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대공성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억만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로부터 대공성 주위에는 해인으로 거대한 결계가 둘려 있었지만, 세이룬은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한다며 결계를 몇 겹씩 더 둘러 성을 아예 요새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래도 아직 전쟁 중이니 세이룬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는 내 침실의 침대에 누워서 세이룬의 주의 사항을 경청했다.
“영혼으로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반 가사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리카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서 이신아 씨를 만날 동안, 에리카의 육신은 의식 없이 이곳에 누워 있을 거예요.”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네. 심장은 뛰고 있을 테니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세이룬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참, 신아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아? 저절로 알게 돼?”
“제가 에리카의 영혼을 이신아 씨의 꿈으로 보내 드릴 거예요.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응, 이것도 알겠어.”
나는 다 준비됐다는 의미로 눈을 감았다.
이마 위로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은 손길이 닿아 왔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누구 부탁인데, 당연하지.”
내 말을 끝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기분 좋은 해인이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노곤하면서도 나른한 감각이 기분 좋아서 무심코 미소 짓던 순간, 돌연 곤두박질치는 듯한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나오지도 않는 비명을 지르다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어두워…….’
온통 새까맣기만 한 곳에는 오직 나뿐이었다.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스러져 가는 목소리는 차라리 듣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내 모습 정도는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일까.
불현듯, 묘한 기시감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머리가 조금씩 욱신거리는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시감이라니, 그냥 착각한 거겠지.
‘일단, 앞으로 걸어가 보자.’
세이룬이 분명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고 했으니, 그럴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새카맣기만 했던 앞에 등불 같은 불빛이 천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앞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길의 끝에서부터 조금씩 희미한 빛이 새어 들기 시작했다.
‘저기가 신아의 꿈속인가?’
가슴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걷는 속도를 점차 높이며 빛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빛에 완전히 다다랐을 때, 갑자기 시야가 뚜렷해지면서 온통 하얗기만 하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 ……누구야, 너?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나는, 뒤이어 들려온 그리운 발음에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 내부였다. 코끝에서는 고소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맴돌았고, 귓가에선 오랜만에 듣는 케이팝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자, 검은 머리 여성이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장발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귀밑까지 짧아진 머리카락, 기억 속 낯빛보다는 초췌해진 익숙한 얼굴, 절대로 잊지 못할 그리운 목소리.
나는 멍하니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이신아.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입에 담는 한국어였다.
신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어?
경계심이 가득한 말투에,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봤다는 벅찬 감정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듯 가라앉았다.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를 잊어버렸냐며 투덜거리려는데, 문득 앞에 놓여 있는 유리컵에 비친 내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어?
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영혼 상태인 내가 ‘에리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 * *
에리카가 사라졌다.
예상치 못했던 일에 놀란 세이룬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리카가 누워 있었던 침대 위에 못 박혀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에리카를 감싸던 해인이 사라진 직후, 에리카가 사라졌다.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은, 밀색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를 가진 ‘에리카’가 아니라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어린 ‘해수’였다.
가슴께까지 오는 푸석한 머리카락, 영양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야윈 몸. 사붓이 눈을 내리감고 있는 얼굴은 기억 속 해수의 모습보다는 조금 앳되어 보였다.
‘아…….’
이 얼굴을, 잊었을 리 없었다.
세이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해수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으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으음…….”
뺨에 닿는 낯선 온기가 거슬렸는지,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이윽고 느리게 올라갔다.
혼곤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검은색 눈동자와 세이룬의 금빛 은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천천히, 해수의 눈동자에 공포와 두려움이 차오른다.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다음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대공비의 침실을 뒤흔들었다.
* * *
- 너, 누구야. 대답해.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스쳤다.
멍하니 유리잔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흠칫 정신을 차리고 신아를 마주 봤다. 신아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친구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 맞춰 볼래?
- 뭐?
- 나는 채화고등학교 졸업생이야.
뜬금없는 말에 신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다.
- 한국대학교 음대 작곡과 학생이기도 했고. 음악을 엄청 좋아했어. 절친이랑 같이 자취했는데, 그 친구가 내 음악을 많이 좋아해 줘서 노래를 만들면 가장 먼저 들려주고는 했지.
- ……뭐?
- 그날도 들려주기로 했는데…… 내가 죽어 버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
내 말이 이어질 때마다, 차가웠던 신아의 표정이 점차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차게 일렁이는 검은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 네가 보고 있는 이 몸의 이름은 ‘에리카 르 셀루리아’였어. 지금은 ‘에리카 르 드레인’이고.
- ……너,
- 그리고 이 몸에 빙의하기 전의 이름은, ‘김해수’야.’
순간, 덜컹 소리와 함께 신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서 눈을 깜박이며 신아를 올려다보자, 신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게로 다가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 해수야…….
- 시, 신아야. 여기 카페잖아.
나는 흠칫 놀라서 신아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신아는 나를 더욱 꼭꼭 끌어안기만 할 뿐이었다.
- 꿈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 어……?
- 용한테 부탁했구나. 나와 만나게 해 달라고.
역시 신아는 알고 있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신아를 품에서 떼어 낸 뒤, 눈을 맞췄다.
- 신아야, 말해 줘. 너 소설 《新 로미오와 줄리엣》있잖아.
- …….
- 그거…… 정말 수업 이해 더 잘하려고 쓰려 했던 거야?
신아는 그저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 원래는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겠어. 일이 다 뒤틀려 버린걸.
- ……?
- ‘정치와 종교의 상호관계성’ 수업 때문에 쓸 거라고 했던 건 다 핑계야. 애초에 쓸 마음도 없었어, 그 소설.
- ……뭐?
- 내가 필요했던 건 설정이었으니까.
내가 알고 있던 정보와 상반되는 진실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금은 씁쓸하게 웃은 신아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다시 내 반대편에 앉았다.
신아는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났어. 검은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였는데, 이름은 세뤼아라고 했던 것 같아.
- ……세뤼아?
나는 익숙한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내 반응을 본 신아가 작게 웃었다.
- 역시 아는 사이인가 봐. 아마도 시어머니려나.
- 그걸, 어떻게……?
- 그 사람, 너를 며느리로 맞고 싶다고 그랬거든. 그리고 너는 용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린 내게, 신아가 이어 말했다.
- 네가 그 사람의 아들을 구한 적이 있대. 원래라면 차원이 달라서 불가능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능했나 봐.
- ……내 덕분에 살았다고?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기억, 있을 리가 없다.
-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 영혼에 균열이 생겼다고 했어. 그래서 수인족들이 너를 살리기 위해 회의를 진행했고, 너를 이쪽 차원으로 데려오자고 결론이 났대. 해인을 주기적으로 주입해 주는 것으로 낫게 할 수 있다고. 인간의 수명은 짧으니까 네가 환생할 때를 기다려서 이곳으로 불러오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 …….
- 근데 영혼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려면 빙의라는 수단밖에 없었고, 빙의자는 전생의 기억을 모두 기억할 수밖에 없거든. 그래서 그 사람이 내 꿈에 나타난 거야. 너랑 가장 친한 나한테, 네가 빙의해서도 혼란 없이 새로운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아는 소설을 쓸 생각도 없었으면서 ‘신.로.줄’의 설정을 구상했다. 세뤼아에게서 들은, 그 세계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대한 자세히 설정을 짰고, 새로운 설정을 짜는 족족 나에게 미주알고주알 알려 주었다.
내가 신아의 소설 설정에 익숙해져서, 그 차원으로 넘어갔을 때도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그 정보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세히.
- ……왜 나한테 그 얘길 하지 않은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어머님은 내 꿈에 직접 나오지 않으신 거야?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신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물론 나도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러더라. 너는 영혼에 균열이 간 상태라 기억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 사실 자체가 혼란이자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어서 대신 나를 선택한 거라고.
- …….
- 어차피 너나 나한테는 해될 거 없으니까 하라는 대로 했지.
- 내 기억이, 불안정하다고…….
확실히, 나는 김해수 시절 세이룬을 만난 기억이 없었다.
세이룬이나 세뤼아, 그리고 다른 수인족들의 반응을 보면 분명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