는 내가 죽은 후로 지금껏, 저 질문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걸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나, 너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 …….
- 나 따라왔으면, 너도 죽었어.
- 둘 다 상처만 입고 끝냈을지도 모르지.
- 그럴 확률은 희박해. 너도 알고 있잖아.
내 말에, 신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그러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 하지만 계속 생각하게 되는걸.
- …….
-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따라갔더라면. 그 집에 갈 때는 항상 같이 가 주겠다고 했었는데. 약속을 지켰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역시, 나 때문에, 내가 가지 않아서 죽은 걸까.
- ……이신아.
- 후회돼. 그때 로스쿨 상담하러 가기 전에, 네 표정 분명 이상했었는데. 물었어야 했는데. 왜 그러냐고. 무슨 문자길래 표정이 그러냐고.
신아의 표정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검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너만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신아가 울었다. 울음을 토해 내는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나는 울고 있는 신아에게로 다가가 폭 안아 주었다.
- 흑, 흐윽…….
- 나도 생각한 적 있어. 너한테 말을 했으면,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고.
불현듯 신아의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나는 품에 안긴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어. 널 데려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때 면담 잡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 ……김해수.
- 그때 너마저 죽었으면 나는 죄책감에 고개도 들지 못했을 거야.
나는 내 품에서 벗어나려는 신아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신아는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동시에 내 구원자였다.
내가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할 수 있었던 것도, 내 정신이 이만큼이나 튼튼하게 지켜지고 있었던 것도 모두 신아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을, 내가 구덩이 속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을 리가.
- 그러니까, 이신아. 절대로 자책하지 마.
- …….
- 나 엄청 행복하게 살고 있거든? 근데 네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진다고. 나 슬프게 하고 싶으면 계속 슬퍼하든가.
협박조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신아가 피식 웃었다.
나는 신아를 안은 자세 그대로 손만 움직여서 신아의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아 냈다.
- 너 꿈에서 울면 현실에서도 울잖아. 내일 자고 일어나면 붕어눈 되어 있겠다.
-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신아가 불만스럽다는 듯 툴툴거렸다. 나는 소리 내서 웃으며 신아를 다시금 꽉 껴안았다.
- 몰랐어? 나 이신아 자격증 있잖아.
넉살스러운 내 말에 신아도 웃고 말았다.
점차 웃음이 잦아들 무렵, 나를 천천히 제게서 떼어 놓은 신아가 나와 눈을 맞췄다.
- 이건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 응? 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신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 너 그렇게 된 거…… 매스컴 타지 않도록 내가 막아 놨어. 네가 자극적인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거 원하지 않아서. 그러니까 이쪽 걱정은 하지 말라고.
순간, 내 얼굴이 굳었다.
- ……너, 설마.
- 응, 나 본가 들어갔어.
신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어떻게든 내 힘만으로 올라가고 싶었는데……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그래서 나도 흐름에 편승하기로 했어.
- …….
- 개 같은 혈연으로 고통받다 간 내 친구가, 지연 하나쯤은 잘 둬서 득 볼 수는 있는 거잖아.
신아의 담담한 말에,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 때문에 스스로 신념을 꺾어 버린 신아가 마음 아파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이번에는 신아가 폭 안아 주었다.
- 너무 슬퍼할 거 없어. 그냥, 내 위치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지 않게 된 것뿐이야.
- ……신아야.
- 너랑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 내가 절대로 외면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신아가 속삭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신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날의 상처는, 우리를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 * *
비명 소리에 대공성이 발칵 뒤집혔다.
놀란 사용인과 호위 기사들이 침실 앞으로 달려왔지만, 정작 위험 요소가 없자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아, 아아아악―!”
해수는 여전히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던 세이룬이 해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비명이 더욱 거세져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오, 오지 마세요! 제발 오지 마……!”
해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 척 보기에도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겁에 질린 것일까.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해수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세이룬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떻게 하면 해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다가갈 수 있을까. 세이룬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으렴.”
이곳에서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세이룬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막 여행에서 돌아온 건지 간편한 복장을 입고 있는 세뤼아가 서 있었다.
“어머니? 어떻게 여기에……?”
세이룬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지만, 세뤼아는 별다른 설명 없이 한쪽 눈을 찡긋해 주기만 한 뒤 곧장 해수에게로 걸어갔다.
“쉬이, 괜찮아.”
세뤼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자마자, 해수의 비명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천천히 침대 곁에 앉은 세뤼아는 해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도닥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아가…….”
몇 번 그렇게 어깨를 도닥이며 부드럽게 속삭이자, 이윽고 완전히 떨림이 잦아든 해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세뤼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저 괜찮아요?”
“그럼, 정말.”
“이제, 안 맞아?”
“응, 그러니까 괜찮아.”
다정하게 웃은 세뤼아가 두 팔을 뻗어 해수를 품에 안았다. 작은 몸은 세뤼아의 품에 쏙 들어갔다.
온기를 갈구하는 작은 소동물처럼, 해수가 세뤼아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세이룬을 흘긋한 세뤼아가 밖으로 나가라는 듯 문 쪽을 눈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이룬은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는 방을 나섰다.
분하지만, 지금은 자신보다는 세뤼아가 해수를 진정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되리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 * *
1층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얼마간. 분명 짧은 시간인데 세이룬에게는 마치 영겁과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드디어 세뤼아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세이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뤼아를 불렀다.
늘 짓고 있던 장난스러운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세뤼아는 다소 무거운 표정이었다.
“해수는요?”
“지금 자고 있어. 당장 해결 못 하는 특별한 문제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
확답을 들은 세이룬의 입에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자리에 앉은 그가 아까 전보다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는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히올란타를 여행하던 도중에 체사에게 연락을 받아서 말이야. 나 혼자 해인을 조금 무리하게 써서 곧장 달려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