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 *
확실히, 세이룬의 말대로였다.
나는 지금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내가…… 김해수 때 세이룬과 만난 적이 있다고?’
쥐어짜듯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떠오르는 기억 그 어느 곳에서도 세이룬은 없었다.
대체 어디서 만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세이룬의 설명을 들어 봤자 이해가 가능할 리 없었기 때문에, 나는 모두의 방문을 거절한 채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혔다.
고요한 공간이라면 이 혼란이 어떻게든 진정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지만, 얽히고설킨 상태 그대로 정체된 머릿속은 여전히 정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혹시, 나도 신아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가슴이 세차게 울렁거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신아에게도 물어볼 수 있었다.
신아에게서 듣는 대답은 아무래도 내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도,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진 친구잖아.’
대답을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신아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만나고 싶었다. 만나야 했다.
만날 수만 있다면, 만나서,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노라고 말해 줘야 했다.
친한 친구가 아버지한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던 신아였다. 불가능하다면 또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하니 너도 행복하게 살라고 신아에게 꼭 말해 주고 싶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마치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희열로 잠식되어 버린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서 다른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곧장 체사를 불렀다. 체사는 내가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착했다.
“혹시, 신아를 만날 수 있나요?”
서론 없이 곧장 본론을 꺼내자, 체사는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제수씨 얼굴에는 기대가 가득한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어요.”
“만나게 해 주세요.”
당장이라도 엉덩이가 들썩이려는 것을 꾹 내리누르며 말했다.
체사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만나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주체는 제가 아니에요.”
“그럼……?”
“용족이죠.”
그래…… 용족이 영혼을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고 들은 것도 같았다.
나는 곧장 세이룬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기 직전, 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중히 생각하셔야 해요. 제수씨는 정상적인 환생을 거치지 않고 기존의 육신에 빙의한 상태라, 영혼이 한 번 육신을 떠나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몰라요.”
“…….”
“최악의 경우에는, 영혼과 육신이 그대로 분리되어서 죽을 수도 있죠.”
그렇게 말하는 체사의 얼굴은 웃음기 한 점 없었다.
저건 정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해서 가능성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말없이 문고리만 꾹 잡고 있다가, 이내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괜찮아요.”
“…….”
“제가 죽으면, 세이룬이 반드시 다시 찾아와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
“그런데 신아한테는,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하니까.”
지금의 이 안온함을 유지하고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다가 후회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자,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체사는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제수씨는 정말 용감하네요. 부디 일이 잘 흘러가길 바라요.”
“덕담 고마워요.”
나는 체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다음, 곧장 방을 나서서 세이룬에게로 달려갔다.
“세이룬!”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대공의 집무실을 곧장 열어젖혔다.
유독 가라앉은 얼굴로 서류만 끝없이 처리하고 있던 세이룬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에리카?”
나를 눈에 담은 세이룬의 눈동자에 옅은 웃음이 스몄다. 이제 내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장 이어진 내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신아와 만나게 해 줘.”
“에리카.”
“체사 씨한테 부작용도 다 들었어. 난 괜찮아. 신아를 만나고 싶어.”
그의 눈가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휙 고개를 돌린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세이룬.”
“왜 저는 생각해 주지 않으십니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다시금 나와 시선을 맞췄다.
원망이 가득한 금빛 은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리카는 제가 가엾지 않으십니까?”
“……세이룬.”
“아주 잠깐만이라도 이 마음을 서로 바꿔 볼 수만 있다면, 에리카는 분명 제가 가여워서 어쩔 줄 모르실 겁니다…….”
서러운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세이룬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어도, 나는 아직도 샤샤가 죽었을 때만 생각하면 온몸이 섬찟했다. 갑자기 발밑이 훅 꺼져 버리는 듯한 아찔함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세이룬, 나 이번만 좀 이기적으로 굴게.”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엄지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닦아 낸 뺨 위로 새로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 손가락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입을 열었다.
“신아는 나를 살려 준 친구야. 나는 신아 덕분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신아 덕분에 음악 공부도 계속할 수 있게 됐어.”
“…….”
”그런 친구한테, 나는 인사도 못 하고 그렇게 죽어서 상처만 남겼어.”
샤샤를 잃어 봤기에 더 잘 알았다.
아무리 주위에서 친구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거라 위로한들, 친구 본인이 한 게 아닌 이상에야 그 위로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스물세 살이라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입게 된 상처였다.
나는 신아의 상처를 덜어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너는 온전히 행복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어.”
“……에리카.”
“그리고 나는 여의주를 가지고 있잖아.”
세이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생긋 눈을 접어 웃었다.
“내가 만약 다시 ‘에리카’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네가 나를 찾아오면 돼.”
나는 분명, 다시 너를 좋아하게 될 테니까.
세이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조심히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책상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 에리카는 아마 평생 후회하시겠지요.”
“…….”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내가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제 뺨을 감싼 내 손을 붙잡고 뺨을 비볐다.
“그러니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응, 노력할게.”
“한 번 반려를 잃은 용은, 집착이 심하니까.”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가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문득 등으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애써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하하 웃었다.
내가…… 응,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겠지.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을 무렵, 잠시 고민하던 세이룬이 덧붙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불안하니, 대공성으로 돌아가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응, 알았어.”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룬이 큰 걸 양보해 줬는데, 다른 자잘한 건 내가 다 맞춰 주고 싶었다.
‘신아를…… 정말 만날 수 있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친구를 곧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은 너무나 생경했다.
가슴이 벅차올라서 나도 모르게 연신 웃음이 나왔다.
“힘든 결정 내려 줘서 고마워, 세이룬.”
“……제 이기심으로 에리카를 강제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무척이나 기꺼워서, 나는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천천히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고동 소리가 따뜻했다.
* * *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번에도 역시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내가 앉아 있는 익숙한 원목 테이블 위에는 심혈을 기울여 정리했던 교양 필기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신아와 내가 자취하던 집에 있는 공부방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방을 훑던 시선이, 맞은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신아에게 닿았다.
신아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채 전공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신아의 모습에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해수야.’
맞은편에서 전공 수업 필기 자료를 정리하던 신아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응, 신아야.’
나는 잠긴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신아가 이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너 혹시…… 용 좋아해?’
‘용……?’
불현듯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잊고 있던 기억이 무의식 너머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한창 중간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아메리카노를 빨며 밤을 새우던 어느 날.
신아는 내게 뜬금없이 용을 좋아하냐고 물어 왔다. 그때 나는 그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나가듯 이렇게 되물었지.
‘근데 어떻게 알았어?’
신아가 웃었다.
그 웃음이 조금 미묘하다는 것은, 지금에서야 눈치챘다.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아서.’
그때는 그 대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 첫 시험이라는 중압감 때문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 뒤로도 신아는 종종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언제부터 용을 좋아하게 됐는지, 좋아하는 게 서양의 드래곤이 아니라 동양 용이 맞는 건지, 머리 색이나 눈동자 색은 뭐가 좋은지, 키는 어느 정도가 좋은지, 체형은 어떤 게 좋은지 등등.
그 질문에도 딱히 의구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냥 물어보면 물어보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른다고 꼬박꼬박 대답해 줬다.
신아가 《新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소설을 쓸 거라며 설정을 짜기 시작했던 건, 아마 그 이후였던 것 같다.